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은 1980년대 후반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두 감독인 박광수, 장선우와 함께 호흡했던 배우다. <칠수와 만수>를 시작으로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은 당대 젊은 관객과 영화인들, 그리고 장차 충무로에서의 미래를 꿈꾸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정표 같은 의미의 작품들이었다. 박중훈이 시골 변두리의 미싱사 겸 재단사로 출연한 <우묵배미의 사랑>은 소시민의 우스꽝스럽고도 애틋한 삶을 변화하는 시대의 풍경과 겹쳐놓았고, 강원도 탄광촌의 무법자이자 권력자로 출연해 처음으로 얼굴에서 웃음을 완전히 지웠던 <그들도 우리처럼>도 당시 민주화운동 세대의 비애와 절망을 캠퍼스 바깥의 현실 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한 시대의 흔적이었다. 두 작품 모두 당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치열하게 경주한 걸작들이었으며, 박중훈은 능청스럽게도 정말 서로 다른 두 얼굴로 등장했다. ‘깜보’로 등장한 20대 초반의 이 혈기왕성한 청년이 어느덧 한국영화가 큰 몸짓으로 변화의 바람을 일구던 시기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자신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리고 그 스스로 자신의 표정을 바꿔가면서 이때부터 단순히 ‘유망한 신인’ 그 이상의 성취를 이뤄가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2년 전인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 좋건 나쁘건 다 서로 다른 ‘점’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다 어떻게든 이어져서 ‘선’이 된다는 거다. <바이오맨>은 물론 실패작이었지만 박중훈이라는 지금의 선을 만든 없어서는 안될 점이었다. 성공한 영화로 인기와 성공을 얻었다면 실패한 영화로는 그에 못지않은 교훈을 얻었다. 해외 촬영시의 계약에 관한 사소한 문제부터 시나리오의 영상화라는 본질적인 문제까지, <바이오맨>은 나에게 영화배우로서의 현실감각을 일깨워준 작품이었다.
<바이오맨>을 끝내고는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속편 격인 <내 사랑 동키호테>를 찍게 됐다. 최재성과 더불어 옛 용사들이 다시 모인 거라 즐겁고 편안하게 찍었다. 여주인공이 최수지에서 이응경으로 바뀌었고 김민종의 비중이 좀더 늘었다. 난 “이제 그만 눈을 떠요. 새 봄이 창가에 왔는걸”로 시작하는 주제곡도 불렀다. 아무래도 1편이 어떤 영화적 느낌보다 스타 캐스팅의 힘이 컸기 때문에 속편은 그걸 넘어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전편만큼의 흥행을 기록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위기’라고 부를 만한 순간이었는데 그래도 시나리오는 계속 들어왔다.
최명길씨, 너무 추워 하염없이 울더라
영화사 모가드코리아에서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을 함께하자고 연락이 왔다. 안성기 선배가 주연한 장선우 감독의 데뷔작 <성공시대>(1988)를 꽤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그런데 개런티가 문제였다. <칠수와 만수> 때 1300만원을 받았고 <바이오맨>은 1500만원, 그리고 <내 사랑 동키호테>는 1700만원을 받았으니 난 적어도 1700만원을 받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만큼 못 주겠다는 거다. 지난 몇년간 출연한 작품들이 다 잘 안됐다는 이유였다. 1500만원을 제시하기에 거절했다. 그래도 장선우라는 이름이 걸려서 그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며칠 뒤 다시 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영화사 마음이 바뀌어서 1500만원도 많은 것 같고 1300만원이면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치욕적인 기분까지 들었지만 마음을 진정하고 영화사에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계약서 쓰지 말고 노 개런티로 할 테니 영화 개봉하는 날 나에게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 깎지 말고 1700만원을 달라고 했다. 당시 모가드코리아 서병기 대표가 ‘허, 이 녀석 봐라’ 하는 표정이었는데 1990년 3월31일 개봉일이 됐을 때 정확히 1700만원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분도 참 멋진 사람이었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됴화>와 더불어 내 생애 가장 춥게 촬영한 영화일 거다. 아니, 체감온도로만 보자면 <우묵배미의 사랑>이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으로 1989년부터 1990년으로 이어지던 그 겨울이, 당시 ‘30, 40년 만의 최고 추위’라고 얘기되던 때였다. 변두리 시골 장면들을 경기도 가평, 양평, 청평 등지를 돌며 찍었다. 비닐하우스는 양수리에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추웠는데 나는 늘 얇은 ‘가다마이’ 하나만 걸치고 나왔다. 나중에 상대역인 최명길씨는 새벽쯤 되니 그냥 하염없이 울더라. 정말 못 견디게 추워서 운 거다. 더 추웠던 건 배고픈 미싱사 역할을 위해 식사를 제대로 안 했기 때문이다. 밥도 대충 한두 숟갈만 먹었고 하루에 계란 3개만 먹고 버틴 적도 있다. 그렇게 영화에는 내가 제대로 미싱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최명길씨와 삼양동 봉제공장에 함께 다니면서 ‘오바로꾸’ 치는 거까지 다 배웠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깝죽대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골 변두리까지 흘러들어온 미싱사 캐릭터를 만들려고 정말 노력했다.
장선우 감독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누구나 알 듯 비상한 천재성도 있고 이해하기 힘든 기인 기질도 있다. 당시 내가 남자로서 느꼈던 점은 남자한테는 좀 불친절하다는 거였다. 묘하게 남자와 여자를 대할 때 표정이 달라졌다. (웃음) 특히 개인적으로는 두번 정도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다. 한번은 ‘내일은 뭐하냐’라고 묻기에 ‘CF가 들어와서 그걸 찍을 거 같다’고 하니까 대뜸 “넌 아무거나 다 주워먹냐?” 그러는 거다. 그땐 나도 발끈해서 밥 먹다 말고 눈을 부릅뜨고 “주워먹다뇨?”하고 대들었다. 참 무례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떻게 보면 내가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바로 덤벼든 것도 좀 경솔한 행동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다혈질이었다. (웃음)
또 한번은 내가 터덜터덜 시골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카메라가 쫓아와서 내 모습을 담아야 했다. 그땐 돌리를 쓰든가 제작부 차를 써야 할 텐데 장선우 감독이 무턱대고 내 차를 가져오라는 거다. 고생 많았던 내 신형 소나타 말이다. 그 차를 그렇게 촬영용으로 여러 사람이 타서 쓰다보니 좀 망가졌다. 얼마나 기분이 상하겠나. 물론 현장에서 이런저런 상황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 그런 몇몇 상황들이 조금씩 나를 건드렸다. 그러면서 느꼈던 건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운동가로서의 능력과 경력은 존경하고, 예술가로서의 자유분방한 재능도 놀랍지만, 사소하나마 조금 더 주변 사람들에게 덕망을 보여줬으면 더 대단한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대화를 나눌 때도 약간은 독설가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데 딱 한편만 함께했던 배우로서 주제넘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진보주의자로서의 자유분방한 감성에 더해 따스한 인간미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거다.
장선우 감독 헤어스타일의 비밀
압권은 또 있다. 토니 레인즈가 만든 다큐멘터리 <장선우 변주곡>(2001)에서 했던 얘기이기도 한데, 평소 장선우 감독의 머리를 보면 그냥 대충 머리 감고 훌훌 털고 나온 것 같은 헤어스타일인데 그게 사실은 치밀하게 연출된 거다. 나 역시 그냥 아무것도 안 해서 흐트러진 머리인 줄 알았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하나하나 그 곱슬머리를 연출하는 거다. 그걸 보고는 이 사람 참 가식적인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웃음)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고는 ‘역시 장선우’라고 느꼈다. 지금도 나에게 당신의 최고의 영화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꽤 되고, 오래도록 사랑과 신뢰를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그러니 장선우 감독에게 섭섭한 마음은 있어도 그것이 고마움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세트가 아닌 현실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포착해낸 유영길 촬영감독의 촬영도 좋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정말 별것 아닌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 가슴 뭉클한 정서를 끌어내는 장선우 감독의 연출도 좋다.
당시 화제가 됐던 ‘아침 발기’ 장면도 개인적으로 잊지 못할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최명길과 첫날밤을 보낼 뻔하는 날이 있는데, 나는 그만 술이 취해서 그냥 자버리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자 최명길은 가고 없는데, 그냥 잠만 자버렸다는 생각에 나는 아침부터 분해서 씩씩거리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 그때 팬티만 입은 나는 불룩하게 완전히 발기한 상태다. 전날 아무런 일도 치르지 못하고 잔 상태라는 것을 정말 해학 넘치게 표현한 장면이다. 그건 내 아이디어였는데, 두루마리 화장지 다 쓰고 나면 남는 길고 동그란 봉을 팬티 안에 넣어서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영화 개봉하고 나서 ‘그거 혹시 진짜였어?’하는 질문들 참 많이 받았었다. (웃음)
<우묵배미의 사랑>을 끝내고 <그들도 우리처럼>을 계약했다. 탄광촌 사장의 아들이자, 동네의 망나니 같은 ‘성철’이라는 역할이었는데 사실 당시 최재성에게 먼저 갔던 역할이었다. 그런데 최재성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하게 되면서 어긋날 수밖에 없었고 내가 대신 들어가게 됐다. 나 역시 KBS 라디오 <박중훈의 인기가요>를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생방송으로 할 때라(월∼목 생방송, 금∼일 녹음방송) 스케줄이 빠듯했지만 조연급 역할이었고, 영화사와 내 상황을 충분히 서로 논의한 다음이라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면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가 서울예대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상황이 그러다보니 자주 만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칠수와 만수>를 함께했던 박광수 감독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시작할 수 있었다.
“미안하면 발가락 자르라”는 말에 충격
촬영은 강원도 고환, 사북 지역에서 이뤄졌는데 포장된 길이 제대로 있던 때가 아니라서 이동하는 데 무지 애를 먹었다. 매니저는 없었지만 내가 그때 처음으로 따로 운전기사를 두고 일했을 때다. 차에서 잠자는 시간이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이쯤에서 박광수 형에 대한 안 좋은 추억 얘기를 좀 하자면, 형이 참 호방한 성품의 신사이고 예술가로서의 직관도 뛰어난 사람이지만 종종 술에 취하면 평소와 달리 좀 과격해질 때가 있다. 한번은 다들 술에 취한 채로 여관방에서 연출부들과 함께 작품 얘기를 했는데,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내가 문성근 형과 싸우는 장면 얘기를 하면서, 액션신을 찍을 때 이렇게 해야 한다며 시범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런데 진짜로 나를 몇번씩이나 유도 엎어치기로 세게 넘기는 거다. 좀 기분이 나쁠 정도로. 그때 연출부들이 다 여균동, 이현승, 김성수 감독 같은 사람들이었다.
또 한번은 <그들도 우리처럼>이 개봉하고 난 다음 광수 형, 성근이 형 그렇게 퇴계로 근처의 선술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광수 형이 술이 좀 얼큰하게 취해서는 나더러 “너는 서울까지 왔다갔다하느라고 연기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거다. 내 스케줄 문제는 이미 사전에 합의를 했던 거 아니냐고 따졌지만 얘기는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연기도 아주 못했다고 그러는 거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미안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미안함을 보여주려면 여기서 가위로 발가락을 자르라는 거다. 워낙 작품에 대한 생각,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형이라 술김에 그런 얘기들을 했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굉장히 컸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광수 형과 공식적인 여러 자리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는 하긴 하는데 좀 서먹서먹해진 느낌이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정말 당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 성철은 영화 속에서 내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데 내 돈 들여 알아서 오토바이 능숙하게 탈 때까지 배웠고, 한번은 250cc 오토바이에 카메라 매달고 내 모습을 담는 장면에서 당시 레커차도 없는 상황이라 카메라 셔터를 내가 누르면서 오토바이를 몰았다. 넘어지면 끝장이었다. 그렇게 비 맞으면서 산맥 하나를 넘었는데 그럴 때 맞는 비는 차라리 돌이다. 그래도 눈 부라리면서 찍으며 나로서는 연기 투혼을 다한 영화였고, 주변에서도 당시로선 첫 악역 변신이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영화라 그 충격은 컸다. 그렇게 감독과 배우의 의견을 조율하고, 모두가 만족하는 답을 얻기 힘든 게 바로 영화 현장이다. 그래서 더 큰 희열을 주기도 하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