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점프 컷]
[김영진의 점프 컷] 우리 모두 조금씩 미친 건 아닌가
2009-06-26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마더>의 모자 관계를 통해 봉준호가 던지는 질문

내게 <마더>는 봉준호의 영화 가운데 뭔가 쓰기가 가장 어려운 작품이다. 영화가 끝났을 때부터 지향점 없이 산산이 몸속으로 흩어지는 통증을 느끼게 해주었다. 하나의 층위로 접수하기 힘든 영화였기 때문이다. 살인혐의를 받는 아들을 구하는 모성이라는 소재는 이들 모자의 운명에 무심한 제도와 사회의 부조리에 관한 내러티브의 서브플롯과 평행을 이루며 모성의 본질을 회의적으로 보는 감독의 시선에 따라 어머니의 심적 고통의 정체를 지독하게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간다. 여기에는 하나의 통일된 귀결점이 없다. 일례로, <마더>에는 주인공 혜자를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의 클로즈업이 빈번하게 쓰이지만 그것들이 어떤 통일된 인상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이전까지 봉준호는 클로즈업을 많이 쓰는 감독이 아니었다. 고전적 문법에 맞게 단계적으로 화면 사이즈를 배분하며 각 장면의 감정적 비등점에서만 클로즈업을 썼다. 이 영화에서는 거의 충돌의 형태로 인물들의 클로즈업을 붙이고 있다. 표현의 과잉이 내러티브에 접착되지 못하고 잉여적인 부분에 남아 떠돈다.

그런 점 때문에 이 영화가 일정한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은, 사석에서 만나본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격렬하게 이 영화의 모호한 지점을 비판했는데, 특히 김혜자 연기의 과잉과 원빈 연기의 모호함에 관해 불만을 토로했다.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은 강렬한 감정의 압침 기능을 하는 많은 장면들을 상찬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혜자의 춤 장면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관람 전에 하도 얘기를 많이 들은 장면이라 막상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덤덤했던 이 장면은 관객의 멱살을 잡는 일종의 예술적 제스처라고 볼 수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첫 장면에서 말론 브랜도가 지상 2층의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막으며 ‘퍼킹 갓’이라고 외치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여줄 테니 관객은 긴장하라는 인사법이다. <마더>의 이 첫 장면은 자식을 구하는 모성의 신화를 기대한 관객에게 그것 말고 다른 걸 보여줄 테니 준비하라는 신호다.

내러티브의 수수께끼에 대한 관객의 불안

이 예술적 자세잡기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 폼 잡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모호하게 흘러간다고 불평할 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복합적으로 풀려가는지, 인위적인 모호함의 덫에 갇히는지 이 영화에서는 판단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원빈이 연기하는 바보 아들 도준은 과연 사태의 전말에 대해 얼마나 알고 행동하는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가끔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과거의 일을 발설한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때면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기억을 되찾으려 애쓰는 도준은 살인사건과 관련된 비밀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죄가 없다. 거꾸로 영화 후반에 누군가의 회상으로 전해지는 살인사건이 있던 날 밤의 전모에 따르면 그는 범인이다. 영화적 논리로 이것은 판가름할 수가 없다. 객관적 시점과 누군가의 주관적 시점의 대비에 따라 관객이 판단해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르적 컨벤션을 끌어들인 봉준호의 기본적인 전략이다. 그가 지금까지의 영화에서 보여준 전략은 장르 관습을 이용하는 체하면서 실은 정반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복기해보면 쓸데없는 추적 장면이 나오지만(<살인의 추억>이 대표적이었다) 그런 것들조차 나중에는 용서가 된다. <마더>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동시에 그들 각자의 내면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함께 대화하는 중에도 서로 통하지 않는다. 아들은 곧잘 딴 데를 쳐다보고 있고 넋도 반쯤 나가 있다. 아들이 오줌을 누는 것을 엄마가 가까이 다가가 지켜보는 영화 속의 한 장면에서조차도 이런 어긋남은 한층 강조된다. 아들은 마치 곁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오줌을 눈다. 엄마 보지마, 뭐하는 거야 따위의 말도 하지 않는다.

엄마와 아들은 대개의 경우 애인 같은 관계다. 어렸을 때 아들은 성숙한 엄마를 연인으로 갈구한다. 아들이 자랐을 때 엄마에게 아들은 가장 간절한 애인이다. <마더>에서 그 관계 형성을 가로막는 결핍은 다양한 층위에 걸쳐 있다. 이들 모자의 병리적인 측면은 엄마가 아들이 어렸을 때 행한 끔찍한 시도와 관계가 있고 아들은 끝내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 자기가 한 말의 뜻을 가늠하지 못하는 수준의 지능을 지닌 아들은 육체적으로도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며 발정난 개처럼 어느 여름날 밤에 여자를 찾아 헐떡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로도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줄 수가 없다. 내러티브의 수수께끼에 대한 관객의 불안은, 영화 속의 혜자 엄마의 불안과 비슷하다. 아들과 엄마가 소통하지 못하듯이 관객과 이들 모자도 소통하지 못한다. 다만 전시되는 것은 그들 모자의 불안이다. 구체적인 공간의 지형에 비해 몽롱하게 산포되는 이 영화의 시간성은 꿈을 꾸는 듯이 흘러가고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맺음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영화 속 엄마의 불안감, 공포, 죄의식, 광기 직전의 흥분상태로 채우며 연장시킨다. 아들의 병의 근원은 엄마의 어떤 행동에 있다. 엄마는 아들이 그것을 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은 그걸 기억하고 있다. 현재의 모자란 아들과 그런 아들을 끊임없이 근심하는 엄마의 죄의식의 기원은 어린 시절에 있다.

건물 옥상에 널린 소녀 시체의 이미지는…

프로이트나 라캉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있지만 그렇게 추상화되면 각별해지기 힘든 어떤 개별성이 이들 모자 관계에 있다. 그런데도 속편해질 수가 없는 것은 이들 모자 관계가 또한 적지 않은 외연적 너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식으로 개별화되고 다시 보편화된 인물과 사회의 어떤 전형성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자식의 미성숙과 엄마의 맹목성이라는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넘쳐나게 볼 수 있는 사례다. 조금씩 다들 맛이 가 있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사회는 그런 현상에 무심하다. 제도와 공동체가 잔인하고 무심할수록 개별적 인간들의 초조감과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마더>는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조금씩 미쳐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은근하게 질문하는 영화처럼 내게는 보였다. 미친 듯이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지만 공동체로부터는 외양의 평화와는 달리 완벽하게 격리돼 있는 각자의 삶의 형편은, 영화에서 죽은 소녀의 시체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건물 옥상에 널려 있는 장면의 이미지로 축약된다. 등장인물들이 그에 관해 다 한마디씩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처참하니 빨리 도와달라는 것일까, 아니면 이 꼬락서니를 보고 다들 경각심을 느끼라는 것일까. 관객 입장에서는 둘 다일 것이다.

<마더>에서도 봉준호는 외양과 본질의 불일치라는 히치콕적 주제를 자신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변주해 한층 어두운 구석으로 밀고 나갔다. 만인의 어머니상 김혜자와 만인의 연인 원빈을 캐스팅한 것도 그렇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도 그렇고 겉으로 무리없이 봉합되는 가운데 뜻밖의 엔딩이 있는 내러티브도 그렇다. 박찬욱의 <박쥐>도 그랬지만 <마더>도 점점 더 어두워져가는 이 땅의 작가들의 정서의 일단을 추론해보게 한다. 이 세상에 대해 도저한 절망을 느끼는 것은 필연적인 것인가. 겉으론 멀쩡한 척하지만 돌기 일보 직전인 사람들에 관해 우리가 갖는 느낌은 먹먹함 이외의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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