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는 시나리오]
[뒤집는 시나리오] <더 레슬러>
2009-05-06
글 : 길윤형 (한겨레 기자)
램잼, 그 후

링의 최정점.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객의 함성에 화답하는 그 남자의 눈빛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 모든 수컷들이 꿈꿔온 바로 그 3단 로프 꼭대기에서 필살기 ‘램잼’을 준비하는 ‘랜디 더 램 로빈슨’(미키 루크)의 눈앞에 그와 찬란한 젊음을 겨뤘던 중년의 레슬러 ‘더 아야톨라’가 누워 있다.

가슴을 날카로운 것으로 콱 찔러대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며 랜디가 몸을 날리고, 그 모습을 놓칠세라 수많은 카메라들이 화려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고통과 번뇌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80년대 최고의 레슬러였던 랜디는 서글픈 말년을 보내는 중이다. 랜디는 엄청난 진통제에 의지해 젊은 레슬러들과 힘을 겨루고, 빈 시간을 쪼개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쥐꼬리만한 수입뿐이다. 랜디는 허름한 컨테이너 집세를 자주 밀리고, 유일한 혈육인 딸 스테파니는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그렇지만 랜디는 링 안에서만은 언제나 챔피언이었다. 레슬러들은 축 처진 그의 배를 걷어차고, 근육이 풀린 가슴에 촙 공격을 퍼부어대지만, 경기가 끝나면 한때 그들의 우상이었던 베테랑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안경과 보청기에 의지해야 하는 랜디의 늙은 육신은 험한 레슬러의 생활을 받아내지 못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더이상 레슬러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랜디는 유일한 도피처로 여겼던 스트립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찾는다.

“우린 서로에게 끌리고 있잖아.”
“당신의 착각이에요. 손님과는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아요.”

상처받은 랜디는 숙적 ‘더 아야톨라’와 최후의 승부를 위해 다시 링에 오른다. 랜디는 걸프전쟁이 한창이던 90년대 초 잔혹한 이라크 군인 ‘서전 슬로터’와 겨뤘다는 점에서 전 WWF(현재의 WWE의 전신) 챔피언 ‘울티메이트 워리어’와 닮았고, 삼단 로프 위에 올라 상대를 찍는 필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마초맨 랜디 세비지’와 흡사하며,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찡그린 표정을 짓는다는 점에서 몇해 전 약물중독으로 숨진 ‘미스터 퍼펙트’를 빼닮았다. 그들의 모두 링 안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본 뒤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져갔다.

최후의 순간, 랜디가 몸을 날리고, 동시에 더 아야톨라는 랜디의 램잼을 가까스로 피해낸다. 정신을 잃어 미동조차 없는 랜디의 육신을 향해 더 아야톨라의 처참한 공격이 이어진다. 그리고 폴.

“원, 투, 스리!”
“오늘의 승자는 더 아야톨라!”

흥분한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랜디의 시대는 공식적으로 종언을 구한다. “내일은 다시 스테파니와 캐시디를 찾아가봐야겠어.” 램잼이 실패한 링 위에서 랜디는 가물가물해져가는 의식의 끝을 붙잡고, 가만히 결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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