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믿으라, 그리하면 보일 것이요”
2009-05-07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과학적 앎과 종교적 믿음 사이에서 후자의 손을 든 <노잉>

<노잉>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아마도 올리버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2006)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노잉>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재난영화 버전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실제로 지하철 전복 사고 이후 유령처럼 걸어나오는 생존자들의 모습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재현된 9·11 직후의 지옥도와 너무도 유사하다. <노잉>은 여러 평론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는 9·11 이후 할리우드영화의 변화와 관련해 파악할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공교롭게도 이미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왓치맨>을 통해 이와 유사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나는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노잉>이 포스트 9·11의 징후를 담고 있다는 전제 아래 어떻게 이 작품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종교적으로 치유하려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파스칼의 ‘신에 대한 내기’와 닮아

<노잉>이 기독교적 교리에 충실한가 여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기존의 SF영화나 재난영화의 공식에 종교적 메타포를 가미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노잉>이 일반적인 재난영화와 구분되는 이유는 재난의 성격에 있다. <노잉>에서 묘사하는 재난은 어떤 사고나 누군가의 실수, 또는 악의에 찬 계획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파괴된 자연의 복수도 아니다. 비행기가 폭발하고 지하철이 전복되는 등의 (재난영화에서 익숙한) 사고가 연거푸 발생하지만, 이들 모두는 이미 예고된 거대한 운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이러한 운명의 힘을 깨달은 이는 MIT에서 천체물리학을 가르치는 코슬러(니콜라스 케이지)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연의 산물이며 어떤 의미나 목적도 없이 진행된다는 비결정론에 빠져 있던 과학자다. 그런 그가 50년 전 봉인한 타임캡슐에 들어 있던 메모를 발견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메모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쓰인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이는 비결정론의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숫자들의 나열이 어떤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경고할 목적으로 쓰여진 ‘예언의 서’라는 것을 ‘믿는’ 순간 코슬러는 비결정론을 버린다.

<노잉>은 코슬러가 자신의 삶을 결정론적인 운명의 일부로 인정함으로써 비결정론의 무의미함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러한 결정론에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적인 메타포를 결합시킨다. 이상한 것은 <노잉>이 종교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떠들지 않음에도 짙은 종교적 색채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노잉>이 종교적 믿음을 설파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잉>의 종교적 전도의 방식은 파스칼의 ‘신에 대한 내기’와 닮아 있다. 파스칼은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내기를 걸 때의 손익을 따져보자는 제안을 한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만약 당신이 이기면 모든 것을 얻게 된다. 하지만 당신이 진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잃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쪽에 내기를 거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노잉>은 세상이 무의미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생각에 무기력함에 빠지느니, 차라리 그것이 신의 섭리의 일부라고 여기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실제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르고, 분명한 인과관계를 설정하려 해도 사건의 실체는 모호할 뿐이다. 트라우마로서의 사건은 암흑 같은 공백, 혹은 거대한 심연으로서 우리 앞에 출현한다(9·11은 그 단적인 예다). 코슬러의 아내를 앗아간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즉 삶의 중핵이 무의미한 공백과 심연임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 초반부 무기력감에 빠진 코슬러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암흑 같은 공백과 마주하느니, 그 자리에 신(영화에서는 다른 존재로 그려진다)을 앉히고 세상만사 신이 예정한 운명의 일부라고 믿는 편이 남는 장사다. 코슬러가 비결정론에 빠져 있던 영화 초반부보다 (지구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좌표를 믿고 움직일 때 오히려 더 활기있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는 비결정론을 버리고 결정론에 판돈을 건 것이다.

진혼곡이 아닌 산 자들을 위한 위로곡

왜 작품의 제목이 앎(knowing)이었을까? <노잉>은 “우리는 어떻게 앎에 대한 근심을 멈추고 믿음을 사랑하게 되었을까”로 부제를 달아도 충분하다. <노잉>은 과학적 앎과 종교적 믿음 사이에서 후자의 손을 든다. 아니 믿음을 앎으로 치환하려 한다. 코슬러가 예언의 서를 독해한 내용을 동료 교수에게 이야기할 때, 동료 교수는 이를 반박한다. 여전히 무의미해 보이는 숫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코슬러는 자신의 믿음을 철회하지 않는다. 종교적 앎은 믿음의 결과다. 그것은 믿음으로써 진실이 된다. 이러한 면에서 <노잉>은 포스트 9·11 시대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해 아무것도 진지하게 믿을 수 없는 냉소주의 시대, 또는 서로 진실이라 자웅을 겨루지만 명확했던 진실마저 흐릿해지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종교적 교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엔딩 부분에 세계의 종말을 앞두고 “이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알아요”라고 답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아들의 대답은 “믿어요”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영화의 엔딩, 에덴에 있었다는 세계수(또는 생명의 나무)를 향해 뛰어가는 두 아이의 환상은 그 믿음의 결과이다. 그것이 실재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허망한 죽음에 직면해서 그러한 ‘믿음-환상’마저 갖지 못한다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그들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무의미한 죽음을 이겨낸다. 앞서 나는 <노잉>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닮은꼴의 영화라 말했다. 이는 이 두 작품이 죽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이 아니라 산 자들을 위한 위로곡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무의미한 죽음에 대해 ‘믿음’(혹은 그것이 치환된 앎)으로 대처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노잉>은 무력감에 빠져 있는 미국사회에 대한 마지막 충고를 건넨다. 삶이 무의미하고 공허하다고요? 그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믿으세요. 정작 신이 없다고 해도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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