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치맨>은 닉슨이 3선에 선공한다는 가정 아래 1980년대 냉전 시대의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화가 힘들다던 복잡한 내용의 원작을 대체로 잘 살렸다는 긍정적 평가가 이어지지만(난 원작 만화를 읽지 않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분명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각색을 포기한 데서 오는 시대착오적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왓치맨>을 보며 느꼈던 첫 번째 궁금증은 왜 원작에서 벗어난 시간적 가정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가장 간단한 대답은 원작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왓치맨>의 시대착오적인 설정을 유지한 것이 그 속에 내재한 ‘현재성’ 때문이라고 느꼈다. 즉, (그것이 가정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과거를 소환하는 시선 속에 현 미국사회에 대한 징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잭 스나이더가 이러한 시대착오적 설정을 유지한 이유를 미국의 현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하나의 ‘가설’이다.
시대착오적 설정과 섹스신 조크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설정 중 하나인 ‘가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물론 그들에게 가면은 단지 얼굴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 근거 그 자체다. 경찰에 붙잡힌 로어셰크(잭키 얼 헤일리)가 “가면만은 벗기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나에게서 ‘진정한 나’, ‘나보다 더 나다운 나’를 앗아가지 말아달라는 절규다. 물론 로어셰크만 그런 존재인 것은 아니다. 더 불쌍한 것은 댄(패트릭 윌슨)이다. 댄에게 슈퍼히어로의 옷을 벗고 은퇴한다는 것은 남성으로서의 성적 능력을 거세당하는 것과 같다. 발기부전인 그에게 효과만점의 치료제는 비아그라가 아니라 슈퍼히어로의 복장이다. 댄이 복장도착자냐고? 물론이다. 이러한 면에서 댄의 꿈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꿈에서 인간의 탈을 벗음으로써 슈퍼히어로가 된다. 가면을 쓴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벗고 완성되는 ‘진짜 나’로서의 슈퍼히어로.
이처럼 <왓치맨>은 ‘슈퍼히어로-가면’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왓치맨>은 거세된 슈퍼히어로, 즉 향유(jouissance)의 대상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왓치맨의 모습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안쓰러운 그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이러한 향유의 대상을 앗아간 존재는 누구일까? 영화는 익명의 대중을 그 자리에 앉힌다. 왓치맨은 자신들이 보호하려 했던 미국 대중에 의해 은퇴해야만 했다. “왓치맨은 누가 감시하는가”, 이 문구는 영화의 홍보카피로는 꽤 비중있게 다뤄지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구를 따라가야 한다.
“왓치맨은 누가 감시하는가”라는 외침은 왓치맨을 도시에서 몰아내기 위한, 그들의 활동을 금지시키기 위한 대중의 외침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은퇴를 강제했던 이러한 외침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태도에 대한 주변 국가의 공공연한 비판과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세계 평화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는 누가 통제하는가, 악의 축 운운하며 평화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미국은 도대체 누가 감시하는가, 하는 비판. 이러한 면에서 은퇴한 왓치맨에게서 현 미국사회의 징후를 엿보려는 시도가 그리 큰 무리는 아니지 않겠는가. 미국의 상징 중 하나인 쌍둥이빌딩이 무너졌고, 이라크전은 지리멸렬하며, 대공황에 버금가는 경기 침체는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어퍼컷과 훅을 마구잡이로 날리고 있다. 발기부전의 댄처럼 무기력한 미국. 감옥에서 탈출하는 로어셰크가 자신의 가면을 찾으며, “내 얼굴 어디에 있어”라고 외쳤던 것처럼 미국은 잃어버린 슈퍼히어로의 가면을 찾고 싶어 하며, 그것이 ‘진짜 나’라고 믿고자 한다.
이러한 면에서 강한 미국에 대한 믿음이 가능했던 시절, 그리고 ‘하드 보디’(hard body)의 시대였던 1980년대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영화 속 1980년대는 왓치맨이 거세된 시대였지만, 2009년의 미국사회에서 1980년대는 강한 미국이라는 ‘자신의 진짜 얼굴-가면’이 감춰진 곳이라는 허구적 믿음을 유지시켜주는 시기이고, 그것이 잭 스나이더가 시대착오적인 설정을 버리지 않은 이유이다. 잃어버렸던 가면-향유의 대상을 되찾은 이후 벌이는 댄과 실크 스펙터(말린 애커맨)의 섹스신에서 ‘환희’의 신음소리를 대신하여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Hallelujah)가 울려퍼진다! 이 섹스신은 <왓치맨>이 보여준 최고의 조크다. 코미디언의 조크가 세상의 공허와 허무의 이면이었듯이, 이 섹스신이야말로 현 미국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이면으로 하는 시뮬라크르의 쾌락을 보여주고 노래한다는 점에서. 그래, 그 시절을 찬양하든가, 말든가.
패거리 정신에는 공동의 적이 필요한 법
<왓치맨>의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는 세상에 어떻게 평화가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후반부다. 닥터 맨해튼(빌리 크루덥)은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진짜 신의 존재로 비약한다. 그는 인류의 모든 어리석음을 떠안고 죄인 되기를 자처한다. 닥터 맨해튼을 희생양으로 삼은 세계의 평화는 거짓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어느 인물의 지적처럼) ‘사지가 없는 기형아’와 다르지 않지만, 무엇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였을 때보다는 공동의 적에 분노할 때 더 똘똘 뭉치는 인류의 원초적 패거리 정신을 고려한다면 가장 현실적인 처방전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에서 <왓치맨>은 일종의 ‘전환서사’라 할 수 있다. 전후 일본 멜로드라마를 분석한 요시모토 미쓰히로는 이들 영화가 희생자 의식이라는 서사에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등장인물을 희생자로 그림으로써 관객은 그들과 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희생자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왓치맨>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왓치맨은 가면-향유의 대상을 즐기기를 포기하고, 인류 평화의 존립 근거인 ‘향유의 대상’으로 자신의 위치를 전환시킨다. 나치가 유대인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아 민족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듯이, 인류는 왓치맨을 ‘향유의 대상-제물’로 삼아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왓치맨은 혼돈과 타락의 세계를 평화의 세계로 질적 변환시킨 ‘매개자’이지만, 변화된 사회 체제에서 그들의 희생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왓치맨을 거세시켰던 대중은 세계의 평화가 ‘사라진 매개자-왓치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증오하며 평화를 즐긴다. 왓치맨은 기꺼이 그 향유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제공한다.
<왓치맨>은 거세당한, 아니 거세 직전의 현 미국을 바로 이러한 희생양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지금의 혼돈과 고통이 어느 미래에 숭고한 존재로 인식되기 위한 것이라고 위로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로어셰크의 일기가 도착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