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로테 라이니거의 실루엣 필름 상영회
2001-11-28

11월30일부터 12월2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장.단편 애니와 다큐멘터리 상영

빛과 그림자의 마술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 로테 라이니거의 실루엣 필름 상영회가 열린다. 오는 11월30일부터 12월2일까지 아트선재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로테 라이니거, 실루엣 필름’은, 실루엣 애니메이션 기법의 창시자로 알려진 독일의 여성 애니메이션 작가 로테 라이니거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행사. 유럽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으로 알려진 장편 <아크메드 왕자의 모험>과 단편 6편, 로테 라이니거의 작업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은 인물과 배경을 종이로 오려서 만들고, 뒤에서 조명을 비추어 그 그림자와 흑백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기법이다. 국내에서는 올해 개봉했던 미셸 오슬로의 <프린스 앤 프린세스>로 소개된 바 있다. 종이로 오려낸 공주 의상의 레이스 무늬나 발명가 마녀의 요새 같은 성에 빛을 비추어 실루엣의 장관을 보여준 오슬로도, 로테 라이니거의 후예인 셈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대가 로테 라이니거는 오스카 피싱어, 발터 루트만 등 실험적인 작가들과 함께 독일 예술 애니메이션 시대를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1899년 베를린 태생인 라이니거는,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추였던 그곳에서 일찍부터 판타지영화에 빠져들었다. 15살 때 독일 판타스틱영화의 명사이자 라인하르트극장의 주연배우인 폴 베게너의 강의를 들은 것이 라이니거에게 하나의 계기가 됐다. 영화적 판타지의 세계를 들려주는 그에게 매료된 나머지, 라인하르트극장 부설 연기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연기보다는 실루엣을 오려서 필름에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던 소녀는, 극장 배우들의 배역의 실루엣을 오려내기 시작했다. 예술적인 실험에 관심이 많았던 베게너는 라이니거에게 자신의 영화의 자막을 실루엣 기법으로 만들도록 맡겼다. 1919년 베게너의 소개로 빈에서 온 애니메이터 베를톨트 바르토슈, 예술사가 칼 코흐 등 실험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열고자 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만나고, 자신의 첫 실루엣 영화 <사랑에 빠진 마음의 장식>을 제작한다. 두명의 인물과 춤추는 장신구를 통해 사랑을 표현한 이 작품은, 60여년간 이어지는 라이니거의 실루엣 영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신데렐라> 등 일련의 단편을 제작하다가, 1923년 베를린의 한 젊은 은행가의 제의로 만든 장편이 바로 이번 상영작 중 하나인 <아크메드 왕자의 모험>이다. 하늘을 나는 목마를 왕에게 바치고 공주를 얻으려던 마법사를 막아서면서 시작되는 왕자의 모험은 <아라비안 나이트>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국적인 여인의 옷자락과 아랍풍 궁전, 술잔 하나하나까지 섬세한 실루엣과 판타지는 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루트만의 추상화 같은 배경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볼프강 젤러의 교향곡과 어우러져 천일야화의 마술 같은 세계를 살려내고 있다. 5명이 3년 넘게 매달려 만든 이 작품은 1926년 프랑스와 베를린 등에서 극장 개봉했으며, 라이니거의 대표작이자 장 르누아르가 극찬한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아크메드 왕자의 모험>과 더불어 초기작으로는 1928년작 <닥터 두리틀과 동물 친구들>이 상영된다. 휴 로프팅 원작소설에 바탕한 이 작품은 원숭이, 개, 돼지 등 동물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 닥터 두리틀의 모험담. 각각 1933년, 1935년에 만들어진 <카르멘>과 <파파게노>는,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음악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었던 라이니거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비제의 동명오페라를 비튼 <카르멘>은, 호세의 사랑을 뿌리치고 투우사를 쫓아간 카르멘이 죽임을 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투우장에서 당당하게 쇼를 벌이고 갈채를 받는 능동적인 캐릭터 해석이 매력적인 작품.

표정도 거의 없고, 동작도 제한적이지만, <사랑은 자유로운 새>에 맞춰 춤추는 카르멘의 춤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그림자 이미지에 고혹적인 생기가 피어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에서 유쾌한 새잡이 에피소드를 고른 <파파게노>는 파파게노의 깃털 장식과 새들, 풀잎과 나무가 살아 있는 숲의 표정이 모차르트의 음표만큼이나 다채롭다. 날개의 무늬가 꼼꼼하게 표현된 베짱이와 나비, 도토리를 가지고 노는 다람쥐 등 <베짱이와 개미>(1954)의 숲 속 생물 묘사도 놀랍다. 또한 게으른 베짱이와 부지런한 개미를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묘사한 재치나, 얼어죽을 뻔한 베짱이를 구해 다같이 춤추는 엔딩이 색다른 재미를 준다. 마법의 가루를 들이마시고 황새가 된 슐탄의 우화 <슐탄 황새>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도, 정교하고 환상적인 이미지 만큼이나 동화를 자신의 시선으로 비튼 라이니거의 세계가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리고 짧은 다큐멘터리 <로테 라이니거의 예술세계>에서는 팔, 다리, 허리, 목 등 원하는 움직임에 필요한 만큼 캐릭터를 조각으로 나누어 철사 등으로 잇고, 반투명 유리판에 올려놓은 채 뒤에서 빛을 비춰가며 이음새를 하나하나 움직이는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지극한 손맛을 엿볼 수 있을 듯. 2차대전을 거치며 원본 네거티브 필름이 대거 소실되고, 현재 보존중인 대부분의 프린트는 여러 번 복사한 것인데다 상당수는 베타 테이프 상영이라 최상의 감상 조건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시간을 돌릴 수 없는 바에야 국내에서 만나기 힘든 작품들을 놓치기는 아깝다(문의: 아트선재센터, 02-733-8945). 황혜림 blauex@hani.co.kr

시간표

11월30일 2시: */ 4시:섹션1/ 6시:강의/ 8시:섹션2

12월1일 2시:특별상영-섹션2/ 4시:섹션1/ 6시:섹션2/ 8시:섹션1

12월2일 2시:특별상영-섹션1/ 4시:섹션2/ 6시:섹션1/ 8시:섹션2

섹션1: 로테 라이니거의 실루엣 단편 모음

<닥터 두리틀과 동물 친구들> <배짱이와 개미> <슐탄 황새> <잠자는 숲속의 공주> <파파게노> <카르멘>

섹션2: 다큐멘터리 <로테 라이니거의 예술세계>, 장편 <아크메드 왕자의 모험>

특별상영은 부모와 동반한 미취학아동만을 위한 상영회. 미취학 아동의 입장료는 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