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강렬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2009-05-21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안시환의 <박쥐> 반대론- 드라마는 약하고 이미지만 빛나네

<박쥐>는 욕심이 많은 영화다. <박쥐>에 대한 수많은 기사와 비평이 영생, 구원, 죄의식, 대속 등의 관념적 단어의 나열에 머물거나 좋다, 나쁘다에 대한 성급한 평가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박찬욱은 <박쥐>에서 다시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화두를 꺼내고 있으며, 이는 ‘복수 3부작’ 등에 나타난 관념적 세계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박쥐>는 <테레즈 라캥>의 서사적 틀을 빌려 에밀 졸라가 비우려 했던 ‘죄의식’이라는 무거운 돌의 ‘심리적 효과’를 체험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뱀파이어 영화이자 격정적인 치정극이고, 또한 뜬금없이 키득거리게 되는 블랙코미디인 <박쥐>는 죄의식과 구원의 여정을 담은 종교영화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 이는 ‘일본’식 건물에서 ‘한복’을 팔고 매주 수요일이면 사람들이 모여 ‘뽕작’과 ‘보드카’를 곁들이며 ‘마작’판을 벌이는 ‘행복한복집’처럼, <박쥐>가 이질적인 단편들이 서로 충돌하며 기이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불균질적인 영화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박쥐>는 이질적인 것들간의 충돌이 일으키는 부조리함을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더 돌출시키려 한다. 역설적으로, 박찬욱은 표면적인 부조리함이나 기이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논리력을 총동원한다. 따라서 <박쥐>가 친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다 해도 적절한 비판은 아닌 듯하다. 내 관심은 박찬욱이 주제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영화 형식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부조화한다고 느꼈던 내 영화적 체험에 관한 것이다.

부끄러워 하는 자가 구하라

뱀파이어이지만 여전히 사제복을 입고 있던 상현(송강호)은 친구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벗어던진다. 이들의 첫 섹스가 ‘부활절’의 ‘병원’에서 이뤄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상현은 사제에서 뱀파이어로, 그리고 죽어 있던 미라(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붕대)에서 지극히 세속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한 인간으로 부활한다. 성당의 고아원에서 자란 상현에게 사제의 길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뱀파이어가 되어 “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라고 말하고 친구의 아내를 탐할 때, 상현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삶에서 벗어난 첫 번째 선택을 한다. 신을 떠난 상현은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진 새로운 ‘삶의 리듬’과 조우한다. 뱀파이어가 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새로운 삶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는 철저하게 그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블랙코미디로 포장하거나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경유하고 있다 해도, 박찬욱은 부끄러움(수치)의 자각을 인간윤리의 제1원리라고 말하고자 한다. 응시에 대한 대화나 응시 그 자체로 기능하는 라 여사(김해숙)를 고려한다면, (사르트르를 인용하는 듯한) 이러한 주체관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는 듯한 응시(하는 것으로 가정된 주체)에 의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이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는 입장을 피력한다. 즉, 죄의식은 단지 ‘심리적인 효과’로 머물지 않는다. 상현과 태주(김옥빈)는 강우(降雨!, 신하균)를 죽인 뒤 심리적으로 짓눌러오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본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달밤에 속옷 차림으로 체조하다가도 “나 부끄러움 타는 여자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태주는 뱀파이어가 돼서도 이 말을 반복한다. 우리는 ‘뱀파이어 태주’의 이 말을 “나는 심리적인 효과 따위에 휘둘리는 이브 같은 여자가 아니에요. 선악과 좀 따먹었다고 부끄러워하는 이브 그년이 미친년이라고요”라고 풀어야 한다.

반면에 상현은 한손은 악의 손길에 잡혀 있으면서도, 다른 한손으로는 여전히 죄의식과 부끄러움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태주와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을 갈망하는 상현의 태도다. 상현의 기도문을 기억하자. “주 예수 이름으로 허락하소서”로 시작해서 그 어떤 자부도 가질 수 없는 치욕스러운 삶을 갈구한 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로 끝맺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지은 자가 이를 고백하고 죄의 사함을 갈망하는 듯한 기도문. 여신도를 강간하는 장면에서는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려는 듯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장면을 말 그대로 보여준다. 상현은 상징적으로 자신을 죽임으로써 진정으로 이 기도문의 주체가 됨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로 인해 숭고한 대상이 된다. 박찬욱은 그것이 끔찍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향한 지독한 여정과 수고는 아름답다고, 숭고하다고, 그리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관념은 흩어지고 정서는 단절되네

물론 <박쥐>는 명확하게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박찬욱은 그것의 불가능함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대지의 끝(쥐)이 하늘(새)을 만나는 경계에서 뱀파이어의 밤을 지나 인간의 아침을 맞이하는 엔딩만 보더라도, 단선적인 해석에 길들여지지 않는 난폭함이 있다. 악의 손길을 잡았던 자신에 대한 처벌이자 자살이고, 악행의 고리를 끊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나 순교이며, 또한 인간만이 맞이할 수 있는 아침 햇살에 대한 욕망 등. 하지만 <박쥐>는 이러한 관념의 구슬을 잘 꿰지 못했거나 다른 방식으로 꿰려 한다. 박찬욱은 자신의 관념과 연관된 상황을 툭 던져놓고 그것을 그저 나열하는 데 그친다. 이는 느슨한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듯한 몇몇 극단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박쥐>는 일반적인 영화와 달리 스토리의 핵심을 드라마적인 설정보다는 강렬하면서도 압도적인 이미지로 대체한다. 따스한 햇살의 소박하고 성스러운 이미지로 시작해서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강렬한 빛으로 끝맺는 구조나 행복한복집 등의 기이한 미쟝센(이후에 하얗게 칠해지는 것까지 포함해)뿐 아니라, 태주에게 구두를 신겨주는 장면, 상현과 태주를 짓누르는 죄의식 시퀀스, 우로보로스처럼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의 형상을 그리며 서로의 피를 빨아대는 격정의 순간 등, 박찬욱은 도입부를 제외하고는 서사적 설명이 아닌, 관객에게 정서적인 충격을 줄 수 있도록 배치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관념을 제시하고 영화를 이끌어가려 한다. 박찬욱은 강렬하면서도 극단적인 체험을 이끌어내는 시각적 표현의 힘(또는 관념이 구체적인 육체 위로 새겨지며 정서로 전환되는 힘)을 믿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킨 정서적 충격은 이후 장면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그 순간에만 머문다. 죄의식은 순간적으로 돌출되었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두 사람의 격정은 불길처럼 타올랐다가 식어버린다. 강렬하지만, 그 이미지가 갖는 정서적 효과가 지속되지 않을 때, 박찬욱의 관념은 나열에 그치고 만다. 애정없는 섹스를 치른 뒤 격정이 냉담하게 식어버린 상투적 소설의 남자 인물처럼.

송강호의 연기는 최고였지만…

송강호는 생애 최고의 연기를 펼쳤지만, ‘시네마틱하게’ 빛을 발하지는 못한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비워내는 연기를 선보인다. 중립적인 표정을 중심으로 조금의 파동만을 새기는 표정을 주로 짓는데, 이는 특정한 표정이 인물의 복잡하고 부조리한 감정을 단선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객의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을 끌어들여 감정의 여백을 관객 스스로가 새겨넣는 과정이 필요하다. 송강호의 연기는 최고였지만, 내러티브적으로 느슨한 상태에서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의 정서가 여타 장면으로 확장되지 못할 때, 비워진 표정 자체가 특정 감정으로 고착되고 만다.

물론 내가 지적한 이러한 한계가 박찬욱이 표현하고자 했던 관념적 경계의 모호함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증거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숨은그림 찾듯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박찬욱 월드의 시민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일 것이다. 박찬욱은 이 영화를 두고 자신의 영화 중 제일 나은 영화일거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다고 믿지만, 어쩌면 이는 그가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것들, 마치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뭔가 남아 있는 듯했던 찜찜한 것들을 밀어내기 한판으로 끝낸 듯한 시원함을 안겨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체험에 가깝다. 극단적이고 강렬하며, 끝장을 보듯 달려간 이 영화를 보고도 여전히 뭔가가 턱하니 걸려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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