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완벽을 향한 위대한 도전
2009-04-28
글 : 홍성남 (평론가)
<콰이강의 다리> <밀회> 데이비드 린 회고전
<밀회>

데이비드 린(1908~91)은 세계적인 대성공작인 <콰이강의 다리>(1957)를 만들고 난 이후 30여년 동안 단 네편의 영화만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올려놓았다(1942년부터 시작된 영화감독 경력에서 16편이 나왔다는 사실부터가 린이 다작의 영화감독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긴 하지만). 이같은 과작(寡作)의 이유로는 우선 린이 보여주었던 지독한 완벽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린의 영화에 참여했던 시나리오작가들은 대사 한줄, 묘사 한줄이 실제로 종이 위에 옮겨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검토가 이뤄졌는지 회고했다. 800여명에 이르는 인원을 동원한 뒤 마드리드의 외곽에서 2년 동안 작업하게 해 <닥터 지바고>(1965)의 모스크바 거리를 재현해냈다는 것은 공간 연출에 린이 얼마만한 노력을 쏟았는지 보여주는 일례다. 한편으로 린은 영화를 위해서라면 촬영할 곳의 자연과 기후도 기꺼이 감내해낼 줄 아는 감독이었다. 린의 이런 면모를 클로드 샤브롤은 재치있게 요약한 적이 있다. 자기나 린이나 완벽한 일몰을 ‘영원히’ 기다리며 작업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 ‘영원히’란 말이 자기에게는 몇날을 의미할 뿐이겠지만 린에게는 몇달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대영국의 위대한 예술가’

완벽주의를 향한, 어떤 경우에는 거의 광기에까지 이르는 듯 보이는, 린의 이같은 지향은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의 ‘비전’을 영화로 실현해내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을 것이다. 후기의 그는 자신 앞에 광활한 캔버스를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영화란 극화된 리얼리티’라는 자신의 신념대로 스크린을 실감나고 매혹적인 하나의 ‘소우주’로 바꿔놓고 싶어 했다. 이걸 성취하기 위해 린은 자신의 작품에 시간을, 돈을, 그리고 노고를 들이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어떤 개념에 유혹되지 않았나 한다. 일부에서도 동의하는 그것은 바로 ‘대영국의 위대한 예술가’라는 정의일 것이다.

굳이 이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그 장대한 광경만큼이나 원대한 창작자의 야심을 보여주는 린의 후기 영화들이 많은 영화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따라서 사람들은 린이라고 하면 <콰이강의 다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혹은 <닥터 지바고>를 만든 영화감독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물론 이 영화들만으로 린의 세계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평자들이 봤을 때는 그것들이 린의 세계의 정수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의 ‘교정’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콰이강의 다리>

1942년 노엘 카워드와 공동연출한 <토린호의 운명>(In Which We Serve)으로 시작된 린의 영화세계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된 것은 <콰이강의 다리>다. 다시 말해 린의 세계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이전과는 다른 식의 발길을 내디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콰이강의 다리> 이후 린의 영화들에 대해 많은 비평가들은 (물론 각자의 취향과 평가 기준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아쉬움이나 공허감을 표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뉴욕타임스>의 빈센트 캔비 같은 영화평론가는 아주 노골적으로 린의 후기 영화들을 공격했다. 그에 따르면 이 영화들은 상영시간이 길어졌고 돈이 많이 투입되었으며 이런저런 종류의 상들을 쓸어모으고 있으니(<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세편의 영화가 가져간 오스카 트로피만도 무려 19개가 된다!), 단지 ‘통계학’적으로만 깊은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견해가 린의 세계 전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 그럴 경우 대부분 린의 전반기 영화들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도 함께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의 최고작은 <밀회>

그렇다면 그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평자들에게 린의 최고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는 <위대한 유산>(1946)을, 또 누군가는 <정열적인 친구들>(1949)을 언급하겠지만, 대략 <밀회>(1945)쪽으로 모아질 것이다. 영화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매주 목요일 이웃마을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결국에는 헤어지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단순하기도 하고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는 린의 후기 영화들이 과시하는 것과는 다른 덕목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마도 자제의 미덕 정도로 불릴 것이다. 스토리나 연기 혹은 스타일에서 영화는 과도하게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녀주인공의 시선과 작은 행동, 그들 위로 흘러가는 빛의 미묘한 변화, 그때그때 다른 의미가 들리는 듯한 열차음 등을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느끼는 규칙과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체계 안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없는 주인공들의 심정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톰슨은 린의 초기 영화들은 크기에 집착하는 후기 영화들과 달리 적절한 페이스와 미려함과 규모를 가졌다고 했는데, <밀회>는 그 훌륭한 실례가 되는 영화다.

<밀회>의 제작에 들어가기 전 린이 만들려 했던 것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다룬 코스튬 드라마였다거나 <소리의 장벽>(1952)에서 비행 시퀀스를 보여준 것 등을 미뤄볼 때, 스크린에 무언가 스펙터클한 것을 구현하려 했던 린의 소망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비평가들은 다소는 편의상 린의 영화세계를 <밀회>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세밀한 시선으로 다룬 초기의 수수한 멜로드라마와 광대한 풍경 속에 예외적인 영웅을 던져놓은 대규모의 에픽으로 양분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완전히 배타적이지만은 않은 것은 <밀회>에서 본 열정의 억압과 사랑의 상실이라고 하는 린의 중심 주제가 <라이언의 딸>(1970)이나 <인도로 가는 길>(1984) 같은 후기 영화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문제와 전혀 상관없을 듯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의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욕망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풍광 속으로 사라져버렸는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을 것이다.

다시 린의 서로 ‘대립적인’ 듯한 두 세계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보면 평자들은 흔히 후기의 영화들에서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곤 했는데, 많은 경우 이건 린이 광활한 풍경 속에서 인간의 드라마를 놓아버렸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식으로든 린이 인간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예컨대 <콰이강의 다리>에서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싸움이 임무인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태도와 가치관이 상이한 주요 인물들이다. 그중 특히 영국군 장교인 니콜슨의 존재는 우리에게 매혹적인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영국인의 정신력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군에게 훌륭한 다리를 지어주려는 그의 생각은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에게서 명예율과 원칙에 집착한 사람만이 거둘 수 있는 ‘의지의 승리’를 보고 있다. 사실 이런 부류의 인물들, 즉 낭만적인 공상에 빠져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간과하기까지 하는 몽상가들은 린의 영화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탐구되는 이들이다. <밀회>의 로라도, <라이언의 딸>의 로지도 다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리고 여기에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로렌스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초반에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이자 학자이고 대단한 전술가이며 못 말리는 자아도취증 환자인 이 인물은 어떤 명확한 지위나 보답을 찾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혹은 ‘깨끗한’ 사막에 매혹되었기에 과감히 위험한 싸움에 몸을 던진다. 그야말로 나르시시즘에 빠진 몽상가인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가해진 비판 가운데 하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동기나 욕망 면에서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로렌스라는 인물을 주요한 ‘미스터리’로 상정하고서 영화를 끌고 나갔다고 보는 게 옳다. 요컨대 그는 무턱대고 매혹적인 인물로도, 무조건적으로 찬사가 주어질 인물로도 간주되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린은 다른 거대한 ‘미스터리’를 포착해내는 데 바로 사막이라고 하는 공간이다. 자주 이야기되듯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사막에 매료된 로렌스에 대한 영화인 것만큼이나 사막에 빠져버린 린이 만들어낸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말하기를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대사가 아니라 그림을 기억한다고 했다. 영화평론가 로이 암스가 린에 대해 논의하면서 한 말은 “영화감독은 죽고 나면 촬영자(photographer)가 된다”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자신을 매혹시킨 공간을 마주하며 린은 앞의 이야기들을 증명해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사막이 만들어낼 수 있는 풍경과 시각적 가능성에 대한 관능주의적인 전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라이언의 딸>이나 <인도로 가는 길> 같은 다른 에픽들이 왜 삐걱대는지를 알려주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아이디어와 스펙터클이 원활하게 연동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영화들은 마치 아이디어의 영화인 척하다가 굳이 그 정도의 규모가 필요했을까 의심스러운 스펙터클에 무너지는 형국을 보여주고 만다.

생전에 <노스트로모>를 완성했다면…

사람들은 종종 로렌스에게서 린은 자신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실제로 광활한 촬영현장에서 팔을 벌리고 자신있게 서 있는 사진 속의 린은 영화에서 나르시시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던 로렌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때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영화의 모험가가 꽤 연약한 데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특히 영화평론가들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한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1950년대에 그는 어떤 평론가가 자신의 영화를 두고 사소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다며 자기는 중류급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라이언의 딸>에 대해 폴린 케일이 그를 만나 맹공을 퍼부은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때 그는 ‘내 작품이 이처럼 형편없다면 도대체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14년이 지난 뒤에야 다음 작품을 만들 정도로 깊은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이 얘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가 영화의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운티호 반란 사건을 영화로 만들 생각도 있었고 죽기 직전에는 조셉 콘래드 원작의 <노스트로모>를 영화화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들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성공작이 됐을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후반기에 그가 만든 영화들을 토대로 이렇게 상상할 수는 있다. 수공업적 거대함을 스크린 위에 뽐내려 한, 이미 지나간 시대에나 속했을 법한 시대착오적 영화를 하나 가졌으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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