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오늘, 아우슈비츠는 어디인가
2009-04-09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할리우드가 번역해낸 독일의 운명에 관한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이 영화로의 진입로와 진출로는 다양하다. 그중 상대적으로 가볍게 출입할 수 있는 통로는 케이트 윈슬럿이라는 배우가 만든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정열적이고 모험에 가득 찬 전직 여배우, 그러나 미국 교외의 작은 집에서 주부 노릇에 미쳐가는 ‘에이프릴’이라는 인물 연기는 훌륭하다.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설탕>(Le Sucre)에 나왔을 때 나는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스크린 전체가 쿵쿵쿵 진동하는 느낌을 받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의 케이트 윈슬럿이 그렇다. 한편으로는 고전적 글래머인 듯도 하지만 영민하고 단호하면서도 어딘가 케세라세라 흠, 미묘한 표정이다.

내가 케이트 윈슬럿에게 정작 처음으로 경탄했던 것은 제인 캠피온의 <홀리 스모크>를 보고서다. 인도에서 종교지도자 바바에게 빠져드는 루드를 연기한 케이트 윈슬럿이 노상방뇨하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통쾌하다. 하비 카이틀과 팸 그리어가 함께 출연해 영화에 이상한 열기를 더한다. 제멋대로인 영화. 제인 캠피온과 케이트 윈슬럿이 만들어낸 여성주의 영화의 희귀품목이다.

한나의 벗은 뒷모습이 주는 시각적 충격

이렇게 이미 케이트 윈슬럿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에 감화된 상태라고 해도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에서 그녀는 놀랍다. 영국 출생이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그녀가 독일 여성 한나를 연기한다. 알려진 대로 36살 여자와 15살 소년의 관계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한나와 소년 마이클(데이비드 크로스)의 정사장면이 있다. 이때 서 있는 한나의 벗은 뒷모습이 비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다시금 생각나는 이 뒷모습은 문맹인 독일 여성, 30대 여성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단단하고 견고하지만 청춘이나 20대가 아닌 여성의 육체가 정사를 앞둔 채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프레이밍이다. 이 장면만으로도 시각적 충격과 사유를 촉발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는 물론 더 놀라운 일을 예비하고 있고, 여기서 우리는 케이트 윈슬럿/한나 조를 떠나 성장한 마이클(레이프 파인즈)과 함께 독일 현대사의 악몽이자 서구 현대사의 악몽인 전범 재판소와 아우슈비츠를 재방문한다.

나는 원작, 각색의 관계라든가 문제라든가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특별히 천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상세한 묘사들이 참조, 인용되고 콘텍스트로 기능해야만 그 역사적, 정치적, 사적 의미들이 풍부해지는 텍스트다. 영화적 시간이나 영화산업이 허용하지 않고 반기지 않는 디테일들 말이다.

내가 처음 이 영화로 들어가는 길이 까다로울 수 있다고 한 것은 <더 리더>가 미성년, 소년과 30대 여자와의 문제적 사랑을 다루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실 이 영화와 소설을 다루기가 좀 겁난다. 다른 홀로코스트나 아우슈비츠를 다룬 영화들과 비슷하게 혹은 다르게, 이 영화는 이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를 피해자 유대인의 입장이 아니라 독일인 여성 가해자를 사랑하는 한 사법관의 시점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점에 개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막 사춘기를 통과하는 소년이 자신을 육체적으로 ‘남성화’시킨 여성에 대한 청년기 다운 연모와 동경 그리고 자신을 갑자기 떠난 사실들에 대한 원망과 독일 전후 세대의 사법관으로서의 태도 등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 역을 맡은 레이프 파인즈는 배우로서 출중하고 매력적이다. 어떤 거리감을 두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10월의 독일>과 <기억의 그림자>에 관하여

다소 길지만 책에서 기술하는 아우슈비츠를 일으킨 전쟁 범죄자들을 자신의 전 세대로 둔 이 전후 세대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 느끼는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당시에 나는 자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범행을 저지르고 또 범행을 수수방관하고, 외면하고, 묵인하고, 수용한 모든 세대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수치심 자체는 아니라도 적어도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한 다른 학생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내가 이들 학생들에게서 자주 발견하곤 했던 그 의기양양한 독선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어떻게 사람이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렇게 독선을 과시할 수 있는가? 부모로부터의 그러한 분리는,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부모가 저지른 죄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연루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단순한 수사요, 잡음이요, 소음에 지나지 않았던가?” 이후 마이클은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나에 대해 사랑 때문에 겪은 나의 고통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 운명에서 더더욱 빠져나오기 힘들고….”

이렇게 <더 리더>는 한나에 대한 마이클의 사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면서, 독일의 운명에 관한 영화가 된다. 아니 할리우드가 번역해낸 독일의 운명에 관한 영화가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독일의 운명은 통렬한 자기비판으로 이어질 때만 사회적, 공공적 가치를 얻는다.

전후 세대가 히틀러를 지지했던 자신의 부모 세대에 보내는 가장 통절한 비판으로는 파스빈더와 그 어머니와의 대면이 있다. 또 독일의 페미니스트 여성 감독 클라우디아 폰 알레만이 자신의 어머니와의 대화를 다룬 영화가 있다. 파스빈더의 영화는 <10월의 독일> 중 한 단편이다. 벌거벗은 파스빈더가 어머니를 추궁하는 장면은 놀랍다.

클라우디아 폰 알레만의 영화는 <기억의 그림자>(Shadow of Memory)라는 제목으로, 알레만의 17살 된 딸에게 84살 된 어머니가 왜 자신이 히틀러를 지지했으며 이후 그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는지 토로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 왜 히틀러가 대중에게 그렇게 호소력을 가졌는지를 일별하게 해준다. 1945년생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43년생인 클라우디아 폰 알레만, <더 리더>의 저자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1944년생이다. 이제 이 세대도 60이 넘었지만, 영화에서 한나와 마이클은 그보다는 젊다.

파스빈더나 알레만이 다루는 방식보다 저자인 슐링크나 감독인 스티븐 달드리는 훨씬 더 누그러진 어조로 이 사태를 이야기한다. 알레만이나 파스빈더와의 차이는 두 사람은 부모들의 친파시즘적 성향을 대중적 표명으로 다루었으나 슐링크는 소설 속 아버지를 지식인, 교수로 설정함으로써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마이클의 아버지는 철학 교수인데 히틀러 시절 스피노자에 대한 강의를 한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다. 그는 대중적 동조자가 아니다. 한나의 전범 재판이 진행되자 그래서 마이클은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칸트와 헤겔에 대한 책을 쓴 아버지를 의논차 찾아간다. 반면 주인공 한나는 문맹이다. 마이클은 이런 양극적 세계 속에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사유적 측면으로 보자면 그의 아버지는 직접적 동조자가 아니니 마이클은 파스빈더나 알레만과 같은 고민에서 벗어나지만 그러면서 파시스트 동조자와 육체적으로 얽혀버리는 것이다.

한나의 이러한 문맹은 그녀를 ‘독일적 운명’ 속으로 점점 더 끌어들이는데 예컨대 글자를 모르는 여자가 자신이 문맹인 것이 발각될 위험을 피해 택할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아우슈비츠의 경비원이었던 것이다.

끈질기게 계속되어야 하는 이야기

영화는 성적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이 역사의 후폭풍에 말려들면서 다른 관계로 흘러가는 것을 쫓아가는데 결국에 가서 ‘배움’과 ‘계몽’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예사 계몽이 아닌지라 이 전범 여자의 글 배우기는 결국 자신이 국가 폭력의 대행자였음을 깨닫게 한다.

소설에서 난 이 부분이 사려깊다고 느꼈다. 즉 ‘글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 읽기를 배운 한나는 강제수용소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와 희생자들이 쓴 글 등을 읽게 된다.

파스빈더가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부모 세대를 폭로하고 그 파괴적 측면을 부각했다면 이 영화는 전 세대의 ‘몽매무지’를 액면 그대로 문맹으로 설정하고 서사를 전개시킨다. 문맹이며 파시스트 동조자 세대와 육체로 얽힌 청년이 그 문맹을 벗겨내자, 이제 깨어난 역사의 판독자는 자살을 선택한다. 피할 수 없는 독일인의 ‘운명’이며 정의의 가차없는 귀환이다.

아우슈비츠는 근대성의 모든 신념을 송두리째 파국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수많은 소설들과 영화들이 반복해 아우슈비츠를 방문했다고 해도 우리가 근대의 그늘에 사는 한 이 이야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어야 한다. 관타나모 수용소나 최근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은 가자지구 등이 역설적이게도 당대의 ‘아우슈비츠’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도 있다.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는 고 장자연 사건을 언급하며 만일 성상납이 그 기획사 공간에서 이루어졌다면 그곳이야말로 성착취가 이루어지는 ‘여성의 아우슈비츠’라고 질타한다. 그리고 여성을 착취하는 최상층 ‘포식자’들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리기를 촉구한다. 포식자가 횡행하는 사회, 참 흉흉하기도 하다. 정의가 돌아오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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