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다시 봄인가 싶을 때 생각나는 영화가 <호텔 슈발리에>다. 봄의 감정은 누가 뭐래도 ‘두근두근’이고 웨스 앤더슨이 쓴 우편엽서 같은 이 영화야말로 ‘두근두근’의 결정체다. 부분이 예뻐야 전체가 예쁘다는 걸 아는 스타일리스트답게 12분55초의 필름 안에는 앤더슨풍의 어여쁜 디테일이 즐비하다.
영화의 도입부(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초반부), 노란 목욕 가운을 입고 호텔룸에서 뒹굴거리던 잭(제이슨 슈워츠먼)은 전화 한통을 받고 얼어붙는다. 수화기 너머의 헤어진 애인은 잭의 기분 따위는 관심도 없다. 용건은 지금 당장 들이닥치겠다는 건데 약간 건방지고 은근히 제멋대로다. 잭은 딱딱하게 구는 척했지만 들뜬 나머지 조명을 낮추고 슈트를 차려입는 건 물론이고 극적인 상봉을 위한 맞춤 음악까지 골라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둔다. 둘 사이의 주도권이 그동안 어느 쪽에 있었는지 이만하면 충분하다. 벨이 울리고 여자(내털리 포트먼)가 들어온다. 포옹을 한다. 그럼 그렇지. 여자의 키가 훨씬 크다.
이쯤에서 관계의 클리셰를 말하자면 키 작은 남자는 키 큰 여자에게 종종 끌려다닌다. 대표적인 인물로 <졸업>의 더스틴 호프먼이 생각난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 국제금융위기를 논의할 리 없으니까, 둘은 당연히 침대로 간다. 그녀는 익숙하게 다리를 들어올리고 잭은 여자의 부츠를 벗긴다. 굽이 1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하이힐 롱부츠. 누군가는 이 순간, 잭이 여자의 부츠를 벗기는 지퍼 소리야말로 돈 떨어지는 소리보다 더 감동적이라고 했지만 이만한 일로 감동까지는 글쎄. 다만 부츠의 굽을 확인하는 순간 현실적으로는 제이슨의 키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영화적으로는 둘 사이의 관계가 다르게 보였다. 둘이 한컷에 걸린 첫 번째 신에서 제이슨 슈워츠먼의 키는 150센티미터쯤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털리 포트먼이 키 작은 것은 잭 블랙이 배 나온 것만큼이나 ‘보는 순간’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굽 높은 부츠를 벗고 나니 내털리 포트먼은 암탉이 카나리아라도 된 듯 얌전해진다.
기세등등하게 등장해 잭의 목을 안고 키스를 하고 커다란 칫솔로 이를 닦던 그녀는 곧 남자의 가슴에 안겨 친구로는 지내기 싫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알몸의 그녀에게 잭이 목욕 가운을 입혀 발코니로 데려간다. 파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슈발리에(실제로는 파리의 호텔 라파엘에서 촬영했다)의 테라스에 선 두 사람. 이 장면에선 제이슨 슈워츠먼의 키가 내털리 포트먼보다 확실히 크다. 그 순간에 절묘하게 맞는 음악 <Where Do You Go To (My Lovely)> 속에서 잭의 친절은 이제 여자에게 휘둘리는 모양새보다는 남자의 젠틀함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