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달콤한 그녀들과 쓸쓸한 그녀들
2009-04-3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여성 감독들이 조폭영화가 물러난 자리를 채우는 두 가지 경향

조폭영화 <유감스러운 도시>는 어느 면으로 보나 부진했고 이 장르는 실질적인 퇴장을 알렸다. 관객 100만명을 넘었다는 게 특기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 장르적 쾌감 면에서 거의 회생할 기회를 잃었으며 여기에 누가 다시 손을 대든지 그건 아둔함을 자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조폭영화는 매우 흥미롭게 시작하여 흉물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사라지지 않았다 해도 창의적이지 않는 한 귀환이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장르가 종말에 이른 것은 어쩌면 정치적 야유, 하층민 남성 주인공의 멜로드라마, 그리고 최후까지 탈진한 코미디로 회전하면서 그 장르의 생명력을 충분히 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이유를 찾자면 영화의 총체적 공기를 매번 새롭게 마시려는 시도 대신 캐릭터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감행한 것이 스스로의 장르적 삶을 단축시키고 일찍 닳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집에 왜왔니>를 보다가 문득 조폭영화의 흥망성쇠를 떠올렸고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는데 아주 별개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집에 왜왔니>를 보다 떠오른 단상들을 나열해보려고 한다.

일본 인디영화 그림자 물씬

각목이 물러난 자리에 들어서는 몇 가지 장르적 경향들이 있다. 그걸 세부적으로 분류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대신 근래에 우리가 마주한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하나는 <그림자살인> 같은 대체 역사물이다. 이 장르는 지금 계속 변주되고 있으며 특히 근대의 시간으로 들어가 공포, 어드벤처, 추리물 등으로 재시도된다. 각목 대신 이국적인 남성 소영웅이 <그림자살인>에 등장한다. 그 다음 나머지 하나, 이걸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나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데 어쨌든 로맨틱드라마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케이크 무비? 와인 무비? 무엇이라 부르던 달콤하고 향긋하며 안락하기 이를 데 없는, 위험천만할 때조차 아늑해 보이는 영화들. 케이크와 와인과 멋진 옷, 특히 기묘하지만 포옹하고 싶은 여인이 등장하는 영화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오이시맨> <키친> 그리고 <우리집에 왜왔니> 등이다.

이 영화들은 동시대 일본 인디영화의 영향을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2000년대 후반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누도 잇신으로 대변되는 일본 인디영화의 어떤 경향이 상승세를 얻었고 특히 여성관객은 그에 흠뻑 취했다. 이 영화들을 단지 수입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벤치마킹하여 제작하려는 시스템의 돌파구는 거기서 가능성을 보고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때 그 영화들이 지닌 영화적 속성도 함께 벤치마킹되었다. 연출자는 감수성 넘치는 남성감독에게서 시작해 점차 젊은 여성감독으로 옮겨갔고 주인공은 동성에서 시작하여 여성 화자쪽으로 전환하고 있다. 아직까지 괄목할 만한 평가나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도로 볼 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장르 중 하나다.

이때 긍정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기형적인 남성 장르가 후퇴하고 또 다른 남성 장르들이 활보하는 가운데 그동안 빈곤했던 여성감독에 의한 여성 화자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키친>과 <우리집에 왜왔니>는 신인, 여성감독이, 여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라 뜻깊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점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은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이다.

별스러운 여성 주인공에의 집착

<우리집에 왜왔니>는 일본영화 전통의 기호를 주인공인 이수강(강혜정)에게 특별히 부여한다. 이수강을 떠올릴 때 잊혀지지 않는 건 “다녀왔습니다”하며 불쑥 김병희(박희순)의 집에 들어올 때며 그렇게 머무르다가 떠난 뒤 다시 “다녀왔습니다”라며 화면 밖 소리를 들려주며 사라질 때다. 집에 들어올 때 잊지 않고 “다다이마”(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것은 일본영화의 고전기부터 내려온 홈드라마 장르의 전통이다. 이 대사는 그녀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은유를 넘어서서 이 영화가 어떤 것과 혈연관계를 맺는지 스스로 알려주는, 변주된 장르적 원본에 대한 귀여운 표식에 가깝다.

그런데 일본 인디영화에 빚진 한국영화들의 미묘한 부작용 중 하나는 무의식의 핵심을 잘못 번안하거나 나쁜 것을 골라 확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 인디영화 안에 마을, 청춘, 관용과 차이를 통한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돌고 있다고 늘 느낀다. <린다 린다 린다> <스윙걸즈> <박치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등이 대표적이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 마을이 폐쇄 집단이 되고 청춘이 미래에 대한 포기가 되며 차이를 관용하는 것이 의심스러운 이타주의로 보일 때가 있어도, 긍정적인 힘이 늘 조금 더 강하다.

한국의 케이크 장르(그냥 이렇게 한번 불러보자)로 넘어오면 좀 달라진다. 엑조티즘에의 동경, 무해함을 가장한 믿기 어려운 이타주의, 특히나 다소 의뭉스럽고 모방적인 캐릭터가 넘쳐난다. <오이시맨>은 엑조티즘을 사랑하고, <키친>은 서사보다 안락한 레스토랑과 주방의 취향을 더 소중히 여긴다. 또한 주인공 여성 캐릭터의 특별함을 전부 강조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집에 왜왔니>는 가장 단호하다. <우리집에 왜왔니>는 적어도 엑조티즘과 안락한 취향에의 강조와는 별개의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별스러운 여성 주인공이라는 집착에서 가장 직접적이다.

캐릭터가 살고 서사는 죽었네

<오이시맨>의 메구미(이케와키 지즈루). <키친>의 모래(신민아). <우리집에 왜왔니>의 이수강이 공유하는 건 무엇일까. 그들은 겉으로는 의뭉스럽거나(메구미) 난수표로 보일 만큼 무색무취하거나(모래) 심지어 혐오스러운 치장을 했지만 마음의 속살은 아름답다(이수강). 이수강에 한정한다면 그녀는 냄새나고 더러운 옷을 입었지만, 마치 저 먼 별에서 지금 막 착륙한 것 같은, 그래서 때때로 그녀의 인성과 사회적 위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친년”이라고 불린다. 이수강은 처음 보았을 때 일부러 덜 매력적이거나 속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치명적이지 않고 알고 보면 달콤하고 향긋하다. 이수강은 “미친년”이라는 말로 비난받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려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저 여자를 저렇게 부르는 것이라며 영화는 알려주려 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를 혐오스럽게 만든 건 그녀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영화가 그려낸 것처럼 그 마츠코를 생각나게 하는, 그러나 조제와 섞여 있는, 이수강의 일생도 역시 그러하다.

이때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건 차이를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인가? 관용에 대한 은근한 은유인가? 하지만 영화가 망설인다. 관용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는 대신 그녀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걸 더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그녀는 팜므파탈이 아니에요, 위험하지 않아요, 라고. 그래서 김병희와 이수강은 뒤늦은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처음에 그녀가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 달콤한 장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치명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생각을 밀어내지 못하겠다. 전자는 관용을, 후자는 안락함을 위한 것이라 이건 서로 다른 말일 것이다.

물론 그런 캐릭터의 등장 자체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캐릭터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잃어가는 것들이 문제다. 캐릭터화라는 작업을 곧 도식적으로 과장된 인물형의 옷을 입히는 것으로 이해할 때 조폭영화가 캐릭터에 대한 변태적 집착으로 최초의 가능성을 잃고 메말라갔다는 사실이 동시에 떠오른다. 조폭영화 안에서 캐릭터 작업으로서의 성공은 최초 격인 <넘버3>뿐이었다. 더 중요하게는 과잉된 캐릭터 해석이 서사적 결핍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을 종종 불러오는 것 같다. 서사의 필연성이 제거될 때, 정확히는 세계와 그녀들이 맺는 관계가 절연 상태에 놓일 때, 그 인물 자체는 매력적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실하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집에 왜왔니>는 서사적으로 중요한 부분에서도 에피소드의 힘으로 통과한다. 물론 우리는 에피소드 중심의 판타지와 달콤함을 끝내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집에 왜왔니>는 그런 방향 끝까지 가는 것 역시도 주저한다.

여성감독들 등장에 희망을

<우리집에 왜왔니>는 전반적으로 사소한 재미가 있는 영화다. 케이크 장르의 다른 영화들도 실은 그렇다. 하지만 이런 장르가 영화의 주축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할 때, 우스운 말이지만 케이크 장르 대신 밥 장르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캐릭터를 끌어안고, 서사의 핍진성이라는 절실함을 놓지 않고, 영화 속에서 사는 그녀의 영화 속 삶을 이어나가는 영화들. 혹은 그런 여성영화들. 이 점에 관해 사실 나는 지금보다 더 큰 우려보다는 한 가지 희망을 갖고 있다. 더구나 이런 문제를 어떤 기존의 남성감독이나 남성 화자가 아닌 신인 여성감독과 그녀들의 화자가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그녀들과 달리 어떤 그녀들은 달콤하거나 안락함 대신 치명적인 문제에 곧장 접근한다. 캐릭터 구축 대신 그들이 들이마실 세계의 공기를 생각한다. 에피소드 대신 서사의 절실함을 생각한다. 나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그녀들과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녀들 중 어느 한편에 서겠다고 말할 입장은 안되지만 이 둘이 대척점을 이룬다는 건 균형을 위해서도 좋은 현상이다.

말하자면 2009년 상반기 한국영화의 경향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여성감독, 특히 신인 여성 감독의 대거 출현이다. 2008년과 비교하고 또 올해 상반기 개봉할 작품들까지 염두에 두면 여성감독과 그들의 분신을 이 짧은 기간 얼마나 집중적으로 만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가는 한 가지 방향, 달콤하고 무해하고 치명적이지 않은 여성 화자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말했다. 나머지 하나는 반대된 자리에서 현실적이고 씁쓸하게 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온통 치명적이다. 그 여성영화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혹은 치명적 리얼리티 안에서 연대감의 영화를 지향하고 있다. 여성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과 반영의 차이가 앞의 케이크 무비와 정확하게 대척점을 이루면서.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두편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어 짧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의 방> <어떤 개인 날> <나무 없는 산>, 그리고 케이크 장르와 이 연대감의 영화 중간쯤에 있는 것 같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모두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 여성감독의 영화들이다. 이중 <그녀들의 방> <어떤 개인 날>이 아카데미 학생들의 졸업작품이고 김소영은 이미 몇 차례나 장편영화를 만든 경력자라는 차이가 있지만, 김소영을 제외하면 대체로 신인이고 이 작품 모두가 합의한 것처럼 자매애, 모성, 사회적으로 고립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에 개봉했거나 할 예정이라는 건 주목할 만하다. <그녀들의 방>은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어 하는 가난한 여자와 큰 집을 두고 홀로 세상을 떠나야 하는 중년의 여자 사이의 교감을, <어떤 개인 날>은 이혼한 싱글맘이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다른 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며 친해지는 이야기를, <나무 없는 산>은 엄마를 멀리 보내고 지내는 어린 두 자매의 이야기를,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배다른 두 자매가 아빠를 함께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녀들은 다 어디에서 왔나

이 영화들이 전부 뛰어나지는 않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건 <나무 없는 산>이며 이 영화는 연출의 신비라는 묘사가 필요할 만큼 아이들에게서 티없는 연기를 끌어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납득하기 어렵고 당황스러운 결론만 제외한다면 흠없이 공효진과 신민아의 아름다운 앙상블을 끌어낸 사례로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평가들을 떠나 궁금하다. 우리는 달콤한 그녀들과 쓸쓸한 그녀들의 동시적 출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볼 시간인 것 같다. 이걸 단순히 주인공들의 계층적 차이로 구분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그것에 대해 지금보다 더 깊은 자리에 들어가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 신인 여성감독들의 이 두 가지 양상에 대해 짚으며 끝내지 않을 수 없고, 그걸 지켜보면서 느껴지는 긴장감에 관해 함구하는 건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집에 왜왔니>라고 이 영화 속의 김병희는 이수강의 등장에 관해 물었는데, 나는 다르게 묻고 싶었다. 그녀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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