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하정우] 저는 생활형 배우랍니다
2009-06-01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보트>의 하정우

‘너무 자주 본 배우.’ 하정우는 그런 배우다. 그의 영화는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암상자의 공 같다. 색깔도 숫자도 가늠할 수 없는 이 공들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 누구도 짐작하기 힘들다. 종횡무진은 이제 하정우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스타일’이 돼버렸다. 새 영화 <보트>로 그가 또 한번, 자신의 스타일을 살찌웠다.

참 별난 배우도 다 있다. 하정우는 <보트>를 두고 대뜸 ‘휴식 같은 영화’라고 말한다. 내가 알기로 한국과 일본이 절반씩 투자하고 영진위의 지원금까지 합친 <보트>는 그리 호락호락한 영화가 아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작가 와타나베 아야가 극본을 썼다면 디테일한 캐릭터 묘사가 먼저 떠오르는데다, 청춘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을 만든 김영남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점으로 미뤄볼 때 배우들의 감정 역시 농도가 다분히 짙어 보인다. 그런데 그는 이 영화에 대해서 “<추격자>와 <멋진 하루>로 쉴 틈 없이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한해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휴식 같은 영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건 분명 오만하게 들린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다분히 논리적이다. <보트>의 개봉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하정우는 <미녀는 괴로워>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의 차기작인 블록버스터 <국가대표>의 가을 개봉도 앞두고 있다. 인터뷰 전날에도 <국가대표>의 포스터 촬영으로 하루 종일 한강에서 포스터컷을 찍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리고 인터뷰가 있는 바로 지금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로 볼 때 대박 흥행이 될 것이 분명한, 하정우가 출연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극장에 걸려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개봉 행진은 하정우에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2년 영화 <마들렌>으로 데뷔한 이래, 7년 동안 벌써 17편에 출연했다. 그의 이름을 내건 영화가 생산되는 속도는 마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초콜릿 생산처럼 일사불란하고도 지속적이다. 그는 한편을 하고서 숙고 끝에 또 다른 작품을 토해내는 숙고형의 배우가 아니다. 선택은 민첩하고 행동은 발빠르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작품을 하면서 휴식을 찾지 않는다면 과부화에 걸려 폭발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다.

하정우는 <보트>에서 7살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버림받고 일본 마약 밀매상에게 길러진 형구를 연기한다. 그는 자신이 배달하는 것이 마약인 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일만 하는 순진한 남자를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마약 대신 여자를 납치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순간, 그는 함께 마약을 전달해온 남자 토오루(쓰마부키 사토시)의 권유로 조직을 배신할 엄청난 계획을 세운다. 노모와 애가 셋이나 딸린 동생을 돌보는 토오루를 보면서 자신을 반추하는 역할. 긴 호흡과 내레이션으로 점철된 이 영화에서 그가 찾은 휴식은 무엇이었을까.

“항상 새로웠다는 점요. 전 지루한 건 체질적으로 못 견디거든요.” 두달간의 일본 촬영, 일본 스탭들과의 교류, 일본 배우와의 호흡. <보트>의 촬영 시스템에는 어느 것 하나 진부함이라곤 없었다. 모든 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감독님과 상대역인 쓰마부키 사토시와 매 장면을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가면서 찍었어요. 통역 시스템을 잘 활용해서 감탄사, 토씨 하나까지 빼먹지 않고 모두 소통하는 것이죠.” 작가인 와타나베 아야가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현장. 대사 하나하나에서 한국과 다른 일본적인 표현을 조율하는 과정이 어렵지만 기분 좋은 숙제처럼 다가왔다. 경험이 쌓이고, 교류가 오가는 이 생소한 현장에서 그는 배우로서 모아야 할 재산을 조금쯤 불린 것 같아서 솔직히 많이 행복했다. “물론 작품하면서 이렇게 비즈니스적인 측면만 내다보고 한다면 그건 너무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거겠죠. 그렇지만 전 여전히 학생 같은 마인드가 강한가봐요. 여전히 신인인 것 같고, 배우는 게 좋아요.”

하정우의 그치지 않는 에너지, 그 해답은 이 한마디에 다 함축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양천수 화백’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조각가 ‘조창우’가 마치 자신이기라도 한 듯, 그는 작품 하나하나에, 그걸 통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극히 깍듯하다. 그는 영화를 업으로 삼은 프로 직업인이라기보다 맹목적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학생에 가깝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래서 문어발식으로 산발적으로 뻗어나간다. <용서받지 못한 자>로 그가 처음 칸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내 눈에 비친 그는 다분히 계산적이고 똑똑한 젊은 배우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자면 오히려 그는 셈을 잘하지 못하는, 제대로 된 계산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많이들 그래요. 하정우라는 배우는 종잡을 수가 없다고. 상업영화와 인디영화 둘 중 어느 하나는 포기하고 이제 중심을 잡으라고요. 그래야 안 망한다고. 그런데 벌써부터 중심을 잡아서 뭐하겠어요. 전 아직 젊은데.” 결과를 점치고, 손익을 따져야 할 시간에 그래서 그는 결정하고 실행한다. 후회는 하고 나서의 일일 뿐이다. 한·일 합작이라는 생소한 시스템에 선뜻 오케이를 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으면 감독님께 직접 역할을 달라고 졸라도 본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과 김기덕, 이윤기, 나홍진 감독처럼 그와 연달아 작품을 하는 감독들의 신작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이젠 신인감독들도 적극적으로 만나보고 싶어요. 오는 시나리오만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나리오는 제가 직접 찾아가는 거죠.”

이 배우의 계획은 원대하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차라리 하루하루 다음 일을 결정하고 쉬지 않고 매진하는 ‘생활형’에 가깝다. 작품 한편 한편 벽돌을 쌓기보다 쌓아놓은 벽돌을 세차게 무너뜨리는 습성 덕에 그에게선 여느 배우에게서 볼 수 있는 확고한 캐릭터도 스타성도 찾아볼 수 없다.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선택을 거듭함으로써 스스로를 톱의 위치로 끌어올린 그가 부럽다. “뭐든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그래도 이 모든 과정에서 역시 남는 건 사람이에요. 이번에도 쓰마부키 사토시와 친구가 됐어요. 한국에서 2박3일 동안 만났는데 같이 술집을 한 20곳은 간 것 같아요.” 생활형 배우의 일상 이야기로 이번 인터뷰는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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