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안나와의 나흘 밤>(2008)은 평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다름 아니라 그 영화의 크레딧에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라는 이름이 감독으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디두르케>(1991) 이후 17년이란 긴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대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고 했다.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비포 나잇 폴스>(줄리앙 슈나벨, 2000)나 <이스턴 프라미스>(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07) 같은 영화들에 그가 출연했었던 것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들이 남긴 짙은 잔상을 아직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부재’했고 그래서 그 존재가 궁금했던 감독이었다. 이번 전주영화제의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회고전은 그간에 그가 남긴 독특한 영화적 자취를 돌아보면서 영화로의 그의 ‘귀환’을 반갑게 맞이하는 자리이다.
성난 젊은 세대의 대변인으로 시작
스콜리모프스키(1938년생)가 영화와의 인연을 본격적으로 맺기 시작한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대 초반에 이미 시, 단편 소설, 희곡 등을 발표해 명망 높은 작가로 인정받던 그는 안제이 바이다가 만들 영화 <순결한 마법사>(1960)의 각본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영화는 당대 청춘의 환멸을 다룰 것이었고 그런 영화에다가 스콜리모프스키는 젊은 세대가 지닌 삶의 방식과 태도와 관련해 진실함의 기운을 불어넣어줬다. 그러니까 그는 영화 경력을 시작할 때부터 당대 성난 젊은 세대의 대변인이었던 것이다.
스콜리모프스키의 또 다른 중요한 초기 경력으로는 로만 폴란스키의 <물 속의 칼>(1962)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한 것도 빠뜨릴 수 없다. 비록 직접 연출을 맡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두 영화들은 이를테면 젊은 세대의 소외감과 세대 간의 장벽을 특유의 불안의 감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후 그는 영화학교 졸업작품인 <신원미상>(1964)을 필두로 <부전승>(1965), <장벽>(1966) 같은 당대 폴란드의 중요한 영화들을 직접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스콜리모프스키는 크쥐쉬토프 자누시와 함께, 폴란드 유파(Polish School; 1953년에서 1963년 사이 안제이 바이다, 안제이 뭉크, 보이치에크 하스 등이 만들며 전후 폴란드 영화의 부흥을 이끌어낸 일군의 영화들) 이후의 세대, 혹은 두 번째 세대(second wave)로서 폴란드 영화의 새로운 재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우선 이야기하는 바에 대해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스콜리모프스키의 초기작들은 의미들이 여러 겹의 층을 이뤄내는 두터운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에서도 어떤 근원적인 정서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장벽>의 한 장면에서 대단히 흥미롭게 드러난다. 여주인공에게 맹인이 나타나 시간이 좀 있으면 자기를 근처의 벽까지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어지는 상황을 묘하게 시각화한다. 맹인의 뒤에서 그를 인도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꼼짝 못하고 손을 든 포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를 위협하듯 길을 찾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여주인공은 자기가 도움을 주려고 했던 맹인이 실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쟁을 겪었고 그 상처를 현재에도 지니고 있는 앞선 세대의 경험은 실제로는 이처럼 가장이거나 허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여주인공은 남자를 걷어찬다. 영화는 이어 폭발을 담은 숏을 보여준다.
이 시퀀스가 보여주듯, 스콜리모프스키는 자기가 속한 젊은 세대와 앞선 세대 사이에는 폭력적인 방법을 행사해야만 무언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듯한 견고한 ‘장벽’이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부전승>의 주위 풍경이 암시하는 것처럼 세상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지만 이전 세대는 그런 사정을 보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만 은신처를 찾으려고 한다. 그에 반해 초기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의 주인공들은 윗세대의 맹목적 순응주의와 가식적 이상주의를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낭만적 충동에 몸을 맡기며 자신을, ‘의미’를 찾으려 한다. 영화는 자연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여하한 여정의 형태를 띠게 된다.
<손들어!>, 자신이 꼽은 최고작이자 분기점
스콜리모프스키의 초기 영화들이 당대의 시각에서 ‘젊은 영화’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혼란과 고투를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형식의 측면에서도 시대를 앞서가려는 감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부전승>은 무엇보다도 복잡하면서 활기찬 롱테이크가 돋보이는 영화다. 여기서 스콜리모프스키가 구사한 롱테이크는 기본적으로는 어떤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성과 상징성, 그리고 시정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그것들을 한데 껴안을 줄 안다. 그 다음 작품인 <장벽>에서 아무래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특유의 몽환적인 기운일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구도의 변형을 통해, 때로는 판타지적 요소를 도입해, 스콜리모프스키 자신이 평가하기를 그의 영화 가운데 가장 시적인 것에 다가간 영화가 되었다. 사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로 은근히 파고들어오는 초현실주의적인 무드는 스콜리모프스키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되었다. 광적인 ‘해프닝’의 무대가 되어버리는 <손들어!>(1967)의 열차 화물칸이나 문득문득 무언가 이물감을 느끼게 해주는 <딥 엔드>(1970)와 <문라이팅>(1982)의 런던은 그 실례가 된다.
<손들어!>는 스콜리모프스키 자신이 예전부터 이야기하길 자신의 최고작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일종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학생 때 가진 이상을 모두 잃어버리고 순응주의자가 되어버린 인물들을 다룬 이 영화는 특히 네 개의 눈을 가진 스탈린의 기이한 대형 사진으로 유명하다. 이것만으로도 확연히 드러나는 반스탈린주의적 태도는 영화 속 인물들을 한 때 어려움에 빠뜨린 것처럼 영화의 감독인 스콜리모프스키도 곤란에 처하게 했다. 영화는 개봉이 금지되었고 80년대에 가서야 다시 공개될 수 있었다. 이후로 영화감독 스콜리모프스키의 활동 무대는 서구 세계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의 영화들은 전반적으로는 폴란드에서 만든 초기작들에 비해 창의적 강렬함은 옅어졌으나 나름의 원숙한 매력을 과시하는 시기로 이월한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는 성적 깨어남을 그린 블랙 코미디인 <딥 엔드>와 ‘마음의 스릴러’라고 부를만한 <외침>(1978)이 있다.
그러나 흥행의 측면에서나 비평적 평가의 측면에서나 가장 성공적인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은 <문라이팅>일 것이다. 영화는 폴란드인 사장이 런던에 소유하고 있는 집을 수리하기 위해 영국이란 낯선 땅에 온 네 명의 폴란드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들이 타국 땅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도중 폴란드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이제 이들은 고국과 연락마저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리더인 노박은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작업을 진행해간다. 확실히 <문라이팅>은 외국의 폴란드인 감독이 조국의 당대 정치 상황에 반응해 만들어낸 영화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더해 불안과 부조리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감각, 현실을 채색하는 묘한 시적인 기운, 기이한 유머감각 같은 스콜리모프스키적인 특성들이 어울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매력을 발산한다.
외국에서 조국의 상황에 반응해 만든 <문라이팅>
이런 면모들을 보건대, 그리고 최근작인 <안나와의 나흘 밤>을 고려하면, 자신을 무엇보다 영화의 시인으로 간주한다는 스콜리모프스키의 이야기는 수긍이 간다. 한편 다른 이들은 상이하게 그의 영화를 개념화했는데, 예컨대 미셸 시망은 리듬과 즉흥성을 중시하는 재즈에, 데이비드 톰슨은 우리에게 강타를 날리는 파이터에 비유했다(재즈와 복싱은 실제로 스콜리모프스키가 대단한 애정을 가진 것들이다). 이 모두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며 재즈 연주자이며 복서로서 우리에게 인상적인 영화를 선사한 이가 바로 스콜리모프스키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