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02년 여름. <한겨레> 증권 기자로 끗발을 날리던 그 시절, 거래소 시장에서는 섬유·의복 업종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주들이 떼지어 상한가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섬유·의복’이라 함은 옷감을 잘라 붙여 옷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파는 심심하고 재미없는 업종이란 뜻이고, ‘구조조정’이라 함은 그나마 그 회사가 망할 위기에 빠져 살아보려고 지푸라기 잡으며 발버둥친다는 의미 되겠다. 심히 ‘섬유·의복’스러우면서도 ‘구조조정’틱했던 그해 봄, 이익을 좇아 하이에나처럼 시세판을 노려보던 선수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종목은 단연 옷감 제조업체 ‘갑을’이었다. 박민규의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드러나듯, 어느 곳에 가져다 붙여도 심히 ‘헝그리’한 느낌이 드는 그 이름 갑을! 아무튼 갑을과 얽힌 아름답던 그해 봄의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보잘것없는 인생에서 벗어나 독학으로 주식을 공부한 ‘슈퍼 개미’ 강현수는 우연히 안산 출신 조폭 황종구의 작전주를 잘못 건드려 푼돈을 챙기다 목숨이 날아갈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황종구는 차트를 보는 현수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스카우트한다.
“어때 나와 같이 일해볼 생각은 없나?”
“저… (잠시 침묵) 차장 이상 대우는 해주셔야.”
의기투합한 둘은 작전 대상으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종목 갑을을 선택한다. 돈을 대는 전주는 갑을의 대주주 박 사장과 대한민국 상위 1%의 자산관리자 유서연. 여기에 엘리트 증권 브로커 조민형이 설계도를 짜고 행동에 돌입하자 갑을의 주가는 슬며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작전 시작 전인 3월27일, 갑을의 주가는 껌 한통 값보다 조금 비싼 780원. 주가는 슬금슬금 오름세를 타기 시작한다.
“저희 회사가 구조조정에 성공하면 다시 회생할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에 따른 기대심리가 아닌지.”
순진한 갑을 직원들이 단꿈에 빠진 사이, 호재가 발표된다. 외국인들이 갑을 주식을 대거 매수하고 나선 것이다. 외국인의 정체는 작전 세력의 일원인 ‘검은 머리 외국인’ 브라이언 최. 어찌됐던 ‘외국인이 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미들은 갑을을 추격 매수하기 시작한다. 갑을의 주가는 5월 말에 접어들며 2만4천원으로 30배 넘게 폭등하고, 각종 주식 게시판에서는 갑을에 투자해 대박을 터뜨린 개미들의 무용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가는 김에 10만원은 못 가겠냐”며 너스레를 떨던 그 개미, 지금 어디서 밥은 잘 드시는지 걱정될 뿐이다. 바야흐로 주식을 털어야 할 시점. 모래 위에 쌓아올린 갑을의 주가는 어느 한쪽이 주식을 대량으로 털고 나가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기술자 현수에게 미모의 유서연과 인생 막장인 박 사장이 은밀한 거래를 제의해오고, 현수가 망설이는 사이 박 사장이 먼저 지분을 정리해 털고 나간다. 주가는 이미 반 토막. 종구와 현수가 머리를 쥐어뜯을 무렵 뜻밖의 소식이 전해온다.
‘초강력 통풍 빤스 5세트 1만원.’ 갑을은 보도자료를 돌려 대대적인 신제품 광고에 돌입하고, 미모의 유서연이 마침 도입된 홈쇼핑 광고 모델로 등장하면서 통풍 빤스는 올해의 히트 상품으로 선정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펀더멘털이 아닐까요.” 조폭에서 당당한 섬유업체 시이오(CEO)로 거듭난 황종구의 인터뷰가 도하 신문의 경제면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결말로 치닫게 되는데, 그때 그 갑을 지금은 잘 있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