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로 시작해서 “다녀왔습니다!”로 끝난 안타까운 인사. 아내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병희(박희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살을 기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각고의 노력으로 집에서 목을 매 자살에 ‘성공’하려는 순간, 들려오는 한마디. “다녀왔습니다!” 난데없이 남의 집에 침입한 한 여자의 목소리다. 이 한마디로 영화 <우리집에 왜왔니> 속 요상한 여자 수강(강혜정)과 병희의 동거가 시작된다.
이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 이유, 그리고 죽지 못해 다시 살게 된 병희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이유는 병희의 집이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주식과 부동산이 상승세를 타면서 그의 인생은 대박인생을 살고 있었다. 잘나가던 30대 중반의 직장인이었던 병희는 이미 대지 80평에 건평 60평의 단층짜리 단독주택을 보유했던 것이다. 집의 형태로 보아서는 서울 양재에서 성남으로 가는 방향에 위치한 ‘홍씨마을, 은곡마을, 내곡마을’들의 마을 분위기를 갖췄고, 서초구 우면동의 주택가를 닮기도 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한 천호동의 80년대 주택가를 닮은 것도 같다.
옥탑방 찍을 때마다 스탭들 죽어나네
영화에 등장하는 집의 내부는 물론 세트다. 60평짜리 주택이라고 해도 거실이 넓어봐야 얼마나 넓겠는가? 하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병희의 집 거실은 ‘리뉴얼형 거실’이다. 새마을운동 당시 지은 이런 형태의 주택은 거실을 넓지 않게 설계했다. 영화에서 인물들의 동선은 거실로 거의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거실에서 바로 볼 수 있는 주방과 방, 욕실들은 카메라의 동선상 평면에 위치하게 된다. 모든 게 병희와 수강의 동거를 지켜보자는 의도에서 리뉴얼된 것이다.
거실에서 벌어지는 인질극이니 카메라에 주로 잡히는 건 거실이다. 거실장면마다 아침에나 볼 수 있는 강한 햇살이 영화 내내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다. 이걸 보면 병희의 집은 남향이 아니라 동향인 듯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여름에는 오전 7시10분~7시35분, 겨울에는 오전 8시20분~8시35분에만 아파트 숲 사이로 들어온 강한 햇살이 거실에 닿는다. 제한적인 아침 햇살의 덕을 보는 나에겐 <우리집에 왜왔니>에 나오는 거실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병희의 집 앞엔 수강을 ‘스토커’에 ‘전과 3범’으로 만들게 했던 지민(승리)의 아파트가 있다. 수강이 오페라글라스를 이용해 아파트를 지켜보는 것을 보면 집과 아파트의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 보인다.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이런 장면을 찍을 때는 옥탑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단 주변에서의 관찰이 용이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주변 주택의 옥상이나 또 다른 옥탑방에서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촬영 때마다 스탭들은 말 그대로 ‘죽어난다’. 옥탑방은 높은 동네에 있어 장비 차량이 접근하기도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적어도 3~4층 높이의 옥상으로 장비를 날라야 하니 옥탑방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민의 집은 전형적인 주공아파트 형태를 지닌 복도형 아파트다. 이런 형태의 아파트는 중소형 평수(15~25평)가 주를 이루는데, 혼자 사는 남자인 지민의 전세형 주택으로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단독주택에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잘 보이는 위치이니 대략 3층쯤 되는 곳일 것이다.
섹시하면서도 슬픈 욕실신
포박과 구타에 몸서리를 치던 병희는 어느새 자신의 ‘수발’을 드는 수강에게 몸을 적응해가고 있었다. 다카르랠리와도 같았던 그녀의 삶에 병희가 마음을 살짝 열 때쯤 영화에서 가장 ‘섹시한 장면’이 등장한다. 카멜레온 같은 배우 강혜정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답게 잡은 카메라 앵글일 것이다.
무척 위험해 보일 수도 있었던 시도지만 수강의 ‘정수리 숏’을 배우 강혜정은 너무도 잘 소화하고 있다. 아니 흡수했다고 해야 좀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이런 묘한 분위기에서 여성의 정수리를 내려다본다는 것만 생각해도 아찔하다. 자신은 어떠냐고 물어보는 수강을 향해 병희 특유의 저음으로 “너 별로야”라고 말하며 위기를 넘긴다. 수강 본인이 직접 언급하는 것처럼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힌트를 얻어온 이 장면은 섹시하면서도 슬프다. 지민을 병희의 집으로 데려온 수강은 회한에 젖는다. 지금까지 자신을 부숴가며 돌진했던 유일한 이유에 대한 허무감일 것이다. 욕실에 들어온 수강은 때와 핏물로 얼룩진 옷을 하나씩 벗는다. 그러면서 운다. 카메라는 오랫동안 수강의 행동을 응시하는 데, 이 때문에 욕실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수강의 머리를 감겨주는 병희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 좁은 욕실에서 한 여자의 인생이 회고되고, 남자와 여자의 공감대가 이뤄지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감정과 연기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욕실의 분위기였다. 남들이 미친년이라 부르는 여자와 죽지 못해서 사는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마음에 와닿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