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를 봤다. 워낙 스토리텔링이 좋은 감독이 만든 영화라 아무런 생각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나 즐길 생각으로 극장에 들어갔는데, 머리만 더 복잡해져서 나왔다. 봉준호 감독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나. 좀 원망스러웠다고나 할까. 영화 속에서 엄마는 마구 달린다. 골목과 골목을, 도로 위를, 벌판을. 그걸 보는데 한 이십년 전쯤이 떠올랐다. 요새 그 시절이 자주 떠오른다. 늙어가는 모양이다. 1988년 무렵이랄까, 팔팔올림픽의 열기로 타오르던 시절이랄까. 그해 늦가을,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자습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일제시대 때 지은 낡은 학교 건물의,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교실에서 친구와 둘이 라디오를 켜놓고 백담사로 떠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뉴스를 듣고 있었다. 내 청춘이 언제 시작됐느냐고 묻는다면, 그 뉴스를 들을 때부터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관한 뉴스를 듣고 난 그 다음해에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89학번이다. 70년대생의 맏형이 되고 싶었지만, 80년대 학번의 막내가 될 가망성이 많은 학번이랄까. 그 무렵, 영화 속의 엄마처럼 나도 자주 거리를 달렸다. 요즘의 ‘웰빙’이라는 말처럼 그 당시의 ‘운동’은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같은 것이었다. 운동하는 삶은 독서를 포함한 취미생활, 헤어스타일, 복장과 태도, 식습관과 음주성향, 말투와 행동방식, 인간관계와 대화술, 심지어 연애관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끼쳤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촌스럽다는 것이었다. 촌스럽다는 건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표현이지만, 이번만 이해해 달라. 어쨌든 이십년 전의 일이라 촌스럽다는 게 아니라 삶의 모든 요소를 한 방향으로 줄지어 세우는 그 일사불란함이 촌스럽다는 것이다. 일사불란. 그렇기에 이 촌스러움에 손을 대본다면 우린 그 표면이 꽤나 매끄럽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이발소에 걸린 그림이나 부동산으로 갑자기 부자가 된 지방 유지의 집에 있는 고려청자 복제품처럼.
우리의 내면을 불편하게 재현한 첫 장면
<마더>에 나오는 엄마가 꼭 그런 모습이었다. 매끄럽게 촌스러운 느낌. <마더>에 나오는 엄마는 TV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 그러니까 국민 어머니를 복제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국민어머니라면 김혜자가 되겠다. 봉준호 감독은 이미 김혜자 때문에 <마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김혜자는 TV드라마로 구축된 자신의 이미지를 복제해야만 하는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김혜자는 김혜자를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균열이 생기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나는 <마더>란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지금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는, 정말 이상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의 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자신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해서 생기는 균열, 내파, 내출혈, 마침내 정신착란의 세계. 이로써 <마더>는 모성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정신분석적 처방이 필요한 심리적 공포영화가 된다. 기기묘묘한 첫 장면은 이로써 지금 우리의 내면을 가장 잘 형상화한 불편한 재현이 된다.
내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엄마가 의외로 잘 달린다는 점이었다. 벌써 금연한 지 1년이 넘은 고향친구의 영향으로 담배를 끊었다가 최근에 다시 피웠다. 담배는 달리기의 적이다. 하루에 10km씩 달리면 담배는 저절로 끊어진다. 반대로 담배를 피우면 하루에 10km씩 달리는 걸 꺼리게 된다. 오래전의 농담처럼 흡연을 위해서 지나친 건강을 삼가게 되는 것이니까. 다시 담배를 끊을 것이다. 그럭저럭 마흔이 되다보니 이런저런 사물에 추억의 찌꺼기들이 들러붙는다. 예를 들면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가 나만을 위해서 불러준 노래 같은 것에는 미처 다 해소하지 못한 심리적 찌꺼기들이 남아 있다. 이제 담배에도 그런 게 생겼다. 담배를 보면 어떤 상처가 떠오른다. 그래서 끊을 것이다. 안 그래도 하루에 10km씩 달리자면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다. 어느덧 마흔이니까.
그런데 저 늙은 엄마는 왜 저렇게 잘 달린단 말이냐? 그것도 어두운 골목길을. 이 영화가 모성을 다룬 영화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진실을 찾아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진실은 아마도 여고생 문아정이 서 있던 그 어두운 골목 속에 있었을 것이다. 거기는 죽음과 공포의 공간이지만,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여다봐야만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공간 속으로 엄마는 일말의 반성도 없이 달려간다. 나는 그게 이상했다. 왜 달리는 것일까? 더듬더듬 하나하나 확인하며 천천히 걸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왜 엄마는 시종일관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엄마는 이미 그 공간이 텅 비어 있다는 걸, 거기에 진실이 부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은 엄마에게 ‘이미’ 있다. 그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엄마의 달리기, 즉 ‘운동’은 그 진실을 좀더 빨리 증명하려는 욕망일 뿐이다. 진실을 선취한 자들에게는 모든 건 시간의 문제니까. 세계는 저절로 본 모습을 드러내지만, 엄마는 그 세계를 마중하기 위해 달린다. 운동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을 가장한 1인칭 주인공
엄마의 촌스러움은 여기서 비롯한다. 진실을 선취한 자들은 삶의 모든 국면을 그 진실에 맞춰서 행동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촌스러워진다. 스스로 뼈를 분질러버리는 것처럼 아픈 이야기지만, 내가 스스로 나를 복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마더>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3인칭 시점을 가장한 1인칭 시점을 사용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이건 반칙이지만, 이 반칙은 우리 시대에 일반적이다. 서초동 검찰청사에 계신 분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리고 엄마 역시. 엄마는 3인칭 전지적 시점을 가장하는 1인칭 주인공이다. 거기에 모성이란 없다. 존재하는 건 스스로 복제하려는 분열된 자아뿐이다.
지난 5월 말, 1988년 이후 우리 세대가 흉내내며 살았던, 거대한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세계는 붕괴했다. 내 시점을 타인과 공유할 때,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와 타인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최종적으로 구축됐다. 여긴 상대성의 세계다. 고물상은 국민어머니를 흉내냈던, 그러니까 김혜자를 흉내냈던 김혜자가 최종적으로 보게 되는 이 세계의 풍경이다. 그 풍경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 이제는 그걸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계다. 기나긴 청춘이 이로써 끝났다. 이제 우리에게는 정신분석학적 치료가 필요하다. 허벅지를 찌르는 침술로는 어림도 없다. 봉준호 감독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