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모든 것은 뱀파이어가 된 신부가 테레즈 라캥을 만난 순간에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이 뱀파이어가 된 신부 이야기를 장고 끝에 에밀 졸라 소설 <테레즈 라캥>의 몸통에 뱀파이어 피처럼 흘려 넣기로 결심했을 때, <박쥐>는 원심력이 이끌어가는 불균질한 텍스트로서의 운명을 부여받게 되었다.
‘행복한복집’이 중요한 까닭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영화의 불균질한 성향이 단점이나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나 특성이며 나아가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박쥐>는 박찬욱 영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가장 층위가 두터운 작품이다. 내가 매혹된 이유는 무엇보다 이전에 이런 작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글대며 서로 어깨를 부딪는 갖가지 모티브들은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관객의 사고와 감각을 자극한다. 이건 멜로, 범죄극, 종교영화 등 어떤 각도에서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걸작이면서 동시에 어떤 방향에서도 온전히 보이지 않는 괴작이기도 하다.
이야기만이 아니다. <박쥐>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렇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행복한복집’은 지향점을 그대로 알려준다. 건물 외양은 일본식 적산가옥인데, 주인은 한복을 팔면서 러시아 술 보드카를 마신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은 중국인의 오락인 마작을 하는데, 그중 한명은 필리핀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선 이난영의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공간 밖에서는 바흐의 칸타타가 흘러든다.
<박쥐>의 모든 스타일은 화술과 밀접히 맞닿아 있다(즉, 불균질성을 미학적 통일성으로 밀고 나간다). 심지어 배우들까지 그렇다. 이때 특히 중요한 것은 <박쥐>가 다양한 측면에서 극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종교적 맥락에서의 극점은 태주가 상현의 능력을 궁금해하는 옥상장면에 있다. 태주는 500원짜리 동전을 가리키며 “이거, 구부릴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이에 상현은 동전을 아예 찢어 보인다. 태주는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어요?”라고 다시 재촉한다. 그러자 상현은 태주를 안고 훌쩍 뛰어내린다.
이건 악마가 금식 기도를 마친 예수를 유혹하는 성경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변용한 것이다(악마의 첫 번째 시험은 “신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시험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보라”는 것이었다). 예수는 40일간 굶었고, 상현은 오래 피에 굶주려 있다(여기서 떡과 돈은 사실상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는 끝내 시험에 들지 않지만 상현은 굴복한다.
이어 상현 품에 안겨 뛰어내리는 태주 얼굴을 지배하는 쾌감에 집중해 촬영한 숏은 가장 뛰어난 장면 중 하나다. 그건 기꺼이 욕망에 투신한 자가 느끼는 하강의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쾌감이다(이 부분은 그토록 떠들썩한 가십이 되었음에도 기실 매우 금욕적인 스타일로 찍힌 종반부 ‘성기노출’ 장면의 톤과 극명히 대비된다. 그렇게 <박쥐>의 뒤틀린 구세주는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사람들이 헛되이 바라는 희망의 일그러진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신이 침묵하는 세상에서 인간을 위한 ‘순교’를 한다. 이건 ‘희망이 없어도 소중한 삶’을 역설해온 박찬욱 영화 세계와 합치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극점은 베드신이 아니다
신부에서 뱀파이어로의 추락을 경험하는 상황은 전편을 통해 수직 이미지로 훌륭히 시각화되어 있다. 이 영화에는 뛰어내리는 순간의 아찔한 감각은 있어도 뛰어오르는 순간의 짜릿함은 없다(신봉자들을 피해 수도원 계단으로 뛰어오르는 장면에 담긴 건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원치 않는 상황에 갇힌 자의 절박한 탈출 욕구다). 극중 상현이 지면에서 건물 위로 뛰어오르는 단 하나의 숏은 매우 기이한 앵글로 촬영되었다. 직부감으로 찍힌 이 짧은 숏에서 첫 관계 실패 뒤 2층 화장실로 뛰어오르는 상현은 카메라 각도 때문에 화면 위에서 화면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뛰어오르는 높이를 평면화시키는 앵글은 초인적 괴력을 시각적으로 무화시킨다. 왜냐하면 이건 운명의 희생자가 겪는 전락의 이야기니까. 뱀파이어 영화로서 극점은 상현이 태주를 살려내는 장면에 있다. 그건 지금껏 내가 본 뱀파이어 장르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신이었다. 상현이 처한 모든 딜레마가 거기에 탁월하게 응축, 형상화되어 있다.
<박쥐>는 뱀파이어 장르의 외양을 빌려왔지만 관습적 묘사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창의적이다. 뱀파이어가 된 사제가 흡혈을 하는 장면들은 이 장르 특유의 고딕적 묘사나 과장된 비장함을 경계한다. 이 영화에서 흡혈장면의 상당수는 엄마 젖을 먹는 아기의 자세나 일상적으로 음식을 탐하는 아이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상현이 자신의 손가락을 핥음으로써 남의 피를 처음으로 먹는 장면은 인물 주위를 도는 카메라 움직임으론 강조되지만 연기적으로는 무심히 표현된다. 그 장면에서 상현은 두꺼비가 파리를 잡아먹듯 불쑥 흡혈의 첫 체험을 한다. 피를 마시는 일에 냉장고나 전자레인지 혹은 락앤락까지 동원되는 건 단지 유머가 아니다. 이건 살기 위해 끼니를 해결하듯 피를 먹어야 하는 남자에 대한 영화다.
범죄극으로서 극점은 마작 도중 범행이 폭로되는 신에 있다. 빼어난 앙상블을 과시하는 이 장면에서 배우들은 리액션 연기의 진수를 펼친다. 이 장면은 특히 리듬이 뛰어나다. 카메라는 좁은 공간에서 인물 사이를 넘나들거나 포커스를 바꾸며 음악적 동선을 보여주고, 편집은 숏을 긴밀하게 쌓아올리며 긴장을 축조하고, 절정의 순간은 눈꺼풀을 격렬하게 깜빡이는 소리를 담은 프레임 밖 사운드를 통해 점화된다. 이 모든 기술적 성과는 인물들의 급변하는 심리를 매우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사랑 영화로서 극점은 이 영화의 베드신에 있지 않다. 그 감정적 극점은 발과 관련된 일련의 묘사에 담겼다(<박쥐>에서 맨발은 다른 어떤 신체부위보다 로맨틱하고 에로틱하다). 골목길에서 맨발의 태주와 마주친 상현이 그녀를 들어올려 자신의 신발 위에 올려놓을 때, 마지막 숏에서 태주 발에 걸려 있던 그 신발이 떨어져내릴 때, 이 영화의 멜로는 불쑥 시작되고 쓸쓸히 끝난다. 동서양 신화에서 신발은 처지와 운명을 뜻하는 오랜 상징이다.
그리고 관계의 극점은 위에서도 언급한, 태주를 살려내는 장면에 있다. 가장 가까운 먹잇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대상, 홧김에 죽여버리고 싶지만 또 기어이 살려내고 싶은 상대에 대한 이율배반적 감정은 두 연인 관계가 얼마나 지독히 서로의 삶에 빨판처럼 들러붙어 있는지를 끈적이는 피 속에서 드러낸다. 여기서 서로의 손목을 빨고 있는 기괴한 자세는 서로 종속되어 있는 둘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요약한다(병원에서 첫 관계를 가질 때도 둘은 서로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흡사한 자세로 빨았다).
이 영화 베드신은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다. 그건 상현이 태주의 살이 아니라 피를 좀더 근원적으로 갈구하기 때문이다. 태주는 상현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생리혈을 통해 그에게 처음으로 피냄새를 일깨워준 원체험의 대상이다. 베드신에서 손가락 등을 빠는 행위가 유달리 강조되는 건 그 때문이다.
‘배열의 독창성’을 이루다
그리고 이 모든 불균질한 극점들은 라스트신의 시청각적으로 힘주어 강조된 피 끓는 신화적 바다 속에서 상징적으로 용해된다. <박쥐>는 관객이 잘 소화할 수 있도록 균질화 과정을 거치는 대신, 무균질 우유처럼 본래의 맛을 간직한 채 극의 종착점에서 제의를 치르는 방식을 택했다.
예술의 역사에서는 단일한 주제와 스타일을 통해 고도로 농축된 걸작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혼유해 충돌시킴으로써 기이한 마력을 뿜어내는 작품들도 있다. 상이한 두 장르가 전-후반으로 나뉘어 한 지붕을 쓰는 찰스 로튼의 영화 <사냥꾼의 밤> 같은 걸작도 있고, 신경을 거스르는 불협화음의 현으로 전혀 다른 가사와 멜로디를 이어붙인 비틀스의 노래 <A day in the life> 같은 걸작도 있다. 오늘날 예술에서 독창성이란 많은 경우 배열의 독창성이다.
예술은 불편하고 모호한 것이다. 모든 이가 즉각 알아차리게 하려면 표어를 쓰거나 신호등을 세우면 된다. <박쥐>는 단일하게 몰아가는 드라마나 손에 잡히는 하나의 주제를 경계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사 이름은 ‘모호필름’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영화사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걸작 한편을 갖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