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다닐 때부터 상표 불명의 과자와 도넛 따위를 자전거에 싣고 다니던 아저씨를 굳이 쫓아가 “엄마가 불량 식품 먹으면 안된됐어요” 외치곤 했던- 주먹으로 맞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던- 태생이 반듯한 나의 10대 시절, 만화방이나 동시상영관은 범죄와 세균과 부정부패와 인간성 상실의 공간에 다름없었다. 당연히 학생 단속하기 위해 들어간 극장에서 <첩혈쌍웅>을 보며 눈물 흘리던 수학 선생님을 발견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백지와 마찬가지로 새하얗던 소녀의 정신세계의 축축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침입한 이가 있으니 바로 <나인 하프 위크>의 미키 루크였다. 친구가 가져온 영화잡지 브로마이드에서 그는 소녀의 표현 범위를 넘어서는 관능을 뿜어대고 있었다. ‘오 마이 갓’, ‘지쟈스’를 외치며 갈등하던 소녀는 결국 미키 루크의 거친 손길에 이끌려 동시상영관의 문을 열었고, 이 영화에 너무나 감동받은 나머지 아름다운 연애에는 딸기와 꿀, 얼음 등이 기본 옵션인 것으로 철석같이 믿는 왜곡된 성의식의 소유자가 돼버렸다. 이처럼 나에게 인생과 남자와 육체의 의미를 처음 알려준 미키 루크의 <더 레슬러>를 보는 건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절대 미모의 손상 정도는 <씬 시티> 때 이미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늙고, 초췌하고, 살림살이마저 비루한 아저씨 미키 루크라니, 차라리 잔인한 연쇄살인범을 연기하는 그라면 이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다.
<씨네21> 리뷰 제목대로 이건 미키 루크의 고해성사이거나 자전적 이야기다. 잘나가는 인기 스타에서 푼돈 받으며 몸을 던지고 부서뜨리는 몰락한 레슬러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딸이 그에게 그렇게 분노하는 데는 단지 아빠의 무능함 이외의 어떤 사연이 있음, 즉 미키 루크가 사생활에서 수없이 일으켜온 스캔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영화는 품위있는 ‘예술영화’이므로 극적인 인간 승리담을 그리지는 않지만 뭔가 끊임없이 그를 변명하려고 한다. 진짜 비루하단 느낌이랄까.
<더 레슬러>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미키 루크는 출연을 거절했어야 했다. <씬 시티>를 통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실패자였다. 늙었다기보다는 망가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그의 얼굴이 이런 그의 이력을 말해준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모든 남자가 착실히 연봉을 늘리고 그 연봉으로 주식 투자를 해서 돈을 벌어 저택과 세단을 사는 코스로 아저씨가 될 필요는 없다. 사실 아저씨가 된다는 건 나이 든다는 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저런 실패를 쌓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나 아저씨가, 웬만하면 불쌍해 보이는 평범한 아저씨가- 애시튼 커처가 차에서 잤다면 ‘이런 찌질이!’로 끝나겠지만 미키 루크가 차에서 자고 나오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 진짜 힘들었다고 넋두리하는 걸 들어주는 건 정말이지 괴롭다.
아저씨가 부담스러운 인간미를 보여주려고 할 때 가장 지루하고 나쁜 의미의 ‘아저씨’ 아우라가 형성된다. <더 레슬러>에서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단 하나의 풍경이 있다면 철철 넘치는 휴머니즘이 유일하게 배제된 그의 여전히 늘씬한 다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