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석이 달린다. 달리기 하나로 500만 관객을 숨죽이게 했던 <추격자>의 김윤석이 또 달린다. 새 영화 <거북이 달린다>에서 그는 혼자 탈주범 잡겠다고 용도 쓰고 화도 내고 머리도 써보는 시골 형사를 연기한다. 포효하고 에너지 넘쳤던 김윤석의 장기를 버리고 이번엔 밋밋해지려고 안간힘이다. 느릿느릿 거북이의 보폭으로 김윤석이 달린다.
김윤석이라는 이름은 급작스러웠다. 그 나이 또래의 배우라면 적어도 계통과 전사가 있게 마련이다. 어디 출신이며, 그전까지 어떤 연기를 했고 그리고 유명하지 않지만 작게나마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그는 아침 소란 속, 습관처럼 켜놓은 TV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낯선 미지의 존재였다. 아침 드라마를 기반으로 이름을 알리기에 이 남자의 물리적 나이는 너무 많았다. 게다가 포효하는 듯 휘몰아치는 그의 연기는 첫 등장치고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다른 무엇이 아닌 실력 하나만으로 그는 소리로만 흘려듣던 시청자를 TV 브라운관 앞으로 온전히 끌어들였다. 김윤석의 자기장은 그토록 강력했다.
김윤석의 파워를 총체적으로 실감하게 해준 건 지난해 화제작 <추격자>였다. “야, 4885 너지” 하고 ‘엄중호’가 외칠 때 그 한마디에 <타짜>의 ‘아귀’와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아빠’가 파바박 하고 섬광처럼 스쳐갔다. 이름을 알린 지 불과 2년여 만에 그는 자신이 맡은 몇 안되는 캐릭터를 통해서 자신의 전사를 만들고 김윤석이라는 브랜드를 창조했다. ‘최민식, 설경구, 송강호 트리오’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던 연기파 리스트에 김윤석의 이름을 올려놓아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크기였다. 독하고 매서운 연기를 전매특허로 할 수 있는 또 한명의 배우가 있어준 것에 대해서 새삼스러운 고마움이 뒤따랐다.
연극을 하면서 고생했던 이야기와 연기를 접겠다고 낙향했던 순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근 20년간에 걸친 굴곡진 김윤석의 연기사는 어느 모로 끄집어내도 이른바 스토리가 됐다. 송강호의 친구라는 점이 천연 양념처럼 빠지지 않고 뒤따랐다. 낯선 배우가 스타성을 획득하기까지 지난 한해, 김윤석의 스토리는 곶감 꼬치를 빼먹듯 차곡차곡 언론의 질 좋은 재료가 됐다. 매니지먼트사의 통제와는 거리가 먼 이 ‘늙은’ 신인은 풀어놓아야 할 것들도 연륜도 경험도 생각도 무궁무진한 배우였다. 언론이 그를 선호하는 것만큼 시나리오도 그를 따랐다. <거북이 달린다>가 김윤석의 선택을 받는 순간, 충무로에서 화제를 모은 건 ‘이토록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도대체 어떤 시나리오기에 김윤석이 선택했을까?’라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리고 몇 개월. 차기작 <거북이 달린다>가 알려지면서 기대가 부담이 되는 질문들이 그를 무던히도 뒤따랐다. 다시 <추격자>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북이 달린다>의 하드웨어는 얼핏 보기에 <추격자>의 그것과 쏙 빼닮았다. ‘형사’와 ‘탈주범’, 그리고 ‘달린다’. 전작의 성공을 일정 부분 떠 안을 수 있는 놀랄 정도로 안온한 선택이라는 비판도 앞섰다. 김윤석은 이 고정관념을 고쳐 잡으려 한다. ‘<추격자> 이야기로 너무 엮지 말아달라’, 전작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당부 섞인 말 한마디. “참 이상한 게 달리는 거 하나만으로 다들 <추격자>를 연상한다는 거다. 온도로 따진다면 두 영화는 같은 지점이 하나도 없다.”
시골 마을 조 형사의 탈주범 잡기. <거북이 달린다>에서 김윤석은 목표는 뚜렷하나 느릿느릿 완수하는 ‘거북이’ 조 형사를 연기한다. 아득바득 범인을 잡겠다는 열혈형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루를 별일없이 보낼 수 있냐를 고민하는 평범한 직장인에 가깝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지위를 이용해서 조금은 나쁜 짓도 할 줄 아는 형사이자 평범한 가정의 가장. 선인도 악인도 아닌 보통 사람이다. 김윤석식으로 걸러지면 어떤 모습이 나올지 정확히 각이 잡히지 않는다. 재빨리 <살인의 추억>의 시골 형사와 <투캅스>의 비리 형사를 뒤섞은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섣부른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달리는 속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느려진 셈이다.
“지금껏 맡은 역할 중 나와 가장 흡사한 캐릭터를 꼽자면 <즐거운 인생>의 평범한 가장이다. 난 그런 캐릭터가 좋다. 연기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힘 빠진 연기 말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조 형사는 그의 캐릭터 선호도에서 높은 순위 안에 들 호감형 캐릭터다. 그가 조 형사를 ‘찌질하지만 나랑 똑 닮은 캐릭터’라고 손수 정의한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추격자>와 <타짜>의 캐릭터처럼 영화 속 창조형 인물이 아닌, 정말 촬영을 한 충청도 예산에 가면 꼭 있을 것 같은 그런 보통 형사 말이다.” 논밭이 있는 시골. 촬영장 예산이 곧 그의 집이 됐다. 예산 말을 쓰는 예산 사람이 돼서, 당구장도 가고 다방도 가고 술도 마시면서 조 형사를 마스터했다. “사투리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은 역시 거기 가서 있는 거다. 숙소에서 밥먹고 자고 얘기 나누면 그게 다 말로 나온다. 억지로 하려 하지 않아도 그게 억양이 되는 거다.”
김윤석은 지금껏 그를 특징짓던 강렬한 캐릭터 파워를 잠시 꺼두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도 밋밋해질 수밖에 없는 조 형사를 죽어라 연구했다. 개봉을 앞둔 지금, 그는 조 형사야말로 지금껏 했던 연기 중 가장 지독한 도전이었음을 고백한다. “이건 7도 음계 안에서 감정표현을 하는 것과 3도 음계 안에서 감정표현을 하는 것의 차이다. 보통 사람들의 감정표현은 대개 3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번 도전은 후자였다.” 카리스마도 격정도 에너지도 없는 보통 사람의 화와 울분. 쉽게 돋보일 수 있는 자신의 모든 재료를 과감하게 훌훌 털고 임한 조 형사는 분명 지금까지 김윤석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서 배우로 사는 김윤석이 한 단계 높게 설정해놓은 또 다른 도전의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