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자(김혜자)가 홀린 듯 춤을 추는 드넓고 누런 갈대밭은 <살인의 추억>의 황금들판을 상기시키지만 결실이 아닌 불모의 이미지를 전시한다. <살인의 추억>의 엔딩신에서 카메라를 향한 두만(송강호)의 강렬한 시선에 응답하듯, 혜자는 모호하고 몽롱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 같다’. 조심스러운 가설이지만 나는 이를 두만의 시선에 대한 <마더>의 응답이라고 보았다.
그동안 봉준호는 엔딩에서 모종의 시선 돌리기를 즐겨왔다.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이성재)는 강의실에서 창밖의 숲을 바라봤고, <살인의 추억>에서 두만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을 불편한 자리에 앉혔다. <괴물>에서 강두(송강호)는 어두운 밤의 한강을 바라보며 잠들지 않은 불안함에 대한 예감을 남겼다. 이러한 외부 응시를 통해 원한의 감성이 복구되거나, 고요히 봉합된 것 같은 세계 속에 잠재된 불온한 잉여가 환기됐다. <마더>에서는 어떠한가. 폭탄 돌리기처럼 돌아가던 시선은 더이상 영화 밖으로 달아나지 않는다. 시선을 영화 외부로 던짐으로써 대중에게 공모의 죄책감을 자극했던 전작들과 달리, <마더>는 그 응시를 영화의 내적 심연에 깊숙이 박는다. 여기서의 내파는 닫힌 체계를 파열시키거나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이 중요하다.
바깥이 없다, 오로지 안으로 삼킨다
<마더>의 특이점은 영화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작들에서 갈등의 요소 혹은 위협은 외부로부터 왔다. 도시, 시멘트 공장, 그리고 외재성의 폭력이 만든 ‘괴물’에 이르기까지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는 늘 바깥에 있었다. 그런데 <마더>엔 바깥이 없다. 시선을 받아 오로지 안으로 삼킨다. 적대와 위협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책임의 윤리도 연대에 대한 무언의 제의도 건네지 않는다.
갈대밭 시퀀스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두번 반복되는 식탁장면(과 이어지는 침실 부감숏)이었다. 같은 의상, 음식, 구도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설핏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뒤바뀌었다고 느꼈다. 엄마는 모든 사실을 모른 척하고 도준(원빈)도 자신의 범죄와 엄마의 비밀을 모르는 듯 망각에 공모한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 강두의 살뜰한 밥상에서 관객은 심리적 안심과 위안을 얻었다. 그것이 바로 봉준호의 영화가 대중의 무의식과 타협한 부분이다. 관객만은 이 공모의 식탁에 초대하지 않으려는 듯, 모르는 척 기억을 봉인하기로 결심한 <마더>의 식탁의 불안함에서는 대중의 무의식과 공모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결연함이 감지된다.
“불이 얼마나 뜨거운 줄 알아?” 형사들이 진범에 대해 기억해내기를 강요하는 순간 <살인의 추억>의 광호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렸을 때 아궁이에다 집어던졌다. 저 사람이”라고 말하며 달아나던 광호는 난처한 동작을 반복하며(돌을 되던진 뒤 도준의 행동에서 반복된다) 파멸의 중심으로 뛰어든다. 사건에 관한 진실이 아니라 엉뚱하고도 치명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도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섯살 때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을 기억해낸다. 이는 또한 낯설고 기괴한 대사, <트윈픽스> 극장판인 <파이어 워크 위드 미>에서 나온 “불이여, 나와 함께 걷자”라는 기괴한 외침을 떠오르게 한다.
폐쇄된 마을에 성적 스캔들과 관련된 여고생 살인사건이 생기고, 얼치기 탐정 노릇하는 고교생들이 실체에 다가서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묘한 미스터리가 얽힌 뿌리처럼 끌려나온다. 주민들은 제각각 사건의 단서들을 쥐고 있고, 그러한 단서들을 모으니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괴물적 공간이 열린다. 사건의 핵심은 가족관계와 내밀히 관련된다. 데이비드 린치의 TV드라마 <트윈픽스>의 설정이다.
내면을 형상화한 풍경
<트윈픽스>에서 산골마을에 돌출된 목재공장은 <살인의 추억>의 시멘트 공장을 연상시킨다. 안개가 자욱이 끼어 짐승처럼 숨쉬는 것 같은 축축한 숲, 그 살아 있되 죽은(undead) 유기체적 인상은 <마더>의 자연과 상통한다. 여기서 식물이란 내장을 외부에 지닌 동물이라는 헤겔의 기괴한 정의가 연상된다. <마더>에서 골목과 상점, 관공서와 버려진 유원지, 그리고 들판과 산은 그곳이 하나의 마을임에도 종합되지 않는, 프랑켄슈타인의 신체처럼 꿰매진 유기체적 인상을 만든다. 넝쿨과 숲, 거대한 들판은 야수처럼 폭주하는 혜자의 파토스를 외면화한다. 광포한 욕망과 광기가 ‘투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이 혜자라는 실존의 내장 그 자체다.
한편 이미 자신의 주술이 합리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시대에 사는 시대착오적 무당의 이미지는 혜자의 분명한 정체성 중 하나다. 침술로 민간치료를 하고 출산에 관여하는 혜자는 소품인 작두가 환유하듯 폐쇄적 마을의 단골 무당처럼 보인다. 그녀는 대사에 나오듯 ‘시체 썩는 냄새’나는 인삼(생김새가 인간 같다는 점에선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묘한 식물 만드라고라를 연상시킨다) 등속의 약재를 다룬다. 그녀의 가게는 동굴처럼 검고 음울하다.
한편 ‘다른 세계’로의 통로로 기능하는 콜타르 빛 암흑인 어두운 골목 입구는 <살인의 추억>의 터널, <트윈픽스>에서 기이한 커튼룸의 입구로 제시된 숲의 암흑과 연관된다. 이는 모종의 통로, ‘다른 세계’로의 입구다. 봉준호의 영화는 아직 이 밖에 있다. 광호는 불에 타기 전에 산산이 파열되어버렸고, 혜자는 주체의 존립을 교란시키는 원인을 스스로 방화한 뒤 광기를 제어했다. 그동안 봉준호는 윤리와 공공성, 그리고 역사의식 모두를 아우르는 연출의 균형감각을 보여왔다. 나는 이 명민한 감독이 동어반복 없는 필모그래피를 기획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변두리 마을과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암흑공간처럼 이 끈끈한 변두리 누아르 <마더>가 봉준호의 다섯 번째 영화로 가는 입구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는 좀더 자신의 직관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봉준호는 이 영화를 통해 “가장 뜨거운 부분, 어떻게 보면 불덩어리 중에서도 제일 뜨거운 열의 핵심 같은 곳을 파고드는 영화”를 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마더>는 사건이 사회적 맥락으로 확산되는 전작들과는 달리 사건의 디테일이 중핵에 뒤엉켜 있다. 내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시선(혹은 질문; 살인자, 당신은 누구인가? 괴물의 배후가 무엇인가?)을 외부로 던지는 방식은 기실 대중과 맺은 공모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마더>에는 질문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쉽게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