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 Umbracle 감독 페레 포르타베야
스페인|1972년|85분|35mm|흑백
박제된 동물들이 진열된 공간. 배경음이라곤 무슨 음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여성들의 목소리가 전부다. 높아졌다 낮아지는 그 소리는 완고하리만큼 메마른 스크린에 공포감을 더한다. 박물관 혹은 실험실처럼 보이는 이 미니멀한 공간에서 두 남자가 서성이고, 카메라는 이를 감시하듯 인물들의 자취를 쫓는다.
분절된 에피소드들로 이뤄진 <음지>는 간혹 접점을 찾기 힘든 영상과 사운드를 연결하는데,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건 기묘한 긴장감이다. 전화벨 소리와 같은 의미불명의 사운드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남자가 난데없이 일군의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모습 등이 펼쳐지고, 곧 영상과 사운드가 일치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 1970년대 스페인영화계를 지배한 검열 코드를 설명하는 장면이 뒤따른다. 파시스트들이 득세하는가 하면, 오푸스데이를 비롯한 보수종교가 정치권과 결탁한 암흑기, 예술의 자유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우습거나 잔인하거나 저속한 영화를 금한다. 복수와 자살을 정당화하는 영화를 금한다. 이혼, 간음, 매춘, 낙태를 다루는 영화를 금한다. 일반 상식에 반하는 모든 영화를 금한다. 숨 막히는 금지 조항 아래 예술작품들은 치밀하게 검열됐고, 전국가적인 검열 행위는 자기검열이라는 또 하나의 족쇄를 낳았다.
지극히 연극적인 제스처로 검열 코드를 비판하는 인물들이 사라지면, 전쟁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화면을 채운다. 애국심과 신앙심을 고취시키려는 이 유치하고 조잡한 영상은, 이전 에피소드와 연결돼 헛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까마귀>에 대한 감상을 열변하는 인물을 지나 박물관의 내부가 다시 카메라에 잡힐 때쯤 이 영화가 실은 세심하게 의도된 정치영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친다. 프랑코 정권의 독재에 시적이고 실험적인 화법으로 맞선 스페인 아방가르드 영화의 거장 페레 포르타베야의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