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바라보되, 결정짓지 않는다
2009-06-25
글 : 송경원
<로나의 침묵>이 생략과 모호함으로 현실과 소통하는 방식

현실은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문을 닫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선언에 익숙해져 있지만 현실에는 이야기의 시작도 끝도 없다. 그것은 단지 지속되는 과정에 속한다. 반대로 현실의 순간을 잘라내어 입구와 출구를 만들면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는 사건이라는 ‘점’을 이은 선형적 연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사건이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정보의 전달이 선행된다. 그러나 <로나의 침묵>은 은행에 돈을 예금하는 로나의 바스트 숏에서 출발하여 아무런 전조없이 관객을 로나의 현실 한복판으로 밀어넣는다. 이후 잠시도 로나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카메라는 종종 사건을 생략하고 순수하게 로나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영화가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포착처럼 보이도록 한다.

루이 뤼미에르를 기억하라

다르덴 형제의 영화 형식은 그들의 초기작부터 다큐멘터리적 기법에 기반해왔다. 최신작인 <로나의 침묵> 역시 카메라는 들고 찍기로 인물을 따라가고, 카메라 시점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클로즈업과 같은 영화적 과장을 배제한다. <로나의 침묵>에서 다르덴 형제는 순수한 관찰을 재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철저하게 ‘(타인의 눈으로) 누군가를 본다’는 명제를 준수한다. 그러한 풍경의 관찰은 때때로 연출의 배제라는 오해를 낳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같은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로나의 행동을 가감없이 잡아내지만 그것은 그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이 아닌 철저히 통제된 동선의 연출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은 오늘날 공장의 문 앞에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촬영한 다큐멘터리적 풍경의 대표적 영상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실상 뤼미에르 형제의 이 영화는 문열림이란 이야기의 시작과 문닫힘이란 이야기의 끝 사이에 정교하게 배치된 통제된 이야기다. 뤼미에르가 재현한 풍경의 포착은 단지 현실적인 표현의 한 방식일 따름이다. <로나의 침묵>에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적 영상 또한 다르지 않다. 그것이 이 영화의 방점이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찍혀야만 하는 이유다. 은행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로나를 놓치지 않으며 관객은 로나가 겪는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로나의 ‘생활’을 보게 된다. 때문에 클로디의 죽음과 같이 서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장면조차 로나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이유로 생략해버릴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클로디의 죽음은 정보에 머물고 클로디의 죽음을 접한 로나의 반응이 의미가 된다. 두서없이 주어지는 정보를 재구성해나가며 사건을 추측하고 열심히 정렬시켜나가던 관객은 이제 지친 걸음을 멈추고 로나의 행동에서 의미를 발견해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로나의 침묵>은 이동의 영화다. 로나는 걷는다. 카메라도 함께 걷는다. 이 단순한 명제가 <로나의 침묵>의 화면을 물리적으로 채워넣고 있다. 거리란 시간의 여행이다. 장소의 변경은 물리적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근대의 압축된 시공간 속에서 그것은 존재하지만 인식되지 않는 시간이 되었다. 걸어가는 동안에는 걷는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 어떠한 사건으로도 위치되지 않는 것이다. <로나의 침묵>의 카메라는 바로 이 망각되었던 이동의 시간에 말을 건다. 카메라는 로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우리가 익숙하게 구성하던 서사의 결정적 사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사건이라는 점 사이를 이동하는 로나의 동선을 묵묵히 담아낸다. 클로디의 집에서 내려오는 계단, 직장을 향하는 거리, 병원으로 가는 지루한 길들은 더이상 이 영화에서 생략되어야 할 잉여화면이 아니다. 멍하니 걷는 그 시간들이야말로 우리 삶에 존재하는 ‘현재’를 회복시키는 단초이다. 관객은 로나가 경험하는 ‘현재’를 카메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그녀를 둘러싼 현실을 마치 그녀의 입장과 유사하게 지각할 수 있다. 이것은 종래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경험을 축적하던 방식에 가깝다. 의식이 아닌 몸으로 새겨나가는 이른바 ‘비어 있는’ 시간은 사건의 침묵을 통해 이야기의 영역에서 부활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밀도 높은 리얼리즘적 형식을 초월하여 현실에 접속하는 새로운 통로로 도약한다.

초반에 친절하지 않는 사건의 생략에 당황했던 관객은 인물의 입장에서 주변을 관찰하는 잉여화면의 기법에 익숙해지면서 갈등하는 로나의 ‘현재’를 본다. 동시에 로나 또한 스스로의 ‘현재’를 회복해간다. 벨기에 국적을 얻기 위해 마약 중독자 클로디와 위장결혼한 뒤 그를 약물중독으로 죽인다는 사실에 합의했던 로나는 현재가 아닌 미래를 살던 사람이다. 그 시점의 로나는 벨기에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현재의 양심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 로나도, 소콜도, 심지어 불법 이민 브로커인 파비오조차 현재가 아닌 어딘가를 향하는 분열된 삶을 살고 있을 따름이다. 때문에 꿈을 위해서라는 조그만 각오와 변명으로도 인간성은 쉽게 상실된다. 덧씌워진 정체성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현재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은 시간의 간극만큼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클로디와 함께 생활해야만 하는 로나의 삶은 현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클로디를 업무상의 장애물로 바라보는 그들은 시공간적으로 여전히 그와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까닭에 클로디의 죽음을 하나의 업무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클로디와 함께 생활하며 현재로 귀환한 로나는 끝내 그럴 수 없다. 미래의 사슬에 묶였던 삶은 인간다움과 함께 ‘지금’으로 되살아난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

관객은 로나의 지리멸렬한 시간을 바라보며 현재를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로나를 향한 정서적인 몰입은 차단된다. 명확한 감정의 전달은 서사적 구성 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념의 산물일 뿐이며 현실에서의 감정이란 하나의 표정으로 담길 만큼 명쾌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로나와 같이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부조리한 사회와 인간의 존엄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정체성을 분열시킨 경우라면 더욱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애원하는 클로디를 냉정하게 대하는 로나의 태도가 자신을 단속한 가면의 균열을 막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음은 나중에 가서 결국 밝혀지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연민과 갈등으로 결정지어서는 안된다. 감정이 지정되고 몰입되는 순간, 영화는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생략되었던 서사적 사건을 깨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혹은 무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는) 로나의 알 수 없는 얼굴은 모든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의 흔적이자 망설임의 순간 그 자체이다. 때문에 영화는 모호함의 순간으로 인물의 행동만을 드러내고 감정이 지정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관찰이란 소명에 충실한 카메라가 들고 찍기로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도 그녀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감정 전달에 유리한 음악의 사용을 절제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다르덴 형제는 카메라의 한계와 오용의 가능성을 명확히 알고 있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직접 보여줄 수도 있고, 사건을 이미지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 순간 이미지는 재현의 층위에 갇혀 현실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진다. <로나의 침묵>의 생략과 모호함은 그 불친절함에도 현실과 소통하는 의미있는 영화방식 중 하나다.

송경원
설레는 마음으로 비평의 운동장에 첫발을 디뎠다. 새로 산 신발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설혹 없어지더라도 계속 달릴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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