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의 나흘 밤> Four Nights with Anna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폴란드, 프랑스/2008년/87분/메가박스6/오후 8시30분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딥 엔드>(1970)에서 우리는 동료인 젊은 여인에 대한 집착을 키워가는 열다섯 살 소년 마이크가 걷던 길을 따라갔다. 스콜리모프스키의 17년만의 신작인 <안나와의 나흘 밤>에서 우리는 한 여인과의 결합을 간절히 희구하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난다. 레온이란 이름의 이 중년 남자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여인 안나를 훔쳐보고 몰래 그녀의 방 안으로 ‘침입’하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는 마이크의 다른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안나와의 나흘 밤>의 상황은 이전작보다 훨씬 짙은 어둠 속에 뒤덮여 있다.
<안나와의 나흘 밤>은 이야기로만 따지자면 극소화한 것만을 우리에게 들려주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 단순화한 상황으로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 영화이다. 영화는 우선 선형적인 전개로를 벗어나면서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간대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안나에게 집착하는 레온의 동기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밝혀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 아래에서 우리는 애초에 레온이란 존재를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처음 본 그는 무언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를 것만 같은 남자였다. <안나와의 나흘 밤>이 어떤 ‘마술’을 발휘하는 영화인 것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아무런 설명도 제공받지 못하면서도 어느 샌가 레온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잠든 안나의 발톱을 칠해주는- 동료들로부터는 비웃음을 산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장면에 이르면 욕망의 어떤 숭고함마저 느끼게 된다.
<안나와의 나흘 밤>에서 아무래도 우리는 또 다시 스콜리모프스키가 만들어낸, 이 세상 바깥의 공기를 끌어들인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보다. 그것은 미스터리와 멜랑콜리가 묘하게 섞이며 유혹의 바람을 일으키는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