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대니얼 헤니] 젠틀함을 벗어던지다
2009-04-10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유일한 ‘한국 배우’ 대니얼 헤니

아직 예고편의 모습이 전부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 대니얼 헤니는 몸에 꽉 맞는 슈트를 입고 쌍권총을 날린다. 울버린의 숙적 ‘에이전트 제로’. <007>의 첩보원을 연상시키는 이 변신은 헤니가 한국 팬에게 가한 최초의 ‘배신’이다. <울버린>의 작업이 진행된 지난 1년여, 그는 CF에서 여전히 특유의 미소를 유지한 채 사실은 모종의 ‘음모’를 실행해오고 있었다. 물론 그의 할리우드 진출은 당연한 수순이라 여겨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젠틀함이라는 기대를 벗어버린 그의 변신은 낯설기만 하다. 외국어가 주는 ‘달콤함’과 ‘예의바름’을 벗어던진 헤니는 네이티브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 좀더 터프하고 강한 남성을 드러낸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의 진짜 캐릭터가 발현되는, 그를 제대로 알아야 할 순간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의 촬영을 끝내고 짬을 내어 들른 한국행. 대니얼 헤니의 시계는 빠듯했다. 곧 할리우드에서 가질 <울버린>의 프로모션을 위해 출국을 앞둔 오후. 그는 <씨네21>과의 인터뷰를 선뜻 응해주는 ‘헤니스러운’ 친절을 베풀었다. <마이파더>의 성숙한 모습 이후 근 1년여, 다시 만난 헤니의 모습은 달라보였다. 스포티한 병사의 머리는 하나로 모아 묶을 수 있게 자연스러운 선을 그렸고, 흘러내린 머리로 보이는 얼굴은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꼭 맞는 슈트를 걸친 그의 모습은, 순정만화의 한 페이지를 북 찢어서 그 속의 인물을 걸어 나오게 한 것처럼 판타스틱했다.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F4’의 수식이 가장 잘 어울릴 남자를 찾는다면 그가 헤니일 것이라는 확신이 감돌 만큼의 비현실성. 그러나 촬영 내내 아이포드의 음악을 직접 선곡하며, 좁은 스튜디오 안을 자신이 가진 미소와 에너지로 채워나가는 모습은 그의 비현실에 반하는 헤니라는 배우의 현실성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돌아보면 헤니에게 현실성만큼 절박한 문제가 또 있나 싶다. 팬들은 그가 등장한 이래 매 순간 헤니라는 사람이 가진 것 이상의 초현실적인 젠틀함을 그에게 요구해왔다. <Mr. 로빈 꼬시기>의 ‘헤이든’이 전형적인 젠틀함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았다면 그 전형성은 <마이파더>의 가슴 아픈 입양아 ‘제임스 파커’에게조차 일정 부분 적용되었다. 헤니의 캐릭터는 언제나 <내 이름은 김삼순>에 머물렀다. 그리고 한국어가 서툴러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만한 억양과 음성, 표현을 찾지 못해서 굳어진 ‘친절한 외국인 헨리’에게 당연한 듯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엑스맨>의 외전이라 할 개빈 후드 감독의 <울버린>은 다르다. 돌연변이 초능력자 울버린(휴 잭맨)을 제거하기 위한 ‘에이전트 제로’ 역은 헤니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타이틀이라는 표면적인 의의만을 가지지 않는다. 쌍권총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초능력으로 주인공을 억압하는 에이전트 제로는 그 어떤 젠틀함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현실적이고 순수한 ‘남성성’의 세계다. 곧, 헤니가 처음으로 지금까지 가져온 젠틀함이라는 판타지, 그 부채를 벗어버릴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에이전트 제로는 내게 도전적인 캐릭터였다. 일반적으로 할리우드가 동양인에게 주는 쿵후하는 아시아인이 아닌 극의 흐름을 전개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한국에서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런 역할이라면 할리우드로 진출할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예기치도 않았던 때에 <마이파더>를 본 개빈 후드 감독의 출연 요청, 그리고 오디션도 보지 않고 덥석 비중있는 조연에 캐스팅된 행운의 헤니는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아시아 배우로서 보여야 할 모범까지 잊지 않고 챙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참석, 몇편의 광고와 TV 버라이어티쇼 출연을 위한 한국 방문을 제외하고 지난 1년여 그의 스케줄은 낯선 할리우드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연기를 시작한 충무로와는 다른 환경을 몸소 경험했다. “한국은 촬영이 늦어져서 다들 좀비처럼 돼도 필요하면 다들 계속한다 (웃음). 그런데 할리우드는 시간이 곧 돈이다. 몇 시간만 넘으면 그게 다 개런티와 직결되니 매우 조직적이다.” 1억5천만달러의 제작비, 마치 거대한 하나의 정부같이 짜인 촬영장에서 그는 무수한 직책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조직의 일원이 됐다. “한국에서 일할 땐 언제나 ‘컷’ 소리가 나면 감독이랑 대화를 했다. 함께 장면을 고민하는 거다. 그런데 할리우드에선 그때 모두 개인 트레일러로 간다. 내가 한국식으로 컷 소리가 나고도 감독 옆에 있었더니 다들, ‘헤니, 트레일러에 가서 쉬라’고 하더라. 괜찮다고 한 내가 도리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웃음)”

한국에서 헤니가 풍기던 이방인의 에티튜드는 아이러니하게도 할리우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그는 할리우드의 배우가 아닌, 할리우드로 진출한 ‘한국 배우’고, 따라서 그의 행동은 그들에게 할리우드 배우들과는 다른 독특한 성질의 것으로 비친다. 한국에서 헤니의 ‘서양적인’인 마스크는 할리우드에서 ‘동양적인’ 이미지로 치환된다. “미국은 ‘대니얼 헤니’라는 사람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한국인이 내게 기대했던 유머러스하면서 로맨틱하고 멋진 남자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배역의 기회가 주어지는 거다.” 헤니가 한국에서 가졌던 ‘멋진 남성’이라는 일종의 ‘색다른 차별’이 극복되는 순간이다. 할리우드의 제작사들이 헤니를 주목하는 건 그가 지금까지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 배우들이 밟았던 단점을 정확히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적인 마스크, 작업할 때 소통의 원활함을 담보해주는 서양적인 사고방식과 언어로부터의 자유는 지금 할리우드가 필요로 하는 아시아 배우의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할리우드 진출에서 헤니의 출발선이 다른 한국 배우보다 한발 앞선 건 이렇듯 확실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아직 그가 담보로 하는 건 ‘100%의 가능성’뿐이라는 점이다. 그가 지적한 자신의 단점에 따르면 자신은 “이번 작품에서 같이 공연한 휴 잭맨이나 리브 슈라이버 같은 다른 할리우드의 남성적인 배우들처럼 ‘굵고 낮은 목소리’를 가지지도 못한 ‘초짜 배우”일 뿐이다. 오디션을 보러 가면 “아시아인 배우로는 유일하게 조시 하트넷 같은 ‘진짜’ 할리우드 배우들과 같은 방에서 대기하는 것이 얼떨떨한 상태”며, 또 “아직 어떤 역할이 자신의 옷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기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그 정도의 위험 또한 감수해야 하는 그는 지금보다 미래가 더 궁금해지는 ‘어린 배우’다.

어쨌든 눈에 보이는 가까운 헤니의 청사진은 맑음 그 자체다. “아직은 비밀이다”라는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언급에서 그는 함께 작업할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배우를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과의 작업이 5월쯤 시작될 것이며, 이번엔 에이전트 제로와 반대로 ‘좋은 쪽 역할’이라는 정보도 살짝 늘어놓았다. 조심스럽지만 그는 기대에 차 있었고, 그 행운에 감사를 표했다. “<마이파더>가 없었다면 내가 과연 지금 할리우드에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자문한다. 사실 할리우드에서 난 굉장히 흥미로운 케이스다. 다들 왜 ‘넌 미국인이면서 한국에 가서 배우를 했냐’, ‘한국어는 할 줄 아냐’고 묻는다. 못하지만 연습한다고 대답하면, ‘그럼 도대체 연기를 어떻게 하냐?’고 되묻는다.”

할리우드 동료들의 의문에 대해서 그는 자신만의 확연한 답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 올 때 난 진심으로 배우가 되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꿈을 이루었다. 아직은 한국에서 한정된 역할밖에 못하지만 언젠가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거다.” 그는 자신이 ‘한국 배우’라고 했다. 아직은 ‘배우’로 인정받기보다 ‘멋진 남성 캐릭터’라는 차별이 더 크게 차지하지만, 헤니는 한국 팬들이 주는 이 ‘비뚤어진’ 관심이 싫지만은 않다. 그게 한국에 뿌리를 두고 싶은 자신의 본심이자 효과 좋은 자양강장제라는 걸 그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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