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세계의 관객을 만나다-베를린]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2009-04-15
글 : 한주연 (베를린 통신원)
알렉산더 벡은 나치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로서, 거리감을 두고 유대인 학살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번역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는 독일인의 전범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된 영화로 제작돼 케이트 윈슬럿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영국 감독, 배우 두명도 영국인이지만 나머지는 현지 독일 배우가 맡아했다. 역시 독일의 역사를 다룬 영화라 독일 관객들의 관심이 유독 많다. 독일에서 <더 리더>가 개봉한 지난 3월2일에는 하루 만에 관객 34만명이 몰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베를린 슈판다우의 시네플렉스 영화관에서 알렉산더 벡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소개를 해달라.
=나이는 35살이고 이름은 알렉산더 벡이다. 재활기관에서 젊은 중증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한다. 대학에 진학하려고 일주일에 두번은 인문계 학교에 다닌다. 지금 일하는 분야의 경험을 살려 대학에서 특수교육학을 전공하려고 한다.

-영화는 자주 보러 다니나.
=한달에 두세번 정도. 주로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는다. 독립영화, 할리우드영화, 역사물, 액션영화 등 거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영화는 어땠나.
=무척 좋았다. 특히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피상적으로 만나 차차 깊은 사랑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잘 묘사돼서 마음에 들었다. 또 누구나 희생자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줬다.

-누구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거라면….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영화를 넘어서 독일 전후 전범의 죄와 벌 문제를 심도있게 다뤘다. 특히 가해자인 나치전범의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한나는 강제수용소 경비직을 수행하며 나치 범죄에 가담하는 가해자였지만 그녀는 사실 시대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한나는 자신이 문맹자인 것을 부끄러워했고, 그걸 밝히지 않음으로써 탈나치 공개 재판을 통해 자신의 죄과보다 훨씬 더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결국 시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남자주인공 마이클도 어떻게 보면 사춘기 순정을 이용당한 피해자였지만, 나중에 한나가 문맹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간접적 가해자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잖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뭔가.
=정사장면. 아니, 아니. 이건 농담이다. (웃음) 마이클이 뉴욕에 사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찾아가 한나의 유품인 작은 상자를 건네주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그 유대인 여성은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해 우아한 주택에서 살지만, 한나가 평생 모은 얼마 안되는 전 재산으로 속죄하는 상황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찡했다. 희생자였던 유대인 여성의 눈에 띄는 부에 비해 한나의 초라한 유품이 대조된다.

-독일 사람이라 느끼는 바가 더 클 것 같다.
=물론 독일의 역사는 부끄럽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와 달리 우리 세대는 유대인 학살 문제를 직접 겪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다. 주인공 한나가 재판관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아무 대답도 못한다. 당시 나치범죄는 사실 사회 전체가 공범이었다. 그러나 결국 탈나치 재판에서는 몇몇 사람이 처벌받는 것만으로 마무리되지 않나. 순간순간 삶의 결정 앞에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류에 휩쓸려 피상적으로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한나가 강제수용소 경비원으로 취직할 땐 정말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와 노동조건만 보고 그 일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치전범 재판에 피고로 서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다. <더 리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역사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갖게 한다.

-원작을 읽었나.
=4주 전에 읽었다. 소설과 영화에 차이가 있다면 소설에는 주인공의 내면이 잘 묘사되어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마음을 주변 상황이나 배경, 음악 등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내용적으로는 원작에 충실하다. 특히 배우들의 캐스팅이 잘된 것 같다. 케이트 윈슬럿의 깐깐해 보이는 인상은 소설 속 한나와 잘 맞는다. 소년 역의 데이비드 크로스의 표정이나 내면 연기도 좋았다.

-영화 <더 리더>가 당신에게 주는 궁극적 메시지는 뭔가.
=스스로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진정한 새 출발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나도 그랬고, 마이클도 마찬가지다. 마이클도 한나에 대한 죄책감과 사랑이 뒤섞인 감정으로 20년간 자신이 낭독한 카세트테이프를 교도소로 보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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