영화 <더 레슬러>가 감흥을 일으킨다면 그건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의 내용에 미키 루크라는 배우의 지난한 삶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키 루크의 지나온 삶을 아는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 사이에는 반응에서 사실 큰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미키 루크가 아니라 니콜라스 케이지가 이 역할을 했을 때 영화의 감동이 덜했을 거라면 그런 이유에서다.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라는 배우의 일종의 자기반영적 영화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자기반영성(reflexivity 또는 self-reflexivity)이라는 말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이때 오래전에 국내 번역된 로버트 스탬의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은 든든한 참고서가 될 것 같다), ‘매체 혹은 배우 또는 그 무엇이라도 자기의 과정과 장치를 반영하고 돌아보는 성질’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자기반영성은 환영주의(illusionism)의 반대편에서 좀더 현대적인 방식으로 혹은 자정의 계기로서 쓰여왔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냉철하게. 자기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는 건 종종 꿈을 꾸기보다는 반성하는 일이 된다.
이런 점과 연관해서 우리는 곧 깜짝 놀랄 만한 예를 극장에서 보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에서는 소문으로 들어온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하고 의지적인 일이 일어난다. 내 생각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누구보다 환영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자기반영성을 갖춘 기이한 시네아스트다. 총잡이로 시작한 그는 장르가 안겨준 환영적 운명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그걸 연기하는 자기에 관해서, 그런 그를 담고 있는 자기의 영화 구조에 관해서 생각하고 반영한다. 그리고 그가 자기반영적일 때 그는 영화에서 한 약속을 농담처럼 여기지 않고 가능한 한 지키는 타입이다.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지금까지 자기가 출연한 영화에서 거의 하지 않았던 행위와 선택을 하는 걸 보며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기 힘들다. 그가 이 행위로 자신이 밟아온 영화의 과정과 장치와 캐릭터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함께 얘기할 기회가 다시 올 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