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의 촬영현장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한 장면을 찍고 있었다. 여주인공 태주 역의 김옥빈이 한창 감정 온도를 올려 연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약간 신들린 상태로 그녀는 내가 현장에 있었던 12시간 동안 계속 집중하고 있었다. 태주의 남편 강우 역의 신하균은 좀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자기 촬영 분량이 언제일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객쩍은 농담이 가끔 오갔지만 현장 분위기가 워낙 팽팽해 조심스러웠다. 주인공 현상현 신부 역의 송강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가끔 신하균과 시시덕거리기는 했지만 금방 침묵 모드로 변했다. 강우의 어머니이자 태주의 시어머니인 라 여사 역의 김해숙은 거의 세트장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전신마비인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는 클로즈업으로 잡힌 눈동자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촬영 사인이 울리면 김옥빈은 미친 듯이 대사를 분출하고 송강호는 구석에 말없이 서 있다 무슨 기척을 눈치챈 듯 짧고도 단호하게 고개를 쳐들며 흠칫 놀란다. 김해숙은 눈동자를 굴린다. 귀신이 된 강우 역의 신하균은 입속에 물을 머금고 헤헤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난다. 대충 그날 본 것은 그런 화면들이었다. 열몇 차례나 김해숙의 눈동자 연기가 NG로 끝났다. 통 내려오지 않던 김해숙이 가끔 세트장에서 내려와 모니터 옆에 섰다. “아이 참, 눈동자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웃고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심야시간대를 넘어가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피로가 무겁게 공기에 가라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화면을 튕겨낼 듯한 배우들의 에너지
송강호는 천재적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슥 고개를 드는 동작인데 다른 배우들의 감정과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았다. 매번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슛 준비 사인이 내리면 슬며시 세트장에 올라가 있다가 그 미세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김해숙의 존재감도 대단했다. 박찬욱 감독이 냉정하게 거듭 재촬영 지시를 내리는데도 그 존재감의 에너지가 쉽게 깎이지 않았다. 이동과 컷이 많은 스타일이라는 걸 모니터 현장 편집본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정작 영화엔 길게 지속되지도 않을 화면에 새기는 배우들의 에너지가 셌다. 화면을 튕겨내려는 기세였다. 김옥빈은 선배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올라간 감정 레벨을 끝까지 지속해야 했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 박찬욱이 가장 좋아할 만한 소재의 영화가 그렇게 육화되고 있었다. 배우들의 몸을 통해서. 완성된 영화를 봤다. 촬영장 방문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했던 대로였다. 조금 놀란 것은 송강호의 연기가 내 예측보다 훨씬 고단수로 천재적이었으며 김해숙의 존재감도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박찬욱의 스타일은 수식이 많은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무뚝뚝하다. 이미 출간된 동명 소설을 읽어보면 현상현 신부와 태주의 관계, 그들이 흡혈귀와 팜므파탈로 만나 치정극의 얼개를 짜는 것이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 스토리가 영화로 옮겨지면 박찬욱은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것보다는 단속적이고 폭발적인 인상들에 훨씬 집중한다. 늘 그렇듯이 그의 그런 연출 전략은 이야기와 캐릭터의 인과적 이음새보다는 묘사의 과도한 표면화에 열중하는 쪽이다. 그나마 영화에서 설명적인 유일한 부분은 현상현 신부가 아프리카의 실험실에 자청해 가서 바이러스에 감염돼 흡혈귀가 되는 설정까지다. 현상현이 쓴 편지의 내용을 읽는 내레이션으로 처리된 이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아는 현상현의 내면이다. 그 다음부터 현상현은 흡혈귀의 본성에 맞는 행동, 그리고 사제의 운명을 포기하고 태주와의 사랑 행위에 열중하는 행동을 보여줄 뿐이다.
빨고 핥고 신음소리를 내뱉는 것 외에 현상현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특별한 게 없었다. 상현 신부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언어가 부족하다. 그가 꿈꾸지 않았던 세계로 진입해 되도록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소심한 흡혈귀로서, 설상가상 어릴 적 친구의 아내를 욕망하게 된 이 껍데기뿐인 신부는 영생, 구원, 죄의식, 대속, 파멸적 충동, 타락, 구원과 같은 추상적 관념을 자기 육체에 새기고 있다. 그의 그런 욕망과 대속의지는 친아버지 같았던 노신부와의 대화에서 자기만의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흡혈귀의 피맛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그 눈먼 노신부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애타게 찰나적인 파멸의 쾌락과 관능을 갈구한다. 태주도 마찬가지다. 처음 우리가 그녀를 볼 때 그녀는 강우의 병상에서 조금 떨어진 채 조는 듯한 눈초리로 허공을 죽은 사람처럼 응시하고 있다. 매일 밤 동네 길거리를 맨바닥으로 달리는 그녀의 젊은 육체에 감춰진 뜨거운 피는 김옥빈의 스타카토 발음으로 웅얼거리는 것과 내뱉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공기로 기화된다.
그들에게 설명할 대사를 빼앗은 것은 감독 박찬욱의 예술적 자유다. 가끔 설명할 때가 있지만 대개는 부조리한 유머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자신이 선량한 흡혈귀임을 태주에게 납득시키려는 상현 신부의 모든 행동은 코미디다. 빨대를 식물인간 환자에게 꼽고 바닥에 드러누워 받아먹는 모습으로 자신의 현 상황을 웅변하는 상현의 행동을 보며 태주는 처음엔 도망친다. 나중에는 상현의 초인적인 괴력에 끌린다. 상현의 괴력에 기대어 그녀는 자신을 옥죄는 라 여사와 강우가 강제하는 삶의 감옥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따지고 보면 뻔한 스토리다. 서로에게 끌려 불꽃을 태울 때 상현과 태주는 어둠컴컴한 라 여사의 한복가게 마루에서 69 비슷한 자세로 부산하게 군다. 낭만적인 관능의 정조를 아예 지워버리고 시작하는 이 관계에 대한 묘사는 여타 불경한 묘사로 이어진다.
격정적인 흡혈행위야말로 압권
그중에서도 압권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상현의 본격적인 흡혈 행위를 보여줄 때다. 3분 넘게 지속되는 이 장면에서 상현 역의 송강호는 어떤 흡혈귀 영화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격정적인 행동을 이어간다. 물리적인 표면의 극한까지 파고드는 이런 것이 박찬욱 연출의 진심이다. 슬프게 탐닉하는 행위, 짐승처럼 헐떡거리면서 상대의 육체를 남김없이 핥고 빨며 다시 수혈해주는 동류의 행위, 타락하면서 제어할 수 없지만 궁극에 파멸로 귀결될 것임을 아는 행위, 이런 장면의 물리적 직접성이 연출자에게는 캐릭터 묘사를 대치하는 것이다. 나는 불편하면서도 쾌락적인 이런 장면에 어떤 낭만적인, 또는 감상적인 윤기를 입히지 않은 것이 박찬욱 영화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에서 환생한 옛사랑의 목을 빠는 행위에서 터져나오는 낭만적인 사랑의 이상화 정조가 이 영화에는 흔적도 없다.
다른 세계로의 탈출은 완벽하게 불가능하다. 그걸 표상하는 것은 김해숙 버전의 라 여사 얼굴이다. 전신마비로 굳어 있으면서도 사태의 전말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그녀의 완강한 도덕적 복수의식, 애초에 모든 비극의 시원이 되는 일상적 감옥의 수령으로서의 자각은 평생 해본 적이 없는 기성세대의 철옹성 같은 존재감이 그것이다. 결국 이 변태 버전의 흡혈귀 팜므파탈 사랑 비슷한 스토리는 핏빛 바다의 색감으로 화려하게 도배되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나로서는 그 과정과 결말에 더 진한 파토스가 얹혀 있길 원했지만 박찬욱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소재를 자기 천성에 맞게 잘 연출했다. 배우들은 거의 완벽하게 버터 냄새와 토착적 윤리관이 버무려진 이 영화에 맞춰주었다. 그게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