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여운계가 잠들었다. 병명은 폐암. 최근까지 KBS 아침드라마 <장화, 홍련>에서 변 여사 역할을 맡았던 그는 중도하차한 뒤, 투병생활을 해왔으나 결국 지난 5월22일 69살을 일기로 영면했다. 여운계는 이미 2007년 9월 신장암으로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 하차했으며 이후 석달 동안 치료를 받은 뒤,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KBS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로 복귀한 바 있다. 고인의 남편인 차상훈씨는 “아내는 수술 이후 제주도로 요양을 갔는데 자꾸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며 “이후 병을 숨긴 채 드라마 출연 제의에 승낙했는데, 그런 일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1940년생인 여운계는 지난 1962년, 이낙훈, 이순재 등과 창립한 실험극장을 통해 본격적인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같은 해 TBC 특채로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한국 최초의 일일 연속극인 <눈이 나리는데>로 브라운관에 등장했다. 본인 스스로 “아줌마 소리를 듣기 전에 할머니 소리부터 들었다”고 밝히듯 여운계는 젊은이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노역들을 주로 연기했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는 극중 하희라의 세 할머니 중 맏언니를 연기해 웃음을 선사했다. 손녀딸을 위해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청춘의 덫>의 윤희 할머니와 <내 사랑 누굴까>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던 시할머니도 있다. 노역을 도맡았던 이유에 대해 그는 지난 2006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 내 자신을 너무 잘 알았어요. 당시에는 노역 배우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난 20대에 주름을 그리고 노역을 한 거예요. 속상하지 않았냐고요? 많이 분했죠. (웃음)”(<씨네21> 540호 김혜리가 만난 사람)
최근작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작품은 드라마 <대장금>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연기한 수라간의 최고상궁인 정 상궁은 실제 여운계의 모습과도 많은 부분이 겹치는 인물이다. <대장금>의 각본을 집필한 김영현 작가는 말한다. “실제로도 잔정이 있거나 사근사근하신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의연한 모습으로 배우와 스탭들 사이에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셨다. 작가보다 더 대본을 좋아하셨는데, 대사 하나하나를 곱씹어서 이야기해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마파도>를 함께한 추창민 감독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함께 출연하신 선생님들 사이에서 반목이 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느 한곳을 편들지 않으시면서 보이지 않게 추슬러주셨다. 극중에서 연기하신 회장댁 모습 그대로였다.” <대장금>에서 정 상궁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나는 궁에서만 산 것이 억울하다. 그러니 구름 위에 뿌려다오. 비가 되어 흘러 흘러서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며 세상구경이나 하고 다니련다.” 죽는 순간까지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던 정 상궁처럼 여운계는 그렇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