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박쥐>와 <요괴인간>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나는 박쥐와 요괴인간을 구분할 수 있다. ‘당근이다.’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33)와 헤어초크의 <노스페라투>(1979), 드라이어의 <뱀피르>, 또 <헝거> <니어 다크> <해비트> <프라이트 나이트> <마틴> <더 로스트 보이즈> <드라큘라> <블레이드> 등 뱀파이어 영화 팬인 나는 뱀파이어를 영화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 고아의 이야기
그런데 <박쥐>(Thirst)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우선 신부인 상현(송강호)이 자신을 뱀파이어라고 호명하는데, 난 ‘정말?’ 하고 물었다. 뱀파이어라는 그의 확고한 자신은 어디서 온 것인가? 위의 영화들로부터 알아낸 것일까 혹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아니면 <렛미인>? 상현이 떠올린 뱀파이어 형상과 특성은 무엇을 참조한 것인가. 특히 뱀파이어의 일반적 특징인 날카로운 이빨, 팽(fang)도 없는 주제에 왜 상현은 뱀파이어라고 자기 호명을 하고 관객인 우리는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까? 물론 그에겐 슈퍼 능력이 돋아나고 피를 갈구하며 빛을 피하는 습성이 생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을 먹이로 삼는 최상층 포식자인 뱀파이어의 면모를 갖지는 않는다. 태주(김옥빈)는 사람을 살해해 목에 구멍을 내는 대신 안전한 피를 마시는 상현에게 말한다. 자신은 여우가 닭 잡아먹을 때처럼 인간을 죽일 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예컨대 태주는 여우, 요괴 정도의 포식자로 자신을 묘사하지만 상현은 뱀파이어라고 자기 재현을 한 뒤 그 이미지나 관행, 행동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달이다. 박쥐나 요괴라고 말하지 않고 뱀파이어라고 말한 뒤에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캐스린 비글로의 <니어 다크>가 밴 자동차에 뱀파이어 일당을 태우고 다니면서도 뱀파이어라는 말을 아끼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 우리는 대대적인 마케팅을 통해 이 영화가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이야기라는 것을 듣긴 하지만 <박쥐>는 뱀파이어 장르 혹은 탈장르 영화라기보다는 만일 내가 뱀파이어라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을 것인가를 가정하는 신부의 역할놀이 같은 것이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고아로 자라 어쩔 수 없이 신부가 되어버려 신부가 아닌 그 무엇이 되고 싶은 고아의 이야기다.
예의 팽이 달리지 않은 ‘뱀파이어’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상현과 태주를 위협하는 엑소시스트도 등장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이들을 뱀파이어라고 몰아붙이지 않는다. 상현이 낮잠 자는 옷장(관)에 못 하나 박으려는 사람이 없다(농담이다).
다른 영화에서처럼 목을 물어뜯긴 채 널브러진 시체를 두고 이것이 누구의 소행일까 궁금해하는 장면들도 없다. 물론 장르는 변형이 기본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재 자체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차이들은 다종다기 뱀파이어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진짜 문제는 이 영화에 사회적 적대나 차이를 짊어진 적대자, 라이벌, 대립자인 안타고니스트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데 있다. 또 이 영화의 공간인 ‘한국어’가 사용되는 곳에서 이러한 뱀파이어를 독해하거나 코드화할 수 있는 어떤 문화적, 역사적 참조틀이나 참조물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박쥐>의 무의식적 형상화 작업은 그러하다. 뱀파이어라고 스스로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신부는 있지만 영화에서 그것을 알아보거나 알아내는 사람은 없다. 영화에 화자만 있을 뿐 이상하게 청자나 관객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성관계나 목에 구멍을 내는 행위는 재현의 강도가 세지만 정작 이를 추동하는 동기들은 나중엔 결국 가짜거나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태주는 상현에게 강우와의 부부생활을 거짓말하고 자신의 불행을 지옥으로 과장한다. 이것이 상현이 강우에게 행하는 행동의 기반이 된다.
수혈과 흡혈의 순간이 가장 정교
적대, 적대자가 없을 경우 프로타고니스트가 자기 분열적 안타고니스트가 되고, 거기에 윤리와 번뇌, 죄의식 등의 짐이 잔뜩 걸쳐진다. 신부가 자신을 뱀파이어라고 호명하는 순간 그는 주인공이자 자신의 적대자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신부의 고통을 잘 알지 못한다. 영화적 재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의 개요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 상현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괴로워하다가…”라고 전달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고통이 완화되어야 할 치유의 순간은 곧 살인으로 이어진다. 상현은 친구 강우(신하균)의 종양을 고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나중엔 폭력을 통해 그의 목숨을 앗아간다. 상현만이 아니라 태주도 고아인데 어떤 픽션에서 두명의 주인공이 고아라는 배경은 안이하다. 이즘 고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재현 장치로 보아선 완벽 소진된 재료이자 설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고아인가? 조금 있다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자.
적대가 없다보니 내장을 파고드는 근본적인 공포도 없다. 또 영화의 서사도 133분을 견뎌내기엔 궁핍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쯤 영화의 핵심적 장면이 등장하는데, 태주와 상현이 서로 수혈과 흡혈을 하는 장면이다. 상현이 태주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고 태주의 피를 빨고 하는 악순환, 악마의 순환, 그 순간이다. 상현이 태주에게 그리고 태주가 상현에게. 즉 서로가 서로에게만 유일한 참조물의 상태. 이것이 이 영화의 골격이고 관계의 핵이며 미적 미로다. 이러한 자폐적 파 드 되(Pas de Deux), 이중무, 수혈과 흡혈의 순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정교하고 공들인 장면 중 하나이며 영화의 흐름이나 구성으로 보아서 정점, 전화, 문지방의 순간에 해당한다. 이 장면은 분명 인상적이고 그 아우라가 세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핵에 해당하는 것이 드러내는 사회적 참조물의 부재, 내부적 외부성의 부재, 혹은 외부적 내부성의 실종, 자폐적 수혈과 흡혈, 미적 악순환의 묘사는 <박쥐>가 동시대 포지셔닝되는 사회나 문화, 역사를 흡혈하지도 수혈하지도 않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박쥐>가 매혹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텍스트성과의 솜씨 좋은 대결. 박쥐라는 이중적 자신에 대한 연민과 혐오.
문화의 사회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형식이며 바로 이 형식은 좀더 광대한 사회적 현실의 형식을 그 존재론적 기반으로 취하게 된다. 이때 예술 작업 자체는 반영이거나 증상이거나 혹은 특징적 표명이거나 단순한 부산물이거나 의식화이거나 혹은 상상적, 상징적 해결책이 된다. <막시즘과 형식>이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고전에 나타나는 문구다.
이 영화가 결단코 분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텍스트적 형식과 이러한 문화·사회적 형식의 연결고리다. 그러나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인용도 있다. 특히 태주와 상현과 강우가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 등의 개념적 배경은 누가 보아도 김기덕의 <빈 집>이다. 아프리카의 어떤 장면은 클레어 드니의 <아름다운 직업>(Beau Travail)을 연상시킨다.
실재적 문화나 사회와 같은 콘텍스트와의 분리를 통해 영화는 연민과 나르시시즘을 추동력으로 갖는 고아 텍스트가 된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형제나 전통이나 역사나 삶의 상황도 희박하다. 이곳의 문제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아프리카에 가서 문제, 질병, 징후를 가지고 와야 하며 내부에는 물론 백신도 해독제도 없다. 자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자멸하는 곳 벼랑도 영화에서는 국내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막이나 절벽의 품새는 이곳이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이 고아 텍스트는 자신만의 큐브 놀이나 게임에 과몰입하는 소년처럼 외부의 콘텍스트 대신 자신의 콘텍스트, 흡혈과 수혈이 그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자신의 방, 자신의 미장센, 자신의 세트를 만든다. 과몰입과 중독, 여기에 창궐하는 것이 섹스와 폭력에 대한 판타지다. 이종과 틈입의 판타지. 미술, 아트디렉팅이 중요해진다. 외부를 안으로 끌어들여오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영화의 후반, 한바탕 영화를 지배하던 미술의 개념이 어지럽고 사이키델릭한 데서 병원과 같은 백색으로 바뀐 뒤 거실에는 카메라와 TV 모니터가 설치되고 여기에서 집 밖 골목이 지속적으로 관찰되기 때문에 이러한 감시 화면이 어떤 방식으로든 텍스트에 들어오리라고 생각하나 사용되지는 않는다. 영화적 폐쇄 회로인 것이다.
노이즈와 명품 마케팅을 뒤섞은 대표 사례
행복한복점이 이 집 적산가옥 일층의 쓰임새이긴 하지만 한복은 원색 의상들의 변주를 가능하게 만드는 채널이며, 시침 따는 도구를 송곳 이빨(팽) 대신 제공해주는 장치다. 태주가 신나서 괴력을 와이어 액션으로 시험해보는 주택가가 뒤섞인 도심장면은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지만 그 영화가 전통 고수를 엉뚱하게 상상함으로써 신화와 역사의 경계 판타지를 건드리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최근 개봉된 영화 <트와일라잇>에서 17살 소녀 벨라는 뱀파이어인 에드워드를 만나 나무 위로 비상한다. 뱀파이어의 초능력으로 위로 날아오르는 데 비해 <박쥐>에서 태주와 상현은 하강한다. 비상은 없다.
이렇게 과몰입된 고아 텍스트. 빌려온 문제 자체가 판타지의 근간이 되는 문화 생산물의 탄생은 한국 영화사나 문화사에 어떤 새로운 징후다. 재현이 인덱스나 현시와의 관련을 부정하는 상황. 글로벌한 디지털 영상 문화의 유비쿼터스한 습격이기도 하다. 노이즈와 명품 마케팅을 뒤섞은 대표 사례기도 하다. 마케팅은 소망과 욕망이 뒤섞인 언어 혹은 소음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우린 빌려온 지옥을 보고 싶은 것인가? 이곳, 이 지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이것은 전도된 구원일까 아니면 도피일까. 기자 시사회 등에서 충분히 지적된 영화의 유머와 웃음이 일반 상영에선 얼음장 같은 침묵으로 화답되는 것을 보고 해보는 질문이다. 습격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홍보를 포함하는 이러한 종류의 새로운 영화를 충분히 다룰 만한 비평적 장이 부상하지 않고서는 노이즈 마케팅의 요동과 소란을 당해낼 재주가 없을 것이다. 솜씨 좋고 재주 많은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