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순교’라 불렀다.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선 사내 상현(송강호)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상흔과 지역감정의 늪에 빠진 우리 정치현실을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괴로워했다. 그때까지 그는 세무공무원이던 형과 ‘환상의 복식조’를 이뤄 걱정없이 살던 평범한 변호사였다. 어느 날 그는 부산의 이른바 ‘부림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한 청년들의 바스러진 육체를 보며, 이 한몸 바쳐 이 나라 정치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해 상현은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눈앞에 임박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세번이나 정치적 사망의 문턱에 이르는 상황에 놓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내에게 수혈해준 것은 평범한 민초들이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노란 깃발’을 들어 그 남자를 응원했고, 그들의 열정을 쏟아부어 그 사내에게 수혈했다. 되살아난 그 남자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쥔 ‘절대자’가 됐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상현은 사람들의 기대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평화’의 외침을 거부하고 이라크에 파병했고,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펼치던 평택의 노인들을 내몰았으며, 부동산 값을 폭등시켰고, 마침내 전 국민의 어깨에 한-미 FTA라는 버거운 짐을 지웠다. 그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며 친구의 부인(김옥빈)과 몸을 섞었다. 둘의 모진 폭주로 이 나라의 부동산 값이 폭등했으며, 내집 마련을 꿈꿨던 서민들의 꿈은 깨졌다. 그리고 마침내 더이상 넘지 말아야 할 한-미 FTA의 강을 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그가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그 남자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사람들은 상현을 흡혈귀라 부르기 시작했다. 상현의 부인이 20년지기 친구에게 생활비 도움을 받았고, 그의 아들과 조카사위는 50억원 규모의 투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게 범죄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를 미워했던 사람뿐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도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 남자는 다시 한번 자신을 버렸다. 그를 따르던 무리의 한 여성을 범한 뒤,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했다. 그리고 “더이상 나는 당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어느 고요한 새벽, 집을 나와 고향 마을 ‘박쥐 바위’에 올라 그동안 그가 만들어낸 삿된 ‘그것’과 함께 이른 아침 서늘한 태양을 받았다.
그의 살이 타는 냄새로 온 땅이 진동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비로소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마지막 희생임을 알았다. 검은 상복에 국화를 든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중에 발견된 유서에서 그는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