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영남] “배우라면 언제나 기회는 온다”
2009-04-29
글 : 이영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거룩한 계보> <7급 공무원> 배우 장영남

장영남은 하루 세끼 꼬박 챙겨먹는다. 오전 7시 촬영인데도 아침은 챙겨먹고 나온다. 스스로도 ‘밥심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약속 시간도 정확하다. 매니저가 긴장할 정도라면 말 다했다. 취미는 동네 목욕탕 출입과 집 근처 대학 교정에서 배드민턴 즐기기. 인터뷰를 한 뒤 <7급 공무원>을 봤다면 밥 굶으면서 나라 지킬 순 없다는 홍 팀장의 일상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죽어도 사랑하라, 고 눈빛으로 말하던 <아는 여자>의 신비한 사고녀, 용의자의 치부를 북북 긁어대는 <박수칠 때 떠나라>의 여검사, 쌍욕으로 조폭들을 훈계하는 <거룩한 계보>의 여일, 길을 잃은 뒤 아이들에게 붙잡혀 다락에서 죽어가는 <헨젤과 그레텔>의 수정 등 그동안 그가 맡았던 인물들에 비하면 <7급 공무원>의 홍 팀장은 국정원 요원이긴 하지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이건 혹시 장진 감독의 자장 아래서 다양한 캐릭터 변주를 보여줬던 그가 충무로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의지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 <버자이너 모놀로그> <서툰 사람들> 등 대학로에서 더 빛났던 그의 끼를 스크린에서도 부족함 없이 확인할 날이 더 가까워진 것 아닐까. 이용주 감독의 <비명>, 정기훈 감독의 <애자>에 이어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에도 출연 예정인 ‘배우’ 장영남을 만났다.

-이전 인터뷰를 훑어봤는데 답변이 너무 얌전하더라.
=평소에도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다. 잘 나서지도 않고. 지금까지 맡아왔던 캐릭터 때문에 왈가닥일 거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웃음)

-<7급 공무원>의 홍 팀장은 이전 출연작보다 비중은 더 크다. 하지만 톡 쏘는 맛은 덜하다. <7급 공무원>이 장르의 도식에 충실한 영화여서 그런가.
=그동안 너무 센 역할만 한다고 했다. 내 목소리가 코맹맹이에 허스키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7급 공무원>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 힘을 좀 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국정원에서 일하지만 소박하고, 털털한, 말 그대로 아줌마니까.

-힘을 뺀다는 게 어떤 뜻인가.
=전에는 대사 하나를 하더라도 계속 치고, 치고, 치고,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7급 공무원>은 주연과 조연의 차이가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다. 내 입장에선 언제 치고 언제 빠지느냐가 중요했다. 홍 팀장은 지금껏 내가 맡은 역할 중 가장 조연다운 조연이다.

-애드리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7급 공무원>에서도 애드리브처럼 보이는 대사는 많지 않던데.
=애드리브도 잘해야지, 어설프면 다 잘린다. 텍스트 안에서 최대한 끄집어내려고 한다. 주어진 콘티와 대사 안에도 갖가지 표정과 느낌들이 있다. <거룩한 계보> 때 정준호씨한테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나도 모르게 그냥 한 거다. 캐릭터에 몰입하다가 쏟아져나오는 애드리브라면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나를 더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애드리브는 안 하는 편이다.

-<7급 공무원>은 남녀 복식 게임의 구조다. 그런데 강지환-류승룡쪽에 비해 김하늘-장영남쪽이 좀 이야기가 약한 것 같다. 시나리오에는 ‘아줌마’ 홍 팀장에 대한 에피소드가 더 많았다던데.
=아직 영화를 못 봤다. 인터뷰 끝나고 시사회 가야 한다. 다만 후시녹음 때 감독님한테 물어봤다. 제 분량 많이 편집됐다면서요, 했는데 아주 경쾌한 톤으로 ‘네∼’ 하시더라. (웃음) 어쩔 수 있나. 극중 홍 팀장은 현장을 발로 뛰는 인물이 아니라서 다 세트 촬영이었다. 하루에 10신 넘게 4일 동안 몰아서 찍었다. 거의 드라마 수준이었지. 새벽까지 찍다 보니 영화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나오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사실 감독님한테 일부 장면이 편집됐다는 말 들었을 때 ‘내 연기가 개판’이었구나 싶었다.

-류승룡과는 영화에서만 네 번째 만남이다.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등 장진 감독의 영화에서 연달아 만났는데.
=지금도 <비명>이라는 영화를 같이 찍고 있다. 오빠가 그러더라. 우리가 같은 소속사에 있다고 다들 오해한다고. (웃음) 같이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서로 연기를 주고받은 적은 거의 없다. <7급 공무원>에선 아예 한번도 부딪치지 않는다. <비명>은 그래도 좀 된다.

-연극, 영화, 드라마에서 발성이 각기 다른 것 같다. 단지 캐릭터의 차이 때문인 것 같지는 않고.
=연극은 내가 가진 에너지보다 더 발산해야 한다. 용을 쓰면 얼굴에 뾰루지가 난다. 체력도 그래서 더 비축해야 한다. 반면, 카메라 앞에 설 때는 응축해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연극 <맹진사댁 경사> 연습 중이라고 들었다.
=명동예술극장 개관 축하 작품이다. 장민호, 신구, 전무송 선생님 등과 한무대에 선다. 6월 초에 공연 시작이다.

-대선배들과의 작업은 오랜만이다.
=한동안 또래들하고 많이 했다. 어르신들하고 같이 서면 힘들어도 기본을 다잡을 수 있으니까 좋다. 리딩만 해도 내가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구 선생님은 공연으로는 처음 뵀는데 우렁찬 발성을 듣고 깜짝 놀랐다.

-중학교 때 우연히 연극 포스터를 보고 진로를 일찌감치 정했다고 들었다. 연극을 택한 못마땅한 딸의 무대를 이제는 부모님도 반기실 텐데.
=어머니는 공연 때마다 빼놓지 않고 오시는데, 아버지는 한번 오셨다. <부자유친> 공연 때였는데, 소극장의 답답함 때문인지 아니면 딸이 대사 씹고 실수할까 하는 걱정 때문인지 1시간40분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고 하시더라. 그 뒤로는 안 오신다.

-프로지만 부모 눈엔 학예회 나간 유치원생처럼 보였을 거다.
=게다가 당신 눈엔 그악스러웠을 거다. 나인 역을 맡았는데 이런 장면이 있다. 사도세자와 둘이 춤을 추다가, 사도세자가 오이를 깎은 뒤 입에 물고 돌리면 나는 풋샵을 하면서 몸을 돌린다. 성교를 암시하는 건데, 직접적인 터치는 전혀 없지만 아버지한테는 그게 좀. (웃음)

-매니저가 그러더라. 하루 세끼 꼬박 챙겨먹고, 약속 시간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학교 다닐 적에도 지각 한번 안 했다.

-지각할 바엔 아예 결석했다?
=그건 아니고. 눈 밖에 나는 걸 싫어했다. 남 앞에 서면 창피해서 몸을 배배 꼬는 아이여서 더 그랬을 거다. 숙제를 꼬박꼬박 해가는 것도 그래서였고.

-극단에서도 그랬나.
=많이 무너졌지. 연기뿐만 아니라 의상, 소품, 무대 등을 만들어야 했는데 집에 못 들어간 적도 많았다. 부모님이 ‘애가 드디어 미쳤구나’ 했으니까. 술도 극단 가서 처음 마셔봤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다녔는데, 대학 때 술을 안 마셨다니.
=술자리를 아예 안 갔다. 권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서클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나랑 같이 다니던 애들도 학교에 푹 파묻혀 있다기보다 외부로 돌던 애들이었다. 주어진 작업은 충실히 했지만.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던 학생이었다.

-극단 목화에서 술을 배우게 된 건 강요였나.
=술 안 먹으니까 따돌림을 당하더라. 술 안 마신다고 하면 선배들이 한마디씩 내뱉는데 그게 배우로서의 내 삶에 위협처럼 느껴졌다. 처음 극단에 들어갔을 때 흡사 절에라도 간 것처럼 걸을 때도 소리 안 나게 살금살금 걸을 정도였으니까.

-술 마시고 그럼 친해졌나.
=술자리에서 말 한번 시켜주는 거 보고 다 풀어졌구나 했는데 다음날 되면 다시 원점이었다. 연기를 열심히 해서 무대 위에서 선배들과 대사 한마디 더 하는 것이 섞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게 됐다.

-선배 중에 가장 심하게 괴롭혔던 이가 누구인가.
=이름은 곤란하다. (웃음) 괜히 괴롭히는 선배가 있었다. 연습 시작 3시간 전에 가서 1시간30분 동안 청소했는데도 다시 걸레질 하라고 한다거나. 신발장 정리 다 해놨는데, 신발 툭툭 던지고 들어온다거나. 대학 때 하하호호 하고 놀다가 극단에 갔는데 납득하기 힘든 규율이 있었다.

-처음부터 극단 목화였나.
=오태석 선생님의 연극이 좋았다. 토종극이라고 불러도 될 듯한데. 사투리도 많이 쓰고. 번역극보다 우리 색깔이 강한 작품들에 끌렸다.

-극단 목화의 배우들 중 누굴 가장 좋아했나. 언젠가 저 배우와 함께 무대에 서리라, 맘먹었던.
=1990년대 중반에 <백마강 달밤에>라는 연극을 목화에서 올린 적 있다. 할머니 역할을 한 배우가 너무 잘해서 극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할머니가 어딨나’, 궁금해했다. 청소하기 바쁜 때라 선배들 얼굴을 잘 알지도 못했던 때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 얼마 뒤 공연 중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무대 뒤에 가만 서 있는데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래서 처음으로 말 걸었다. ‘등장문, 제가 열어드릴까요?’(웃음) ‘응? 그래.’ 남자 목소리였다. 항상 멜빵바지 입고 다니던, 정은표 선배였다.

-혹시 신발 던진 선배가 정은표 아니었나.
=신발은 주로 여자가 던진다. (웃음) 남자 선배들은 대개 여자 후배들을 잘 챙겨주지 않나? 계원예고 다닐 적에도 구둣발로 정강이 까이고, 가슴팍 주먹으로 맞고 그런 적이 많았다. 별 이유없이 그러는 게 싫더라. 내 고집도 알게 됐다. 싫어하는 건 절대 하지 않는. 극단에서 막내 벗어난 뒤로 내 소품은 내가 챙겼다. 극단 나올 때까지 청소도 같이 했고.

-후배들에게 한없이 좋은 선배였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병신 같아 보일 수도 있었겠지. 너무 과격한 발언인가. (웃음)

-목화와 수다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겠다.
=수다는 다들 개인적이다. 선후배 개념도 약하다. 자유로운 거지. 목화는 학교다. 누군가는 군대라고 부르지만. 지금이야 많이 바뀌긴 했지만. 이를테면 오태석 선생님과 장진 오빠의 차이다. 오태석 선생님은 바라보면서 들어야 한다면, 장진 감독님은 조금 더 나눌 수 있는 동료 같다.

-장진 감독의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장진 감독의 영화들은 주·조연이 딱히 나뉘지 않는다. 배우로서는 어떤가.
=캐릭터의 비중에 상관없이 뭔가 소스를 준다. 주인공에게만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엑스트라라고 해도 그냥 쓱 지나가는 인물이 아니다. 배우 입장에선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뭔가 말할 거리가 있고, 그걸 또 배우가 찾게끔 하니까.

-임필성 감독이 그러더라. 좀더 일찍 영화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장진 감독도 그런 말 한다. 20대에 영화를 했으면 더 좋지 않았겠느냐고. 하지만 그 시간들을 소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늙어가고 있지만 배우라면 언제나 기회가 온다고 본다. 스타를 꿈꾼다면 늦었겠지만 배우를 바라본다면 아직 시간은 많다.

-컬컬한 목소리는 장영남의 트레이드 마크지만, 정작 본인에겐 콤플렉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맘에 안 든다. 고두심, 김해숙 선생님의 목소리가 딱인데.

-김해숙 선생은 젊은 시절 담배 피워서 목소리를 개조했다고 했다.
=담배가 몸에 맞으셨나 보다. (웃음)

-꼭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 한명만 꼽는다면.
=봉준호, 나홍진, 양익준 다 좋긴 한데.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분은 이창동 감독님. 인간이 느껴진다. 잔잔한 영화 안에 징글징글한 게 있다.

-신작 준비 중인데 오디션을 볼 생각도 있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해야지. 근데 내가 오디션을 잘 못 본다. 리딩해보라고 하면 대사가 눈앞으로 튀어오른다. 그래서 다들 전작 보고 만났는데 첫 리딩 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 분들도 있다.

-앞으로 절대 못할 것 같은 역할은 뭔가.
=지금까지 나한테 들어오지 않은 역할은 못하는 거 아닌가. 배우들이야 이거 하고 싶고, 저거 하고 싶지만, 배우 아닌 사람들 마음속은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돌이켜보면 먼저 앞질러서 갔다면 지금까지 못 견뎠을지도 모르겠다. 차근차근 평생 배우의 길을 걸으며 할 수 있는 걸 찾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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