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겪는 일반적인 고통 중 하나는 외로움이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살 사건들의 원인으로 제시되는 우울증도 결국은 홀로 처리하기 힘든 문제들에 봉착한 인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지독한 외로움으로 인해 발병한다. 그들은 SOS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그 신호가 적적한 수신자를 찾아 닿지 못하면 그들의 생은 좌초당하고 만다. <김씨표류기>는 전혀 다르지만 어딘지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된, 외로움이라는 벼랑 끝에 선 두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는 직장, 여자, 돈으로부터 버림받고 목숨을 끊으려다 세상이 잠시 잊고 있던 공간 속에 숨어들었고, 여자는 오랜 따돌림으로 상처받고 자기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어딘가로 숨어든 그들이 어렵게 서로를 발견하고 아무도 듣지 않았던 자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실패한 그들은 우리 안에 있으니
이 영화는 경제적 능력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본주의 시장논리와 물리적 공간과 계급 나이를 초월해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연결해준다는 인터넷 이상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실패한 인간들을 위한 일종의 알레고리다. 한강에 투신한 남자 김씨는 자살에 실패한 뒤 서울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밤섬에 떠오른다. 그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이상, 그는 서둘러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 존재의 사회적 의미망이 사라진 순간 그는 홀가분해진다. 그리고 오히려 살게 된다. 이마에 자리잡은 흉터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왕따였던 여자 김씨는 자기 방에 쓰레기로 첩첩이 둘러싼 둥지를 튼다. 그의 존재는 미니홈피 속 사진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의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그녀는 황홀하다. 타인의 이미지들이 오히려 그녀의 실존을 압도한다.
이 영화가 알레고리적 특성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남녀 김씨가 밤섬과 자기 방으로 흘러들어간 이유에 대해서 그다지 공들여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 김씨의 경우 그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매우 재기발랄할 몽타주 형식으로 그 이유가 압축적으로 제시되고, 여자 김씨의 경우 미니홈피에 달린 몇 십줄의 악플들로만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그들의 개인적인 과거, 그들의 특수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는 현재에 (여자 김씨가 남자 김씨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망원렌즈를 들이대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주인공들이 이름 대신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성씨 중 하나인 김씨로 제시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들이 어떤 기구한 사연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서울 안의 밤섬에, 무수한 아파트숲 한켠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이 영화의 미덕은 외롭고 소외된 인간들, 그러면서도 아직 은둔하지 않은 많은 인간들과 많은 점을 공유하는 인간들을 화면 위로 불러내면서 동정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할 상대가 없는 김씨들의 대사는 대부분 내레이션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그것은 한탄이나 자기연민으로 빠지지 않고 담담한 유머를 구사한다. 그것은 이해준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독특한 성정체성을 가진 소년 오동구의 담담함과 연장선상에 있다. 그들의 담담함 뒤에는 불쌍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불쌍하게 보는 (혹은 만드는) 이 사회라는 당당함이 숨어 있다.
땀으로 일군 자장면 속에서 찾은 가짜 희망
두 김씨의 표류기와 관찰기는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힘있게 진행된다. 남자 김씨가 야생의 생존법칙을 익혀가는 과정이 재미있고 온라인에서 거짓된 자아에만 홀딱 빠져 있던 여자 김씨가 오프라인의 타자를 통해 자아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표류기란 표류‘했던’ 경험에 대한 기록이므로 결국에는 정착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씨들이 중간 기착점으로 찾아낸 것은 ‘자장면’이다. 서민들의 주된 외식메뉴이자, 어머님이 싫다고 하셨던 그 자장면. 남자 김씨는 새똥에서 얻은 씨앗으로 밭을 일구고 옥수수를 키워 짜파게티 수프를 뿌려 자신의 손으로 자장면을 만든다. 그는 여자 김씨가 1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오리배로 배달해준 자장면을 거부한다. 자장면은 그의 희망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희망을 돈을 살 수 없다는 소중한 가르침, 여자 김씨는 그 가르침을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아름다운 말이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선은 남자 김씨가 일군 희망이라는 것이 결국은 무너져 내릴 임시방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농사는 노동의 가치를 긍정하고 현대사회의 모순을 지적한 결과라기보다 남의 땅 위에서 잠시 꾸어본 헛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희망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니, 자장면 한 그릇이라는 물질적인 대상 이외에 지칭하는 다른 어떤 것을 찾을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가 밤섬에서 내몰렸을 때 또 다른 자살기도를 위해 63빌딩으로 향하지는 않았으리라. 그 다음으로 여자 김씨는 자장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는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시선을 장악하고 있는 여성이지만 결국 그의 욕망은 남자 김씨의 욕망을 복사하는 데 그치고 만다. 옥수수를 키우는 그녀는 온라인의 허상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이의 홈피를 ctrl+C해서 ctrl+V하던 습관을 오프라인의 남자 김씨에게 적용했을 뿐이다.
결국 자장면은 그들을 진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구원할 것인가? 여자 김씨의 경우는 나름 명쾌하다. 그녀가 결코 답할 수 없었던 질문, ‘who are you?’에 다른 이의 사진이 아닌 자기 이름 석자를 댈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녀가 세상에 다시 발을 딛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 김씨는 그녀에게 대답을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6달 동안의 무인도 판타지는 이제 끝나고 도심의 정글이 그 앞에 다시 있는데….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은 여자 김씨가 기다리던 민방위 훈련과 닮았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나란히 앉는 그 장면은 우리에게 별로 위안을 주지 못한다. 세상은 잠시 멈추었지만 공습경보가 해제되면 다시 움직일 것이고 사랑은 (김씨들의 관계가 사랑으로 이어질지도 불투명하지만) 남자 김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열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