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켜놓은 TV에서 신경을 긁는 뉴스 두 가지가 흘러나왔다. 하나는 스포츠 뉴스에서 야구 경기 결과를 전하며 ‘용병 000’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의 ‘극악한’ 범죄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아주 일상적이고 전형적인 우리 사회의 제노포비아(xenophobia)를 보여준다. 전자는 외국인은 무조건 라벨링해두어야 한다는 강박증이고 후자는 인구 증가로 범죄율이 증가하는 것만큼 너무 당연한 사실을 그들에게만 과장 적용하는 공포증이다. 국내 외국인 수가 증가할수록 그 층위는 다양해지는데 그중 낮은 곳에 자리잡은 이들 중 하나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들어온 이후 ‘외국인’이라는 기표는 백인 관광객에게로 더 찰싹 달라붙고 그들의 짙은 살색 위로는 ‘노동자’라는 그림자만이 더 짙게 드리워진 느낌이다. 영화 <로니를 찾아서>는 모르는 척하기에는 우리의 일상으로 너무 많이 들어온 ‘그들’과 ‘우리’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영화다.
이 사회의 가식에 날린 상징적인 한방
이 영화 속 주인공 인호(유준상)의 행보를 지켜보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오른다. ‘로니는 찾아서… 뭐하려고 그러니?’ 그는 아마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씩씩대기만 할 것이다. 그의 끝없는 추적에는 실질적인 이득을 담보하는 어떠한 목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작은 소도시에서 지역유지를 모셔놓고 연, 학예회 수준의 조촐한 태권도 시범대회. 거기서 그는 정체불명의 외국인 노동자 로니에게 보기좋게 얻어맞았고 그 뒤로 원생들은 ‘쪽팔려서’ 더이상 못 다니겠다며 학원에 발길을 끊는다. 인호는 억울하고 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쪽팔려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날 며칠을 이를 간다. 그는 로니 때문에 생계수단을 잃었다. 하지만 로니의 좌판을 먼저 뒤집어엎고 협박을 가한 것은 인호였다(정확하게는 인호가 수장으로 있는 자율방범단이었다). 어떻게 보면 피장파장이다. 그럼에도 인호를 억울하게 만드는 것은 ‘감히…’라는 생각이다.
‘감히…’의 근저에는 좋은 말로 하면 주인의식, 솔직하게 말하면 텃세가 숨어 있다. 이곳은 내 땅이니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너는 이방인, 그것도 불법 체류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체재와 거주의 적법성이 다른 모든 윤리와 양심의 질서를 무찔러버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호는 싸움의 기술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아의 인격 수양을 최고의 목표로 삼은 태권도 사범이다. 국기(國技)로서의 태권도의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이상이 바닥을 드러내고 실재가 불쑥 들어선다. 정체도 알 수 없는 ‘로니’가 인호에게 날린 한방은 사실 (다양성, 세계화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지독하게 배타적인) 이 사회의 가식에 날린 상징적인 한방으로 읽을 만 하다.
이 영화는 제목과 내용 모두 ‘로니를 찾아서’에 집중한다. 한데 스크린 위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인호와 시간을 보내는 이는 로니와 함께 왔던 뚜힌이다. 뚜힌은 인호를 로니에게 데려다줄 유일한 안내인이지만 마치 카프카의 <성>(城)에 나오는 문지기처럼 그를 통해서는 결코 로니에게 갈 수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로니를 찾는 것이 아니라 로니를 찾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로니는 인호를 그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그의 옆에 실존하는 세계로 와락 밀어넣는 역할을 한 뒤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인호의 여정은 한국과 방글라데시 그 어디에서도 그를 만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만다.
뚜힌을 통해 이주 노동자는 막연히 공포스럽고 낯선, 그러면서도 비현실적으로 균질적인 이미지의 허울을 벗고 복잡다단한 실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돈을 좋아하지만 악착같지 않고 변죽이 좋지만 굽실거리지는 않는다. 즉, 그를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다. 처음에는 철저하게 무시와 냉대로 일관했던 인호는 결국 그에게 마음을 연다. 그 순간 여태까지 인호에게 로니와 한 덩어리였던 뚜힌이 하나의 개체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화해나 포용은 아니다. 인호가 허락한 것은 뚜힌이라는 개인이지 그가 속한 세계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 친분의 수준에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들의 세계를 우리와 동등한 지위로 용인할 수 없다는 그의 태도는 자기가 놓은 덫에 뚜힌이 빠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그의 편협한 관용이 결국 자기 손으로 친구를 추방하게 되는 방식으로 응답받은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그들을 개인적으로 동정하지 말고 우리 안에 그들의 정당한 자리를 존중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그 친구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지 ‘불쌍해’질 수 있다.
방글라데시 장면은 아마 인호의 꿈
하지만 감독과 배우를 포함해 단 넷이 감행했다는 방글라데시 촬영분은 이야기의 실제적 결말로 삼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호의 시선을 대신하는 카메라는 그들의 땅에서도 여전히 그들을 완전한 타자로 남겨둔다. 비록 웃음과 행복을 표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관찰당하는 익명의 존재들, 그 이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동양이 또 다른 동양을 신비화하는 변주된 ‘오리엔탈리즘’적 향기마저 풍긴다. 로니를 찾는 대신 뚜힌과 동행하게 된 인호의 이야기는 내구력있는 서사였지만 온통 궁지에 몰린 듯한 그가 불현듯 방글라데시로 떠나는 지점에서는 선뜻 그의 여정에 동행하는 것이 머뭇거려진다. 그는 과연 그 먼 땅을 갈 필연적 이유가 있었던가? 뚜힌과 함께한 경험들은 그에게 로니를 찾아야 할 감정적 동인들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뚜힌을 찾으러 갔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소통 직전에 (출입국 관리국에 의해) 강제로 종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방글라데시 시퀀스는 실제 상황보다 인호의 꿈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듦으로써 뚜힌을 쫓아낸 죄책감을 대신한다. 그는 여행객일 수밖에 없다. 한번도 뚜힌이나 로니가 이 땅에서 품었던 도망자로서의 정서에 도달해본 적이 없으니. 하지만 인호는 문을 열었다. 그게 이 영화가 서 있는 정확한 지점이다. 우리와 그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살던 이가 완전하게 계몽되고 전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변화를 위한 문을 연 그 시점. 인호의 자아가 비로소 새로운 국면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 영화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