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x로 전락한 X의 슬픔
2009-05-1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용의자 X의 헌신>은 어떻게 의도된 실패의 추리극이 되었나

이야기꾼과 수학자는 작업 도구도 다르지만 대개 작업 방향도 다르다. 이야기꾼은 요소들의 관계를 쌓으면서 구조를 구축한다. 수학자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로 구조를 해부한다. 하지만 둘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하다. 첫째는 진정으로 야심찬 이야기꾼과 수학자라면 자신들의 작업으로 세계 혹은 존재의 비밀에 진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축하거나 상정하는 구조가 바로 세계의 환유이거나 은유, 혹은 이면의 본질이라고 믿는 것이다.

둘째는 둘의 작업이 같은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전제는 구조가 요소들의 관계로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의 이야기꾼들과 수학자들 중에서 이 전제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후기구조주의 이후에 구조가 텍스트의 하위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야기는 그 스스로 비밀(비밀의 열쇠가 아니라)이 되었고, 수학은 괴델의 결정불가능성의 출현 이후에 완벽한 체계에의 야심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첫 번째 공통점, 즉 세계의 비밀에 도달하려는 소망은 도달 불가능한 고지를 향한 진격이라는 실패가 예정된 시도를 반복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미지의 요소를 찾아내고 그들간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이야기꾼과 이야기의 감식자

이야기꾼도 아니고 수학자도 아닌 우리는 전제의 붕괴라는 복잡한 사태보다 그들의 소망, 그들의 분투가 지닌 비극적 낭만성에 훨씬 더 이끌린다. 우리는 대개 그럴 능력이 없으므로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해줄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망은 세계의 불가지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소망이기도 하다. 물론 대개의 경우 우리는 수학보다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접하며,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 세상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게 된다.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소망을 단지 잠정적으로 만족시키며 소비된다. 하지만 어떤 유능한 이야기꾼은 그 소망을 만족시키는 척하면서 그의 실패를 은밀히 알려준다. <용의자 X의 헌신>도 그런 이야기다.

굳이 수학자를 거론한 것은 <용의자 X의 헌신>의 주인공이 바로 수학자이며 동시에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홀로 은둔하던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는 옆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알게 된다. 옆집에 미모의 중년 여성 야스코가 딸과 함께 살고 있었고 모녀는 어느 날 들이닥친 난폭한 전남편의 폭력에 저항하다 우발적으로 그를 목 졸라 죽인 것이다. 이시가미는 사건 직후에 모든 것을 처리하고 모녀를 보호한다. 그가 어떻게 그리고 왜 처리했는지는 영화의 끝에 가서야 밝혀진다. 경찰이 그의 ‘처리’에 따라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동안,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경찰의 추리를 비웃으며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한다. 말하자면 이시가미는 실제 사건으로 서사를 구축하는 이야기꾼이며, 형사와 유가와는 그 서사의 관객 혹은 감식가이다.

여기까지는 범인-형사-탐정의 두뇌싸움을 얼개로 삼는 고전적 추리극의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은 고전적 추리소설이야말로 완전한 이야기(비록 범죄 이야기에 한정되긴 하지만)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서사의 전제 조건이 되는 장소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범죄는 늘 미궁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유가와가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자신의 신조를 말할 때, 그는 이 사실을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이시가미도 그런 전제를 믿어야 하는 수학자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의 흥미로운 점은 그 믿음을 전제가 아니라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수학자와 이야기꾼이 가장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에서, 그 믿음을 회의하면서 이 이야기가 작동한다.

수학천재인 대학생 이시가미는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만) 그 답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아름다운 답이란 무엇일까? 영화는 직접 말해주진 않지만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그것은 사랑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눈물겨운 로맨스라고 해도, 사랑의 비의(秘義)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타자라는 미지수와 예정된 실패

(여기서부터 강한 스포일러 있음) 용의자 X, 즉 이시가미의 시도와 실패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사건 1년 전 이시가미는 자살을 준비 중이었다. 그때 막 옆집으로 이사온 야스코 모녀가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방문한다. 그는 자살 시도를 멈춘다. 모녀에게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죽음에의 충동과 그것을 멈추게 한 사랑. 뒤에 경찰을 속여넘긴 ‘처리’의 이유는 사랑이라고 설명된다. 이것은 편하고 안전한 설명이지만 불충분하다. 내가 보기에 더 근원적인 것은 죽음에의 충동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기적과 같은 사랑의 기쁨도, 상상을 불허하는 끔찍한 자학적 ‘처리’도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시가미는 왜 죽으려 했을까. 이것은 영화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에서도 설명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작가는 설명하는 척하면서 설명을 피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머릿속까지 건드릴 수 없다. (수학이라는) 그 공간은 그(이시가미)에게 무한의 낙원이었다.” 자기만의 광대하고 온전한 낙원을 지닌 자가 왜 죽음을 결심한 것일까. 소설은 몇 문장 뒤에 “수학만이 유일한 즐거움인 자신이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미 존재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 죽음만을 생각했다”고 애매한(그 길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그 스스로 이미 말했으므로) 문장으로 건너뛴 뒤에 다시 몇 문장 뒤에 “죽는 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다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을 뿐이다”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굳이 원작 소설을 인용한 이유는 그것이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현명하게도 이런 독백마저 생략해버렸다. 당연한 일이다. 죽음에의 충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설명의 의도된 실패, 말해질 수 없는 이유, 그 공허의 한가운데 용의자 X가 있다. 결코 풀 수 없는 미지수 혹은 영원히 비어 있는 중심 X. 이시가미에게 수학이라는 구조는 자기라는 빈 중심을 가운데 두고 공회전한다. 혹은 그 견고한 구조의 바깥에서 그 스스로 공회전한다. 구조는 결코 ‘나’가 아니다. ‘아름다운 답’이 과연 존재할까?

야스코 모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수학의 문제가 풀려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소설에선 표현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아름다움’이라는 구절은 ‘그것을 넘어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를 죽음의 충동으로부터 방어한 것은 수학이 아니라 모녀의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이런 독백을 대부분 생략하고도 훌륭하게 성립하는 이유는 이 말들이 대부분 실패한 말이고 어긋나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야스코의 전남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이 천재 수학자는 죽음의 충동을 막지 못했던 수학의 기쁨을 넘어설 수 있는 이야기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에게 행운이다. 수학자가 이제 ‘아름다운 답’이 담긴 완벽한 이야기를 꿈꾸는 것이다. 범죄 이야기로 번안된, 스스로 아름답고 영원한 미지수 X가 됨으로써 그것의 출제자만 알 수 있는 난해한 고등 함수. 수학자의 생에 이보다 더 멋진 마무리가 있을까. 예상할 수 있듯이, 불행하게도 그것은 실패가 예정된 프로젝트였다.

그의 프로젝트는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특별히 감탄할 만한 대목들이 있다. 예컨대 영화에선 불분명하지만, 모녀의 알리바이에서 어떤 공백 즉 소문자 미지수 x를 남겨두는 것. 모녀의 알리바이는 조작된 게 아니라 실재했다. 발견된 시체의 주인이 살해당한 시각에 모녀는 영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조의 신봉자들은 미지수를 중심으로 공회전한다. 이시가미는 자신의 공허한 삶의 축약판을 서투른 형사들이 반복하도록 만든다. x 주변을 돌고 있는 한 결코 X를 알아내지 못한다. 또 다른 대목. 이시가미는 한 노숙자를 죽여 야스코의 남편의 시체로 둔갑시킨다. 이것은 경찰의 오인을 위해서이지만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 야스코의 남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쨌든 살인자이다. 자수한 뒤 경찰의 심문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하지만, 동시에 살인자가 살인자로 처벌받는 명료한 세속적 서사의 완결성을 향한 그의 수학자적 집착의 산물이다.

이 가공할 서사의 프로젝트는 실패한다.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한 서사의 전모를 유가와가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인지 자체는 이시가미의 서사를 변형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야스코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수했기 때문이다(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소설에서 야스코의 딸은 학교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니까 실패의 이유는 이시가미가 야스코라는 타자를 계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대로 타자가 ‘물자체’라면 그것은 결코 구조의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 이시가마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고 오만하게도 불가능한 고지를 오르려 했고 그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작가/감독의 실패의 자기반영

자수한 야스코 앞에서, 이시가미가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 그것은 모녀를 끝내 지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한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절대 미지수 X가 x로 전락하며 서사가 그 자신을 넘어섰고, 그로써 아름다운 답을 향한 이 불행한 수학자의 필생의 프로젝트가 실패했기 때문일까? 물론 어느 쪽으로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이야기꾼이 있다. 그것은 <용의자 X의 헌신>의 작가/감독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완결짓지 못한다. 자수한 야스코, 그리고 자살 기도한 살인 공모자 딸의 삶에 대해 이 이야기는 완전히 무능력하다.

<용의사 X의 헌신>은 실패한 추리극이다. 수학자/이야기꾼으로서의 이시가미의 실패는 작가/감독의 실패의 자기반영이다. 물론 그 실패는 의도되었다. 그 실패를 통해 아름다운 답, 완전한 이야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름답게 말한다.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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