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그림자살인> 좌충우돌 조선 탐정 납시오
2009-04-09
글 : 이화정
시대극에 대한 기대를 기분 좋게 배반한 <그림자살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주춤했던 충무로의 건재를 알릴 참신한 복병이 등장했다. <그림자살인>은 제법 큰 규모의 경성 시대극이자 한국 최초의 탐정 누아르물이며, 톱스타 황정민이 출연하는 상반기 기대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화를 걱정스럽게 보는 시선들도 있다. 앞선 경성 배경의 영화들은 스크린에서 별다른 흥행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최초의 탐정물이란 수식어는 기대와 더불어 모험을 수반한다. 누아르라는 무거운 장르는 충무로에서 시대극의 규모를 배반하는 비인기 장르다. 게다가 ‘밥상 스타’ 황정민은 최근 <검은집>에 이어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거듭 부실한 타율을 기록, <너는 내 운명>의 관객 동원력을 의심케 만들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이 장막들은 첫 공개 시사를 계기로 기우였음이 확인됐다. <그림자살인>은 걱정만큼 어둡지도, 생각만큼 가볍지도 않은 중도의 균형을 유지한다.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걱정을 놓고 볼 때 확실히 이 영화는 기대점을 더 많이 획득한 잘 짜여진 신작이다. 시나리오 집필부터 촬영, 후반작업을 거쳐 곧 개봉하는 <그림자살인>의 제작기를 재구성해본다.

‘구한말’과 ‘탐정’. <그림자살인>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요소를 버무린 누아르물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탄생시킨 최초의 탐정 뒤팽,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속 탐정 필립 말로우, 에도가와 란포의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 등 탐정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겠지만 <그림자살인>의 탐정은 클리셰만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는 이른바 말하는 명탐정이 아니다. 탐정 홍진호(황정민)는 돈 몇푼 받고 부녀자 뒤꽁무니를 쫓아 불륜사건을 조사하며, 남의 돈 떼먹고 종적을 감춘 자들을 잡아들이는 ‘심부름센터’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조선의 그 누구도 이 ‘시답잖은 일을 하는’ 진호를 탐정이라 불러주지 않았으며, 그 역시 탐정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모른다. 그 결과 이 영화에는 당장이라도 시가 연기를 뿜어대며 비상한 두뇌를 회전시킬 탐정은 없다. 진호는 명탐정의 말쑥한 트렌치코트 대신 주름 가득한 단벌 양복을 입고, 멋들어진 연기를 내뿜는 시가 대신 조선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궐련을 문다. 팜므파탈과의 하룻밤 정사도 진호에겐 논외다. 좌충우돌 어수룩한 조선의 탐정 진호만이 있을 뿐이다.

진호가 탐정으로 나서는 건 ‘보잘것없는’ 심부름으로 나날을 영위하던 그가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사건을 의뢰받으면서다. 의뢰인은 의학도 광수(류덕환). 열혈 의학도 광수는 평소 인체 해부실습을 위해 버려진 시체를 자주 수급해왔는데, 그 시체들 가운데 정부 실세의 아들 민수현(오태경)의 사체가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민수현의 살인범 누명을 쓰게 될 광수는 살인혐의를 벗고자 ‘돈만 내면 누구든 찾아준다’는 진호를 찾는다. 마침내 돈 500원의 유혹에 못 이겨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는 진호의 활약이 시작된다. 그리고 여류발명가 순덕(엄지원)과 광수의 협공으로 진호의 탐정놀이도 본격적으로 모양새를 갖춘다. 이들은 사건의 추악한 면을 숨긴 서커스단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고 진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탐정으로서의 첫 임무를 수행한다.

막동이 시나리오상 탄 바로 그 작품

“키워드는 탐정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똑같은 사건이라도 형사가 쫓는 일반적인 구도 대신 탐정을 등장시키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영화가 나오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림자살인>의 연출을 맡은 박대민 감독은 이 영화를 ‘사건’이 아닌 ‘탐정’으로 풀어 차별화를 시도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고민 중에 고종 독살설을 접했다. 덕혜공주가 일본에서 들은 이야기를 글로 남겨놓은 거라 하는데 이게 이야기가 되겠더라. 덕혜공주가 탐정에게 의뢰해서 수사를 한다! 이런 설정 말이다. 그런데 너무 역사적이라 결국 그 이야기를 다 버리고 구한말 탐정이라는 설정만 가지고 왔다.”

<그림자살인>의 신선한 소재는 이미 3년 전,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기대를 모았다. <그림자살인>이라는 지금의 제목이 붙기 전 이 작품은 <공중곡예사>란 제목으로 이미 알려졌다. 참신한 시나리오를 찾는다는 취지 아래 <씨네21>이 후원하고 힘픽쳐스가 주관한 ‘막동이 시나리오’의 2005년 당선작이라는 타이틀이 관심을 모으는 데 일조했다. 마침 그 전해 <다빈치 코드>가 불러온 ‘팩션’은 공모작들의 트렌드였고 <그림자살인>도 소재적인 측면에서 당시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장점은 소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600편의 작품에서 이 영화를 만장일치로 선발한 심사위원단은 “소재로 눈길을 사로잡더니 결국 완성도로 화답한” 기특한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었고 영화화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우선 기본적으로 세 형사의 정보를 모아 사건을 해결하는 <LA 컨피덴셜>의 구조적 접근을, <차이나타운>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탐정 ‘지티스’ 캐릭터를, 그리고 <장미의 이름>의 치밀한 사건 전개를 참고했다. 거기에 007 시리즈의 경쾌함과 <인디아나 존스>의 어드벤처, <피라미드의 공포>의 탐정물의 색깔을 조금씩 입혀나갔다.

<차이나타운>의 잭 니콜슨 캐릭터 참고

<그림자살인>의 시대적 배경인 구한말은 이전 한국영화에서 포착했던 구한말에서 한참 벗어난다.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였으나 자신의 꿈을 비극적인 시대에 묻어야 했던 <청연>의 ‘박경원’이 겪었던 수난도, 단지 한 여성을 사랑하고자 했던 순정을 대한독립의 커다란 사명 앞에 희생해야 했던 <모던보이>의 청년 ‘이해명’의 고통도 이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흥망성쇠도, 일제치하로부터의 직접적인 압박도 진호의 생활을 크게 침해하지 않는다. 순사부장(오달수)과의 마찰로, 과거 진호가 관직에 종사했었던 사실이 언급되지만 구체적 정황은 설명하지 않는다. 일련의 사건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그가 가지는 분노는 오욕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로서의 절규라는 커다란 숙명으로까지 발전하지 않는다. 돈을 위해 움직이고, 위험이 오면 몸을 수그리는 그는 대한제국이 아니라 지금의 현대에 적용시켜도 별 무리없어 보이는 현대적 캐릭터다.

‘시대의 무게에 눌리지 말고, 공기처럼 시대를 가지고 가자.’ 진호의 무책임한 모습과 나태해 보이는 대응에 바로 <그림자살인>이 시대를 포착하는 제1원칙이 담겨 있다. ‘모루히네’(아편)를 공급받을 수 있는 ‘주사옥’이 암암리에 성행해 사회 밑바닥은 썩어가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유희물 서커스단의 뒤로는 ‘유아성매매’가 비밀리에 자행되는 시기, 조선을 통치하는 일본인뿐 아니라 권력을 가진 조선인들까지 이 부패의 나락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이 암울한 기운 중 어느 하나도 영화의 전면에 도드라지지 않는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이 시기가 ‘변화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로 인해 이전에는 없었던 사회적 갈등이 속속 생겨난다.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은 이 변화를 몸소 겪는 세대다.” <그림자살인>을 제작한 김봉서 PD가 말하는 <그림자살인>의 밑그림은 이 영화의 시대상을 확연히 드러낸다. 돈에 움직이는 초보 탐정 진호의 도전, 사대부의 규율을 벗고 발명가로 꿈을 펼치고 싶어하는 순덕의 야망, 비인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일본인 의사 대신 선의로 환자를 대하고 싶은 젊은 의학도의 순수함, 그리고 권력자에 기생하여 한몫 챙기려는 서커스 단장의 야욕, 출세에 눈이 먼 경찰서장의 비리까지 이 영화의 군상들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시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욕망을 충실하게 수행해나간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혹은 알았든 알지 못했든 그들은 격랑의 시기에 몸을 맡기고 부유하는 존재였다.

“원래 이 시기엔 그랬어”는 현장 금기어

‘특이하게도’ <그림자살인>에는 경성의 대로변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낡은 흑백 사진 속에서 보았던 경성의 넓은 거리, 테마파크에 있을 법한 전차는 지금까지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의 표식이자 영화의 규모를 가늠하게 해주는 기준점이었다. 그런데 <그림자살인>은 이 표식을 거리낌없이 내던져버린다. “이전의 시대극에서 보았던 세피아톤의 색감 대신 사실적인 색감을 주는 데 치중했다.” 최찬민 촬영감독의 선택은 지금까지 시대극이 범했던 과오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지금 우리가 보는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빛바랜 낡은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닌 캐릭터가 살아서 걸어다니는 공간을 창조해야 했다.”

자료로도 간신히 남아 있던 1910년 조선의 거리를 스크린에 불러온 <YMCA 야구단>이 고증에 충실한 시대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림자살인>은 ‘과연 고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만들어진 시대극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 “당시 모습을 재현하자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원래 이 시기엔 그랬어’는 스탭들 사이에서 금기어였다. 모든 걸 새로 시작했다.” 박대민 감독은 영화의 비주얼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영화가 아니라 인물을 따라 움직이는 도구임을 강조한다. 좁혀진 거리 곳곳에는 ‘주사옥’, ‘방직공장’, ‘실험실’등을 재현, 각 인물의 활동공간을 마련한다. 사극이 아닌 SF물 같은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한 공간들이었다. <공각기동대>나 <스팀보이> 같은 일본 SF애니메이션의 어두운 분위기를 차용한 영화 속 공간들은 경성의 사회상을 설명해줄 또 다른 이면으로 작용했다.

<그림자살인>의 성취는 바로 이 지점과 맞물린다. 경성 대로변을 스캔하는 데 치중했던 이전의 시대극들이 큰 거리에 매몰된 거대한 이야기로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면 <그림자살인>은 디테일한 거리를 재현함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인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소한 거리들, 작은 여지를 마련한다. 그들 스스로가 활보하는 공간을 획득하는 순간, 이야기는 거대한 시대의 수레바퀴에 짓눌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한다. 폭발할 듯한 강렬함을 보여주었냐 한다면 <그림자살인>의 역량은 2% 부족하지만, 그 추리를 따라가는 데 어떤 억지스러움이나 미숙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차근차근 전개되는 이 영화의 재미는 결국, 인물들이 시대에 함몰되지 않고 각자의 욕망을 표출하도록 만든 데 있다. 그리고 이 성취에는 어느 한 사람의 색깔이 아닌 스탭들의 노력과 협업이 엿보인다. <그림자살인>은 충무로 기획영화의 도약을 알려주는 새로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빠듯한 예산에도 땅 보러 다닌 이유?

총 85회차, 순제작비 47억원. <그림자살인>의 규모는 기존 시대극의 스케일을 보여주기에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었다(<모던보이>의 순제작비는 80억원이었다). 앞선 영화들과 맞춰 책정된 80억원 예산이 시나리오 개발단계에서 줄어들었고 앞선 시대극들로 인해 지방자치단체의 제작비 지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빠듯한 예산에도 김봉서 PD가 제작비 책정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땅을 보러’ 간 일이었다. “부천, 합천같이 기존에 사용하던 세트로 가면 예산을 절약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새로 오픈세트를 지으려 하냐며 주변에서 충고가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오픈세트는 절실했고 스탭들은 결국 전주 오픈세트를 지어 ‘일’을 벌인다.

이 영화의 공간은 크게 번화한 대로변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흙바닥의 소로가 한축을 이룬다. 전차가 달리는 말끔한 앞면과 달리 골목 하나만 돌아서면 파헤쳐진 바닥과 공사 중인 골목들이 즐비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조화성 아트디렉터는 “뉴욕의 거리와 할렘가에서 볼 수 있는 혼재된 느낌을 경성의 거리에 끌어들이고 싶었다”며 이 영화의 전체적인 도안을 그린다. 애초 의도만큼 극적 대비를 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이 시도는 꽤 인상적인 장면을 탄생시킨다. 바로 영화 초반 진호와 광수가 용의자를 쫓는 추격신이다. “더이상 보여줄 수 없는 바로 직전까지 카메라를 끌고 갔다”는 최찬민 촬영감독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달리는 시간으로 20초면 끝날 작은 세트를 가지고 경성 거리의 스케일을 표현하느라 온 스탭들이 매달렸다. 마치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의 추격신을 보는 듯한 이 장면은 액션의 쾌감뿐만 아니라,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까지 훌륭히 해낸다. 적은 제작비가 체감되지 않을 정도로 꽤 짜임새가 있다. 결국 일반적인 시대극보다 줄어든 약 20억원의 예산은 그간 충무로가 시대극을 거치면서 쌓아온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효과적인 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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