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점프 컷]
[김영진의 점프 컷] <김씨표류기>는 표류하고 말았나
2009-06-12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배우들이 훌륭한 연기했지만 TV 드라마 이상의 감정 용량을 담아내지 못해

<김씨표류기>는 올해 불운한 영화 중 한편으로 꼽힐 만하다. 내가 본 극장에서 대다수 관객은 이 영화를 즐겼다. 사방을 쓱 둘러보니 흐뭇한 미소를 짓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면에서나 빠지는 데가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소재도, 풀어가는 연출도, 연기도 수준급이었다. 정재영이야 원래 연기를 잘하는 배우지만 그의 상대역이었던 정려원도 기대 이상으로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재미있다는 느낌 이상으로 영화가 나아가지는 못하고 멈칫거리는 인상이었다. 영화 중반까지 치고 올라가던 영화가 절정부를 축으로 완만하게 기력이 하강하면서 귀여운 영화라는 것 이상의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절정부를 축으로 하강하는 감정이입

파산한 신용불량자가 한강에 투신자살했다가 무인도인 한강 밤섬에 휩쓸려가 그냥 거기 눌러앉아 살게 된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주요 컨셉은 고독한 인간이 소통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린 주변에서 종종 심심하다는 말을 하는 인간을 보게 되는데 이 영화는 그렇게 팔자 좋은 고독논리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인공 김씨는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려다 하필이면 그때 다가온 변의를 참지 못하고 숲속에서 볼일을 본다. 김씨가 엉덩이를 까고 큰일을 보는 걸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 희극적인 상황이 가져올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김씨는 자신이 포기하려고 한 육체, 지상에서 삭제하려고 한 육체의 부름을 받는다. 죽으려고 하기 직전에 느닷없이 찾아온 몸속의 경보음, 허겁지겁 찾아온 배설욕구를 해결하고 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숲의 정경이다. 그것들은 아마도 너만 여기 사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때부터 김씨는 먹고살기 위해 숲에서 일용할 양식을 찾는데 그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과 같다. 어떤 건 먹어도 되고 어떤 건 먹으면 안된다. 쓰레기에서 찾아낸 짜파게티 수프 봉지는 김씨에게 장기적인 목표를 갖게 해준다. 그는 자장면을 손수 만들어 먹고 싶다. 그가 자장면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는 자연의 순환에 관한, 자신이 싼 똥을 숲이 거름으로 삼는 것과 똑같은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다. 오리 똥에서 건져낸 씨를 무작정 심은 그는 결과를 기다린다. 싹이 난다. 그는 이제 주변과 소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는 것, 행동을 하면 반응을 보이는 것,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것, 배설한 것에서 생명이 자라나는 순환에서 김씨는 소통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는 숲에서 너무 재미있게 논다. 자신에게 응답하는 조그만 밤섬의 생명들에게 환희를 느끼며 그는 자기집 안마당 같은 밤섬 모래밭에서 신나게 뛰며 즐거워한다.

김씨가 밤섬 자연과 나눈 소통은 건너편 아파트에서 자폐생활을 하는 또 다른 여자 김씨에게로 이어진다. 그녀는 남자 김씨의 정신나간 얼빠진 짓을 흥미롭게 관찰하다가 거기 어떤 맥락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행동을 그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그와 소통한다. 그는 물론 그런 그녀의 이해와 이해에 비례해 늘어가는 애정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일방의 소통을 쌍방으로 바꾸기 위해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한다. 남자 김씨가 숲의 생명들과 그렇게 하듯이 여자 김씨는 일종의 신호로 남자 김씨와 소통하려고 한다. 남자 김씨는 알아차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행복하게 되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각자 섬과 자기 방에 스스로 유폐된 그들의 공간은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 여자 김씨가 부모의 집에서 피신처를 제공받는 것처럼 남자 김씨는 사회로부터 피신처를 제공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를 돕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방을 나서야 한다. 그건 남자 김씨가 밤섬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그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위태로운 일이다.

클라이맥스에서도 왜 감흥이 안 생길까

어쨌거나 그들 각자의 안식처는 깨부숴야 한다. 그들의 삶의 즐거움은 그 안에서 자족적으로 누리기에는 너무 연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깨부수면 그들이 밤섬과 자기 방에서 누리는 행복도 깨어진다. 그게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것일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들 삶의 즐거움은 도피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김씨표류기>의 웃음과 멜랑콜리의 정체가 될 것이다. 감독 이해준의 연출은 무난하고 예쁘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관객에게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고전적 스타일도 아니고 공감각적 환기를 노리는 굵은 호흡도 아닌 애매한 연출태도를 취한다.

<김씨표류기>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분에서 감정이입의 잠깐 멈춤 현상이 일어나고 그 뒤로는 죽 감정이입이 하강한다는 것이다. 남자 김씨가 마침내 자기만의 목표달성을 해내는 장면이 있다. 김씨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데 카메라는 그런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런데 관객, 아니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함께 본 사람들도 그랬다고 한다. 감정적으로 낯간지러운 장면이긴 하지만 여하튼 그 클로즈업에서 관객은 적절한 공명을 일으켰어야 했다. 그게 연출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감독이 세분한 화면 사이즈의 배분에 문제가 있었거나 내러티브의 목표와는 달리 시각적 콘티의 이상이 달랐다는 것일 수도 있다.

절체절명의 고독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것, <김씨표류기>는 대안의 삶의 방식을 찾지 못해 허덕이는 사람에겐 적지 않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김씨가 손바닥만한 밤섬에서 우주의 기운을 느낀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삶의 전환이다. 그는 예술의 최종목표 중 하나인 공감각적 조응을 제 몸으로 느낀 사람이다. 자기 몸의 배변 욕구에서 다른 생명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생명들이 일정하게 순환하는 과정에 자기 노동을 투여해 그 자연의 일부가 된다. 거기서 그는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없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 자체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여자 김씨가 끼어들어 어떤 행동으로 도와주려고 할 때 그는 거절한다. 그 거절의 의미를 여자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협력자이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연출은 김씨의 공감각적 기운 충만을 묘사할 만한 솜씨에는 이르지 못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남자 김씨 주변의 친구들이라 할 주변 사물의 생명을 촉각적으로 담아내는 데는 힘이 달린다는 인상을 준다. 거꾸로, 이는 여자 김씨를 둘러싼, 그녀의 삶과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고 적대적인 환경을 묘사하는 데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 김씨가 사력을 다한 용기를 내어 남자 김씨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외출을 감행할 때 그녀가 사는 아파트 동네나 거리를 묘사하는 것도 좀 무미건조하다. 코미디의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찍어낸 느낌이 강하다. 그것으로 인해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하는 클라이맥스에서의 두 남녀 주인공의 상봉도 예상했던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고로, 이 영화는 충분히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스토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이상의 감정 용량을 담아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스크린에서라면 이 정도의 감정과 의미의 용량으론 좀 곤란하다.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에도 아쉽게 그렇게 되었다. 이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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