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박찬욱 단독인터뷰] <박쥐>가 난해하다는 건 정말 인정 못 하겠다
2009-05-26
글 : 주성철
박찬욱 감독 단독인터뷰… 아름다우면서 추하고 슬프면서 웃기고 성스러우면서 천박한 게 좋아

<박쥐>는 인터넷상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10점 만점의 평점으로 보자면,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10점 관객과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0점 관객이 거대한 전쟁을 벌였다. 그 사이 <박쥐>는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소식을 전하며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 자신은 애초의 예고대로 일체의 매체 인터뷰를 거절하며 속시원한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칸영화제로 떠나기 전날이자 <박쥐>가 180만 관객을 돌파한 5월12일 극적으로 단독 인터뷰가 성사됐다.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이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해, 박찬욱 감독으로서도 날이 밝은 줄 모르고 자다가 등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번쩍 눈을 뜨던 영화 속 뱀파이어 상현(송강호) 같은 기분이지 않았을까. 칸에서 입을 턱시도 등 의상문제로 파주에서 서울로 와야 했던 그는 운전을 하지 않기에 홀로 한참이나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학생처럼 가방을 메고서 장충공원 근처의 인터뷰 장소로 왔다. 영화를 둘러싼 오해와 더불어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편하게 수다로 늘어놓고 때론 진지하게 풀어놓으며 그는 <박쥐>에 대해 상세한 ‘코멘터리’를 들려줬다.

-먼저 칸 경쟁부문 초청을 축하한다. 이번 경쟁부문은 유례없이 화려한 명단을 자랑한다.
=불과 2년 전에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크리스티안 문주가 포함 안된 건 놀랐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무조건 경쟁부문 확정이라는 얘기가 일찌감치 돌았었는데 결국 안됐다. 물론 관객으로서 보고 싶은 영화들이 많다. 타란티노 영화는 꼭 보고 싶은데 그 스크리닝 시간에 여행 계획을 잡아서 못 볼 것 같다. (웃음) 그전에 시사를 통해 봐야 할 것 같다. 미카엘 하네케 영화도 너무 보고 싶고 알랭 레네의 영화는 이전 영화 <마음>(2006)이 너무 좋아서 정말 궁금한 영화다.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는 제목이나 내용적으로 <박쥐>처럼 종교적인 느낌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궁금하다. 포스터가 장난 아니라던데 아직 못 봤다.

런닝타임이 긴 이유는 친절한 설명 위해서

-인터넷 얘기부터 해보자. 인터넷 반응들은 좀 살펴보는 편인가? 현재 <박쥐>는 0점을 준 사람과 10점을 준 사람의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 형국이다.
=그 강도가 세서 놀랐다. 숫자로 따지면 그래도 몇만, 몇 십만명은 아닐 테니 ‘대세’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격렬한 목소리만 두드러지게 보이는 거라서, 이들이 소수나마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또 고작 영화 한편 가지고 재미없다고 하면 그만인데 왜 화까지 내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10점 만점으로 얘기할 때 사실 나는 차라리 6점, 7점 그렇게 주는 사람이 더 싫다. (웃음) 코멘트를 남겨도 평작이니 범작이니 하는 소리가 더 싫은 거다. 그래서 나에게 진짜 상처를 주고 싶으면 그렇게 얘기하면 된다. ‘나에게 상처를 주려면’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영화 싫다’보다 ‘박찬욱이 싫다’는 전제가 더 많아서다. 차라리 1점보다 6점에 더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할까 그런 생각도 해봤고. 아 그리고, <박쥐>가 난해하다는 것만큼은 정말 인정 못하겠다. 취향이 다른 거지 이해 자체를 못하는 건 아닐 거다. 이 영화가 유례없이 러닝타임이 긴 이유가 다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위해서다. (웃음)

-그래도 <디 워> 때처럼 기자나 평론가들을 향한 네티즌의 일방적 공격 양상은 아니고, 서로 다른 집단의 네티즌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박쥐>를 욕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고맙지는 않지만 그래도 밉지는 않다. 일단 내 영화의 유료 관객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열을 내는 것도 일단 감각기관을 열어두고 영화 자체를 확 받아들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부감도 더 큰 거니까. 그건 적극적인 관람 태도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고 본다. 게다가 욕을 하더라도 엄청 길게 쓰는 사람들 보면 대단한 것 같고. 또 내 영화가 늘 그랬지만 이것 때문에 싫다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 때문에 좋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인터넷 반응이 걱정되는 건 그런 평점들을 보고 영화를 볼까 말까 결정하는 소극적인 관객이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사실 걱정도 많이 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요즘 마누라랑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그거다. 영화 속 이난영의 노래 가사처럼 “생각을 말어야지. 생각해서 무얼 하나.” (웃음)

-<박쥐>는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로 인해 이전 옴니버스영화로 만든 <컷>과의 연관성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도 역시 <박쥐>는 당신 마음속의 프로젝트였다.
=물론 그때도 만들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강호씨에게 <공동경비구역 JSA> 당시 그런 얘기를 하자고 들려준 이후 <컷> 촬영시까지 발전된 건 없었다. 그때는 그냥 신부 겸 의사였다. 아프리카 갔다 오고 그런 건 있었는데 <테레즈 라캥>은 결합되기 전이었다. 그때 내가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다면 그걸 반영해서 <컷>을 만들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염정아를 뱀파이어로 만들면서 ‘이게 나중에 만들 <박쥐>와 큰 연관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은 그때도 했던 것 같다. 그때도 지금도 ‘양수기로 피 뽑는다’ 그런 표현이 똑같이 있었던 건 당신이 말해줘서 알았다. ‘그랬었나?’ 했지.

<테레즈 라캥>은 꼭 따로 만들고 싶었던 작품

-그럼 <테레즈 라캥>은 애초에 <박쥐>와 완전히 별개로 존재했던 작품이란 얘긴가.
=그렇다. <테레즈 라캥>을 읽으면서 <박쥐>를 떠올린 게 아니다. 상현 캐릭터를 오래전에 제일 먼저 만들고 뱀파이어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있었지만, 그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 여성을 누구로 할지 계속 고민했다. 그 상대 여성으로 여러 인물들을 만들어봤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안수현 PD가 <테레즈 라캥>과 합해서 해보자, 안될 게 뭐 있나, 라고 묻기에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했다. 따로 하지 말고 그냥 합치자는 거였지. 난 그때만 해도 <박쥐>와 <테레즈 라캥>은 두편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테레즈 라캥>은 현대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로 꼭 따로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다.

-첫 장면의 시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이 이전의 당신 영화들과 참 다른데, 혹시 흑백영화 같은 효과를 주려고 한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복수는 나의 것> 때 2부 같은 느낌을 주는 동진(송강호)의 이야기 전체를 흑백으로 완성하려 했던 것처럼. 가령 당신 영화 전체에서 가장 흑백 화면이 어울리는 작품이 <박쥐>인 것 같다.
=처음에는 관객을 좀 오도하는 느낌도 주려 했다. 그런 영화인가? 싶게 음악도 그렇게 시작하지만 바로 다음부터 “당근이죠” 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몸도 성하지 않은 사람이 막 수다를 떠는 장면이 나온다. 관객을 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거지. 굳이 관객에게 착각을 주려고 했다기보다 그냥 그 자체가 오프닝으로서 괜찮은 시작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름대로 어울리는 오프닝으로 봐주면 좋은 거지. 가령 <복수는 나의 것> 때처럼 예전에는 그런 마음, 그러니까 영화광적인 마인드로 흑백으로 만들거나 또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는데 지금은 좀 달라졌다. 나중에는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음악의 느낌이 좋다. 이난영과 남인수의 트로트를 선곡한 이유는.
=늘 함께하던 스탭들과 했지만, 그들과 여러 편 계속하는 가운데 <박쥐>에선 조영욱 음악감독과 함께한 음악적 부분이 가장 발전한 것 같다. 단순히 듣기 좋은 멜로디뿐만 아니라 여러 시도를 했는데 강우를 죽이는 장면에서, 보통 한국영화에서 나는 물론 아트하우스영화가 아니고는 잘하지 않는 현대음악적인 요소들을 적극 끌어들였고, 태주가 승대와 영두를 죽이는 장면에서는 영화에서 문짝이 넘어지고 태주가 ‘사장님~’ 하면서 문을 똑똑 두드리는 노크 소리 같은 폴리 사운드를 영화음악의 한 부분으로 차용했다. 그거 하나하나 맞추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바흐뿐만 아니라 이난영과 남인수의 노래도 엄청 좋아하는데 원래 각본은 이난영의 <고향>이 카스테레오로 크게 울려퍼지면서 끝나는 걸로 돼 있었다. 그런데 “그만 좀 하세요” 그러면서 워낙 반대가 심했다. (웃음) 그래서 카스테레오 음악은 많이 죽이고 결국에는 바흐가 이겼다. 그리고 이난영의 노래가 크면 그로테스크해진다는 느낌도 있었고, 무엇보다 라스트에서 너무 라 여사의 승리로 끝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다. 말하자면 <박쥐>의 라스트는 바흐와 이난영의 전쟁이었는데 결국은 관객을 배려해서 바흐의 승리로 끝났다. 이처럼 너무 이상한 영화가 되지 않게 하려고 관객을 배려했는데 거 참. (웃음)

행복한복집의 풍경은 한국적인 잡스러움

-주인공이 거주하는 행복한복집 건물이 인상적이다. 일본식 가옥에 한복집이 있고, 보드카와 트로트가 공존하며, 독특하게 마작이 벌어지는 판에 또 필리핀에서 시집 온 여자도 있다.
=<박쥐>가 사실성이나 지역성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아니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사실성과 지역성이 오히려 어떤 다른 한국영화보다 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낯선 방식이긴 하지만. 지방 소도시에 일본식 적산가옥이 있고 한복집이 있는 건 매우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우리 세대 어른신 중에는 마작하는 사람 많았다. 특히 영화판에는 더 많았다. 그리고 보드카는 알코올중독자들의 대표적인 술이고 필리핀에서 수입된 색시라는 것도 요즘 한국사회에서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다. 순수한 한국적 모습 그런 건 아닐 수 있지만 한국적인 잡스러움이랄까,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또 가장 이질적인 존재인, 심지어 ‘병균’이라 호칭되는 남자 뱀파이어가 들어온다. 더군다나 그것도 외국에 가서 알 수 없는 피를 이식받아온 사람이다. 내 눈에는 그렇게 어딘가 폐쇄적이고도 잡스러운 한국사회가 더 자연스럽다. 성모상과 불상이 한데 있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그런 집 말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신하균이 후반부에 입고 있는 셔츠를 보고 “얼핏 보면 정말 시장통에서 파는 싸구려 셔츠인데 그 오묘한 색깔들을 보면 그냥 베르사체 제품이라 해도 사람들 믿을 거야”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런 것처럼 그런 경계들을 지우고 싶다는 말로도 들린다.
=확실히 그렇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숭고한 것과 천박한 것, 슬픈 것과 웃긴 것, 그런 것들이 순수하게 하나의 요소만 취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서로 구별되기 힘들다는 게 어쩌면 내가 추구하는 무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한 것도 있고 그렇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한 것, 슬프면서 동시에 웃긴 것, 성스러우면서 동시에 천박한 것, 그런 게 좋다.

송강호 연기의 리듬감은 압권

-영화는 은근히 웃긴 장면들이 많다. 당신이 영화에서 부조리한 웃음을 주려 하거나, 심각함과 정말 종이 한장 차이로 존재하는 우스꽝스러움을 주려고 할 때, 송강호는 그걸 정말 잘 풀어주는 배우다. 일찍 낮부터 만나자고 하는 태주에게 “낮에는 좀” 하거나, 피를 마시고 난 뒤 거울을 이리저리 보는 행동들, 그렇게 배우 개인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얻게 되는 효과 말이다.
=맞다. 송강호는 시나리오에서 표현되기 힘든 유머들을 잘 만들어낸다. 그 배역에 맞춰서 자기가 창조해내는 몸놀림도 정말 재밌다. 그건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들이다. 웃음을 만들어내는 리듬감이 뛰어나다. 송강호 연기력의 여러 부분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난 그 리듬을 꼽고 싶다. 특히 “낮에는 좀” 하는 건 너무 웃겨서 스탭들 사이에서 유행어였다. 누가 무슨 영화 보러 가자 그러면 “그 사람 영화는 좀…” 뭐 그런 식으로 다 쓰고 다녔다. (웃음)

-그러고 보니 당신은 송강호를 <복수는 나의 것> 이후 계속 작은 역할이라도 출연시키려고 했었다. 직접적으로 <친절한 금자씨>에 나왔지만 <올드보이> 코멘터리를 들으면 이승신이 맡았던 점성술사 역할을 맡기려고 했었다는데.
=맞다. 그랬던 것 같다. 근데 왜 안 했었지.

-점성술사로는 뭔가 신비로운 여자가 어울린다며 최민식이 절대 반대했다고. (웃음)
=그랬을 거다. (웃음) 뭔가 팜므파탈 같은 느낌의 중년 여인이 하는 게 영화가 상상력을 발휘하는 측면에서 더 좋은데 송강호와 그렇게 마주하면 절대 아니라고 했었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데, 상현의 성기 노출이 필요했던 이유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성기 노출 장면을 클라이맥스라 볼 수도 있다. 어쨌건 상현이 여자 신도를 강간하려 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발기 상태가 아니고 또 여자 신도가 그대로 바지를 입은 것도 의도했던 거다. 그래서 다들 명확하게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관객도 있더라. 상현의 불안정하고 혼란스런 마음에서 할 수 있는 극단적인 행동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비뚤어진 신앙에 대해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려고 하는 행동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신부 그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성기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당신 영화에서 송강호는 늘 누군가를 때린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신하균 위에 올라타서 무시무시하게 후려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이영애의 배를 사정없이 여러 번 걷어차고, <박쥐>에서는 김옥빈의 머리채를 내려친다. 상대 배우 얘기 들어보면 거의 진짜로 때린 거라더라.
=때리는 것도 진짜로 때려야 사실감을 얻는 앵글이 있다. 묘하게 송강호의 그런 장면들은 정말 진짜로 때려야 사는 앵글이었다. 대신에 그때마다 절대 NG는 안 냈다. 상대 배우로서는 그게 가장 고마운 거다.

-지금껏 송강호는 제대로 된 멜로영화나 베드신을 한 게 없다. 그나마 기억나는 장면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배두나에게 전기 충격을 주려고 귀를 빠는 장면이 가장 진한 스킨십이었다. 그때 “말해 이 씨발년아” 그러는데 <박쥐>에도 태주에게 그렇게 대하는 장면이 있다.
=맞다. 나도 시나리오에 써놓을 때만 해도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리허설을 하면서 리딩을 하는데 딱 그 장면 생각이 나더라. ‘또 비슷한 상황이 왔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맥락이나 연기톤은 좀 다르니까 그냥 가자고 생각했지. 생각해보니 <복수는 나의 것> 때 두나가 몸서리를 칠 정도로 정말 징그러운 장면이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를 거치면서 여러 조연들을 포함해 송강호와 신하균, 정정훈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박현원 조명감독, 조영욱 음악감독 등 ‘늘 하던 사람’과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번에는 가장 다른 인물이 김옥빈이다.
=사실 처음부터 자기나 나나 서로 겁을 많이 먹었다. 촬영 전 풀어가는 단계에서 단둘이 시간을 많이 보냈다. 대사 한줄 한줄은 물론 말이 없는 장면에서도 어떻게 할지, 뛸 때 어떻게 뛸지, 또 숨을 고를 때는 어떻게 할지 다 정해놓고 촬영에 들어갔다. 정말 오래도록 개인교습을 한 거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가르친 게 아니라 자기도 설정을 해와서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만들었다. 그래서 사실 현장에서 따로 뭘 할 건 없었다. 이렇게 새로운 인물이 들어와서 오래도록 만들어간 건 <올드보이> 때 유지태 이후 처음이다. 이번에도 거의 그때만큼 한 것 같다. 지태는 자기 욕심이 많아서 나하고 약속 안 잡았는데도 불쑥 사무실에 찾아오기도 해서 연습을 많이 했다면, 옥빈이하고는 약속을 딱 정해서 정말 ‘일’처럼 했다.

나는 늘 가장의 애환을 그렸다

-송강호도 그렇지만 비중있는 만남으로 신하균과도 참 오랜만이다.
=<박쥐>를 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신하균, 김해숙은 좋았다는 얘기가 꽤 되더라. (웃음) 하균이는 사실 역할이 조연이라 내가 말을 못 꺼내고 있었는데, 강호씨가 뭐 말이야 못 해보겠냐고 해서, 거절할 걸 걱정하면서 솔직하게 조심스럽게 부담없이 대답하라고 하면서 얘기를 했다. 강호씨도 가족들하고 해외로 휴가 가서까지 국제전화로 “야 같이 놀자, 내가 옥빈이 데리고 거기서 뭐 하겠니, 너라도 있어야지” 그런 농담도 하면서 권유를 했다. (웃음) 물론 아주 만족한다. 하균이는 정말 표현력이 풍부한 배우로서 <지구를 지켜라> 이후 오래간만에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송강호와 김옥빈이 관계를 가질 때 상상장면으로 그 사이에 신하균이 끼어 있는 장면의 느낌이 좋았다. 가운데에 여자가 있고 위아래에 남자가 있는, 이른바 포르노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위이기도 하고. (웃음)
=사실 가운데 신하균도 옷을 벗고 촬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충격의 강도가 셀뿐더러 심의 등급이 나오지 않을까봐 하균이에게 옷을 다 입혔다. 그래서 아무 문제없이 심의도 통과했고(웃음) 보기에도 포르노처럼 보이지 않는다. 웃기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해서 만족스럽다. 자세히 보면 그 장면에서 하균이가 물과 송사리를 입에 머금고 있어서 송강호가 뒤에서 누를 때마다 입에서 송사리가 뽁뽁 하나씩 튀어나온다. 근데 그게 잘 보이지 않아서. (웃음) 그 신은 정정훈 촬영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정정훈이 워낙 혼자 주절주절 실없는 소리를 잘한다. 열 마디 던지면 한마디 정도 통하는 실없는 소리의 왕자인데, 그 장면이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열개 중 하나 채택되는 건 상당히 아이디어가 풍부하다고 봐야지.

-태주는 왜 승대가 아닌 영두와 잤나.
=태주가 상현을 만나기 전에 승대와도 이미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집안에서 승대가 계속 그런 음탕한 눈길을 보내는 게 혼자 그러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태주가 그 시선을 무조건 징그럽다고만 느끼지 않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심지어 라 여사는 승대를 좋아하니까 영두는 정말 허를 찌르는 인물이다. 그런데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그 직후에 태주의 몸에서 냄새를 맡는 상현의 모습을 위해 필요했다. 상현은 뱀파이어가 된 뒤 점프나 근력, 청력까지 초능력이라 뭉뚱그릴 수 있는 초감각을 얻게 된다. 그런데 얼마나 병신스럽나. 슈퍼히어로가 가질 법한 그런 초능력을 고작 아내의 사타구니 냄새를 맡으려 애쓰며 ‘바람’을 의심하는 용도로 쓰는 거다. 그건 또한 가장의 애환이기도 하다. 강우가 죽은 다음에는 거의 상현과 태주가 부부처럼 느껴지는데 그들의 비밀이 폭로될 때 태주가 비명을 지르고 안기고 그럴 때 상현이 보여주는 표정이 바로 그런 가장의 애환을 담고 있다. <컷>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인데, 언제나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내 영화는 대부분 가장의 애환을 그린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김지운 감독은 알 수 없는 그런. (웃음)

상현이 태주 피를 빠는 부감숏이 최고의 컷

-<박쥐>는 종교적 무드가 강하다보니까 전지적인 부감숏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주로 흡혈의 순간에 쓰이고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오히려 별로 안 쓰려고 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오르간 음악 많이 쓰는데 그런 거 피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래도 효과적으로 뭔가 보여주려고 할 때는 명확하게 썼다. 가령 태주가 피를 토할 때는 그런 앵글이 효과적이니까 쓴 거다. 그것 말고는 상현이 태주를 목 졸라 죽이고 나서 그 위에 올라타서 피를 빨 때 부감숏으로 넓게 찍은 장면이 기억난다. 그것 역시 그 시점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성격 때문은 아니고, 갑자기 클로즈업 위주로 이뤄지던 신에서 객관적으로 지금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이 어떤 성격인지를 감정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다가 순간 허기를 채우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의 피를 빠니까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최하, 최악의 처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다. 난 그게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박쥐>에서 단 한컷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그 장면이다. 음악도 고조되면서 이 남자의 행동과 자세가 가장 사악하고 부도덕하게 보일 수 있는 앵글을 찾은 거다.

-원래 닭살스러운 거 좀 싫어하는 편 아닌가. 그런데 <박쥐>는 멜로영화라 어쩔 수 없이 그런 장면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령 <복수는 나의 것> 엘리베이터 장면에서 이미 죽어버린 배두나 손을 신하균이 지그시 잡아주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그것도 당신은 닭살스럽다며 그렇게 빼자고 했다가 다른 사람들이 만류해서 넣었던 것으로 안다.
=맞다. 그렇긴 한데(웃음) <박쥐>에서는 상현이 태주를 밤거리에서 만나 가로등 아래서 말없이 자기 구두를 신겨주는 장면이 가장 닭살이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유치하다고 계속 빼라고 했던 거다. (웃음) 태주는 어려서부터 맨발로 뛰어다니기 좋아해서 굳은살 박히고 발꿈치 갈라지고 그런데, 상현이 태주 발을 씻겨주는 건 가톨릭에서 교황이 평신도 발을 씻겨주는 그런 데서 온 거니까 뭐 그렇고, 하여간 그 장면만 그렇게 하나 남았는데 딱히 낭만적으로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나로서도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웃음)

-노신부(박인환)는 상현에게 아버지로 느껴진다. “어렸을 때 의대 가라고 했잖아”, 그런 대사를 보면 확실히 어려서부터 돌봐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고. 게다가 그렇게 존경받는 눈먼 노신부가 뱀파이어가 돼서 밤바다라도 보고 싶다고 갈구하는 모습이 어쩌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처럼 느껴졌다. 신앙심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구와 갈증(thirst) 같은.
=상현에게는 노신부가 아버지고 태주에게는 라 여사(김해숙)가 어머니다. 특히 그런 상현에게 “(내 피를) 드세요”라고 팔을 내밀 때는 정말 박인환 선생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허진호 감독의 <행복>을 보면서 재발견했고 그 영화 뒤풀이 자리에서 꼭 모시고 싶다고 출연을 부탁드렸었다. 그런데 뱀파이어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노신부를 보면서 상현은 거기에 실망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근본적인 좌절감을 느꼈기에, 노신부를 죽일 때는 일말의 동정심도 안 느낀다.

송강호, 이제는 형제같이 느껴져

-혹시 생각했던 다른 결말도 있나.
=원래 <박쥐>가 <테레즈 라캥>과 합쳐지기 전에 상현을 호스피스 병동을 관리하는 신부로 설정한 이야기도 있었다. 신자들만 입원하고 모두 죽음을 기다리는 신자들인데 그들을 전부 뱀파이어로 만드는 거다. 일부 신자들에게는 새 생명을 얻는 일이기도 할 거다. 상현이 미사에서 성채를 나눠주는데 그때 자기 피를 나눠주는 거다. 그렇게 뱀파이어의 미사가 끝나고 나면 수십명의 뱀파이어들이 거리로 나가는 거다. (웃음)

-당신 영화에서 신적인 존재들은 늘 부자연스럽다. <복수는 나의 것>의 강가신에서 등장한 류승범이 그런데, 살인 등 모든 일이 이미 끝났을 때 뒤늦게 찾아오고, 전지전능하다고 얘기하지만 정작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한다. 게다가 여자아이를 구해주는 것 같더니 목걸이만 쏙 빼내갈 정도로 잔인한 존재가 신이다. 이번에 노신부가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노신부도 그렇고 라 여사도 그렇다. 마지막에 싸늘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라 여사에게 그런 느낌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 영화 속 그런 사람들은 늘 몸이 불편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신부와 라 여사 모두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니까. 게다가 노신부는 앞도 보지 못한다. 그렇게 노신부와 라 여사를 한쌍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

-<박쥐>가 자신의 가장 자전적인 영화라는 얘기는 줄곧 했다. 그런 점에서 <박쥐>는 다른 영화를 끝냈을 때와 기분이 많이 달랐나.
=상현이 내가 창조한 여러 인물 중 나와 가장 근접한 건 맞다. 그런 점에서 나와 외모나 성격이나 전혀 다른 강호씨가 해줬다는 게 묘한 기분이 든다. 특히 상현이 화장실에서 궤변을 늘어놓을 때의 비굴한 모습들, 또 태주가 “나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라고 할 때 피는 자기가 구해준다며 자기가 피를 공급받은 사람들에 대해 “다 편하게 죽음을 맞이한 거 같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려는 상현의 모습은 정말 내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상현은 절말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다.
=화장실에서 이 여자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정반대되는 얘기를 그 합리화의 논거로 끌어들이는 모습. “뱀파이어라서 싫어요?”라고 시작했다가 “내가 뱀파이어가 아니어도 당신을 사랑했겠어요?” 그렇게 바뀌고. <박쥐>에서 가장 좋은 대사를 꼽으라면 특정 문장이 아니라 그 화장실에서 상현의 대사 전체다. 그래서 어떤 느낌이냐면, 웃기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강호씨에 대해서 친밀한 마음이 더 생겼다. 더이상 친할 수 없을 만큼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더 친해졌다. 예전에는 친한 친구 같았다면 이제는 형제 같다고나 할까. 이거 마지막에 커밍아웃으로 끝나는 건가? (웃음)

사진제공 모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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