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이런 놀이를 가정해보자. 지금 당신은 공을 들고 있고, 당신 앞에는 표적들이 지나간다. 많은 표적들 중에 진짜 표적은 하나이다. 가짜 표적들도 모두 진짜처럼 치장하고 있다. 당신의 공은 진짜 표적을 맞혀야 한다. 몇번의 가짜 표적을 맞히던 당신의 공이 드디어 진짜 표적에 명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당신의 공에 맞은 건 당신의 뒤통수였다. 당신이 표적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당신이 표적이었다. 이 게임은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 구조는 영화 세상에선 낯익다. 물론 영화 속에서 나의 대리인은 주인공이다.
하나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두 가지 게임이 있다. 일반적인 범죄스릴러 혹은 고전적 추리물이라면 빗나가던 공이 표적/범인을 명중하는 지점에서 끝난다(이것을 게임1이라 부르자). 이 게임의 재미는 가짜 표적이 얼마나 진짜처럼 보이느냐에 혹은 진짜 표적이 얼마나 가짜처럼 보이느냐에 달려 있으며, 당신은 안전한 의자에 앉아 창 너머 용의자들을 탐문한다. 이 게임을 관류하는 모티브는 오인이다. 거듭된 오인이 멈추며 표적/범인이 찾아지고 게임이 끝났을 때, 당신은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 밖의 실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자신이 표적/범인으로 밝혀지는 두 번째 게임은 주로 필름누아르의 것이다(이것을 게임2라 부르자). 이것은 매혹적이고도 음울한 게임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는 노력이 모두 실패하고, 둘의 차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주체는 사악한 운명 혹은 악마적 세계 자체이고 당신은 보이지 않는 지령의 에이전트였을 뿐이다. 운명 혹은 세계는 기소될 수 없으므로 이 세속 서사에서 피고는 당신뿐이다. 이 게임을 관류하는 모티브는 자기 오인이다. 당신은 오인된 주체라는 철학적 화두가 담긴 좀더 지적인 오락을 즐겼지만 의자에서 일어설 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그 끝에는 모호와 불안이
봉준호를 말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지만, 그의 영화는 실은 어느 쪽에도 전적으로 속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해도 그가 만든 네편의 장편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는 있으되 모두 스릴러 혹은 누아르의 게임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봉준호는 게임1을 진행시키는 척하면서 게임2를 다른 층위에서 은밀히 가동한다. 게임1은 늘 미결(<살인의 추억>) 혹은 불만족스러운 해결(<플란다스의 개> <괴물>)에 이르며, 게임2는 게임1이라는 현실 너머의 실재처럼 전체상을 드러내지 않은 채 게임1을 촉발하고 구부리고 교란하다 끝내 잠복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오인은 항상 자기 오인 위에서 작동한다. 혹은 게임2는 게임1의 무의식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게임2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재현될 수 없는 실재라기보다, 한국사회라는 특정 지역의 억압적 질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봉준호식 스릴러의 고유성은 게임1의 대중적인 장르 서사를, 지역정치학으로 번안된 게임2의 서사에 결합하는 방식에 있다. 사건이 일어나고(때로 이미 벌어졌고), 우리는 오인과 자기 오인이 중첩된 그리고 지역정치학이 개입하는 서사의 협곡을 지나 마침내 모종의 결말에 도달한다. 봉준호 영화의 대중성은 오인의 게임이 빚어내는 긴장과 반전의 흥분에 있을 것이며, 비평적 찬사는 주로 오인과 자기 오인이 분기하고 배열되는 그 구조의 정교함과 의도된 모호함, 그리고 복합적 함의에 바쳐질 것이다.
우리는 결국 봉준호가 설계한 게임의 끝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진짜) 살인자는 어디 갔을까?’ 그것은 정확히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서 박강두(송강호)가 어둠 속의 한강을 홀로 주시할 때 중얼거리고 있을 질문이다. 대답은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현남(배두나)이 객석을 향해 거울의 빛을 반사할 때, 혹은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박두만(송강호)이 얼빠진 표정으로 객석을 바라볼 때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대답은 “살인자는 (영화를 보고 있는)우리 속에 있다”일까, “살인자는 (영화를 보고 있는)‘나/당신’이다”일까. 봉준호는 그것까지 말해주진 않는다. 게임1이 최종적으로 무효화하거나(<살인의 추억>) 미봉된(<플란다스의 개> <괴물>) 자리에 틈입하는 불투명화한 게임2의 모호와 불안, 그것이 봉준호식 결말이다.
너무 많은 근친상간의 암시들과 이상한 사건들
<마더>는 봉준호의 영화 가운데 가장 복잡한 스릴러다. 사건이 복잡한 게 아니라 구조가 복잡하다. 사건은 오히려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자기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른 저능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목격자를 죽인 엄마의 이야기. 봉준호는 사건의 진폭을 줄이면서 오인과 자기 오인의 사슬이 사건을 압도하는 이상한 구조의 서사를 구축했다. 보통의 스릴러라면 정념은 사건이라는 원인의 결과로 발생한다. 봉준호의 전작들에서도 대체로 그러했다. 그러나 <마더>에서는 이미 오인과 자기 오인이 가닥을 정돈할 수 없을 만큼 얽혀 있고, 오인의 난마와 연관된 불안과 히스테리의 정념 위로 사건이 던져진다. 이것이 남다은이 적절히 지적한 “개별장면의 정서적 과잉과 영화 전체의 치밀하게 정돈된 느낌 사이의 간극”(<씨네21> 706호, ‘폐쇄적이고 슬픈 발악’)을 발생시킨다. 사건이 해결되어도 오인은 거의 해소되지 않는다. 차라리 사건은 현존하는 중첩된 오인의 한 증상이다.
이 영화에 비판적인 평자와 관객뿐 아니라 지지자들도 <마더>가 남기는 꿀꿀함, 찜찜함, 불편함을 말한다. 이것은 오인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쉼없이 등장하지만 서사의 전개에 실리지 않는 표정과 형상들, 동작과 행위들, 출구를 찾지 못한 근친상간의 암시들과 이상한 사건들. 불길한 얼룩 혹은 떨쳐내기 힘든 이명과도 같은 이 내러티브의 잔여물들은 오인과 자기 오인의 또 다른 증상들이며 사건 이후에도 이야기 주변을 맴돌면서, 유사 악몽의 공기를 만들어낸다. 봉준호는 전작들에서도 해소되지 않은 오인을 은밀히 남겨두었지만, <마더>에서 오인의 증상들은 사건을 압도한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엄마(김혜자)의 클로즈업숏에 담긴 과잉의 정념 외에도, 혹은 도준(원빈)의 종잡을 수 없는 무표정과 표정의 교차숏 말고도, 이 영화에는 그런 잉여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것은 특정 숏에 머물지 않고 어떤 신과 시퀀스에까지 번져 있다. 예컨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도준을 싣고 가는 경찰차가 교차로에서 다른 차와 충돌한다. 그 급작스러움과 충돌의 굉음 때문에 이 사건은 보는 이의 감각에 충격을 가하지만, 그 충격은 이후의 서사에 편입되지 못하고, 그저 어떤 감각적 기억의 잉여로 남는다.
또 다른 예는 진태(진구)의 방에서 증거물을 찾은 엄마가 커튼 뒤에서 숨어 있다가 나오는 신에서 볼 수 있다. 섹스를 하고 잠든 진구와 재수생 미나 몰래 방을 빠져 나오려다 엄마는 물통을 넘어뜨린다. 엎질러진 물은 방바닥을 흘러 잠든 진구의 손끝에 닿는다. 이 장면은 극접사로 촬영되었고 진태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있었기 때문에 화면은 폭발 직전의 긴장과 불안으로 흘러 넘친다. 그러나 다음 숏은 허무하다. 엄마는 무사히 빠져나오고, 진태는 비가 올 것이라 느끼고 밖으로 나와 빨래를 걷는다. 진태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밝혀지므로 이 신의 허탈한 느낌은 더 커진다. 바닥에 흐르는 생수와 비의 농담 같은 연상 혹은 오인.
시원한 여백은 불안과 신경증의 공백이 되고
정념은 흘러 넘치는데 이야기는 관심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진전하고, 때때로 신들은 마치 진태와 미나가 섹스를 하면서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말잇기 놀이처럼(스파게티-티파니-니미랄-알탕-탕평책), 일종의 말장난처럼 이어 붙어져 있다. 여기서 ‘말장난’은 폄하의 표현이 아니다. 도준의 기억 장치가 바로 그와 같기 때문이다. 말잇기 게임에서 단어와 단어는 음운상으로 연결되지만 의미상으로는 단절되어 있다. 단어들 사이의 의미의 공백, 혹은 공허의 심연 그리고 논리의 불능화. ‘가지런하게 정돈된 이야기’ 사이에 출몰하는 알 수 없는 어둠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화면 배율에 관한 정한석의 지적은 예리했다. 그는 지난호 <씨네21>에 실린 세밀하고 감성적인 평문에서 <마더>의 2.35:1의 화면비율은 인물의 감정을 보완하거나 어떤 미학적 구도를 위해 채용된 게 아니라, “한쪽에는 인물이 또 다른 한쪽에는 그 인물이 ‘알지 못하는 공백’이 동시에 있다는 인상”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시네마스코프의 시각적 쾌감을 과시할 수 있는 원경의 수평숏들(엄마가 빈 들판을 걸어가는 두 장면)에서조차 그 시원한 여백들은 불안과 신경증의 공백이 된다.
이 관람 체험이 괴이하고 불편하지만 어쩐지 낯익고 압도적인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우리가 꿈을 그런 방식으로 꾸기 때문이다. 도준의 기억 장치 혹은 말잇기 놀이의 구조는 꿈과 유사하다. 꿈은 내가 꾸지만 그 꿈의 사건들은 내 안의 타자가 만든 것이다. 오인과 공백과 그 꿈은 논리적 인과를 비웃으며 감각만 지닌 맹수처럼 맹렬하게 진전한다. 그런데 진전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도준의 대사, “왜 내가 여기 있지?”)? 이 질문을 잊지 못하는 ‘나’는 프로이트가 관찰한 대로 꿈에서조차 의식을 종종 개입시켜 무의식을 위장한다. 여기서 오인과 자기 오인은 정확히 겹쳐지며, <마더>는 이제 비유로서가 아니라 스릴러로서의 게임1이 정말 어떤 무의식에 직접 지배당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유사 꿈과 연관된 또 다른 장면 하나를 말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엄마가 도준이 차에 치는 교통사고를 목격하는 장면은 현실에서라면 내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사고를 우연히 보게 보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사고의 어떤 전조도 없는데도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한 엄마의 얼굴로 시작된다. 이 장면이 꿈처럼 느껴지는 것은 화면의 몽환적인 톤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불길한 예감의 표정이 초인적 모성 본능과 같은 아름다운 능력이 아니라 일종의 신경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꿈이라면 그 자리에 불려와야 하는 엄마의 자리는, 사건이 목격자를 위해 신청한 자리, 혹은 같은 의미에서 그 사건이 나를 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그러니까 내가 불려나오는 순간 사건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두번의 교통사고는 엄마의 소망?
끔찍한 것은 같은 자리에 반복해서 불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원하지도 않지만 꿈에서 우리는 그러하다. 정말 꿈과도 같은 첫 장면에서 들판에서 이상한 춤을 추던 엄마는 그 환상처럼 보이던 아름답지만 어딘지 음산한 그 들판으로 살인(목격자 노인)을 저지른 다음 피 묻은 얼굴로 다시 불려가야 한다. 엄마가 가게 안에서 길 건너편 도준을 보았을 때 교통사고는 두번 일어난다. 첫 번째는 도준을 친 뺑소니, 두 번째는 도준을 태운 경찰차의 충돌 사건. 더 끔찍한 것은 이것이 꿈이라면 엄마의 소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꿈은 내 안의 타자, 또 다른 내가 설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엄마는 이미 아들을 한번 살해하려 했던 사람이다. 꿈에서 예감, 예정, 소망은 구분되지 않는다. 면회 온 엄마에게 사슴 같던 도준이 갑자기 싸늘한 표정으로 “왜? 이번엔 침 놔서 죽이게?”라고 이죽거릴 때, 엄마의 심연에 아직 잠복해 있을지 모르는 그 소망에 대한 응답처럼 들린다.
침과 형상과 연관해 이 장면을 확대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허가 침술사인 엄마의 말에 따르면 맺힌 울화를 풀어준다는 그 침이 놓여야 하는 자리는 허벅지의 중간 어디쯤이다. 그곳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성욕에 못 이긴 과부가 바늘로 찌른다는 지점이며 <박쥐>에서 성욕을 참아야 하는 신부 상현과 생과부 태주가 자신의 신체를 학대해 피멍이 든 지점이기도 하다. <마더>에서의 침은 말하자면 성기의 대체재다. 숱한 근친상간의 암시가 제시된 뒤에 등장한 도준의 그 말은 “왜? 또 나랑 성교하게?”로 다르게 들을 수도 있다. 동시에 도준은 그것을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근친상간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이건 해석의 비약 같다.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하게 될 것이다.
외상적 사건 이후의 이야기
<마더>를 꿈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거나 이 서사가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도준과 엄마를 하나의 캐릭터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꿈과 유사한 그들의 교란된 정신 세계가 이 영화의 형식 자체에 감각적으로 전이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마더>는 게임1의 전개를 혹은 스릴러의 정연한 이야기를 지연하고 교란하고 오작동시키는 도준의 비정상적인 기억 장치를, 그리고 불안과 히스테리에 침전된 엄마의 시선과 판단을, 영화 전체로서 관객에게 메타적으로 체험케 한다는 것이다. <마더>에 필요한 질문은 누가 혹은 무엇이 이들을 이 자리에 불러왔는가, 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 봉준호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을 말하기에 앞서 엄마의 얼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엄마의 영화적 초상이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의 잔여물로서의 과잉 정념이 엄마의 얼굴에 새겨져 있다는 건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다. “내러티브에 접착되지 못하고 잉여적인”(김영진, <씨네21> 708호) 김혜자의 클로즈업의 ‘과잉’에 대해 남다은은 위의 글에서 “모호한 내면을 드러내주기”보다는 “누군가와의 교감을 통해 해소되거나 소통되지 않는 불안 그 자체만으로 프레임이 터질 듯, 그러나 터지지 않을 정도까지 팽창”시킨다고 썼다. 설득력있는 지적이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한 장면을 상기해보자. 여고생 아정의 시체가 옥상 난간에 이불처럼 걸린 채 발견되는 시퀀스의 마지막 숏에선 형사가 쭈그리고 앉아 아정의 거꾸로 선 얼굴을 바라본다. 보통의 스릴러에서 중요한 단서가 발견될 것 같은 형사와 시체의 시선 교환 숏(여기서 형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건 약재상에서 집 주인과 함께 엄마가 비스듬하게 목을 빼고 무언가를 보고 있는 정면숏이다. 여기서 엄마의 얼굴은 형사의 시선을 받는 시체의 얼굴의 자리에 놓인다. 형사는 시체의 얼굴을 보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영화 내내 우리는 엄마의 얼굴을 끊임없이 보지만 막연한 불안 외엔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이며 시체의 표정과 동질적이다. 우리는 얼굴로 그의 내면을 알 수 없고, 그의 표정은 사건에 가담하지 못한다. 요컨대 엄마의 얼굴은 지워진 얼굴이다.
물론 봉준호가 얼굴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합리적 주체의 초상’이라는 지위를 박탈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 ‘얼굴 해체 전략’(들뢰즈)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마더>에서 엄마의 얼굴은 오히려 회복되어야 할 결여에 가깝다. 남다은의 표현을 변용하면 그것은 불안이 팽창해 터져버린 이후의 얼굴이다. 폭발해 삭제된, 폭발의 흔적만 남은 얼굴, 사건 이후의 얼굴이다. 그 사건을 외상적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플레시백으로 설명되는 바, 그것은 동반자살을 의도한 엄마의 아들 살해 기도이다. <마더>는 외상적 사건 이후의 이야기이다. 그 사건을 말하지 않고 <마더>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외상적 사건은 결코 망각될 수 없다
흥미로운 점 한가지가 있다. 봉준호의 <마더>, 박찬욱의 <박쥐>, 이창동의 <밀양>, 이 쟁쟁한 세 감독의 최근작들은 모두 외상적 사건 ‘이후’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 사건이 놓인 자리와 비중은 모두 다르다. <밀양>에서 유괴된 아들의 죽음이라는 외상적 사건은 이 영화의 반을 차지한다. 나머지 반이 사건 이후를 다룬다. <박쥐>에서는 그 사건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상적 사건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고 신부 상현의 극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받아들이긴 힘들다(<씨네21> 705호, 졸고 ‘무한변주되는 근친상간의 신화’). <마더>에서는 회상장면으로 그 사건이 제시된다.
세 영화를 함께 언급한 것은 이들이 공히 외상적 사건 이후의 ‘망각의 기획’과 그 실패를 다루기 때문이며 우울증과 히스테리의 톤을 캐릭터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식에 새겨놓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획은 모두 실패하고 우울증과 히스테리는 지속된다. <밀양>과 <박쥐>의 주인공들은 모두 종교적 죄의식에로 도피를 통해 망각을 기도한다. <밀양>에서 신애의 기도는 실패하고 자살을 시도한 뒤 정신병원에 간다. <박쥐>는 이미 망각의 기획이 실패한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며 신부 상현은 자살을 감행하지만 다른 신체로 다시 태어난 뒤 다시 자살한다.
<마더>의 인물들이 택한 기획은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위태롭다. 도준은 저능아가 되어 그 기억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농약의 물리적 효과이기 하지만 그 기억을 유지한 채 성인이 될 수 없는 도준의 은밀하고 필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정상인과 저능아의 중간쯤에서 멈춰버린 엄마는(이 역시 살아남은 아들을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엄마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어 침(鍼)으로 울화를 가라앉히고, “그 때 약한 농약을 쓰는 바람에 같이 죽지 못했다”는 이상하게 전가된 작은 소동의 서사로 도피하려 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외상적 사건의 기억은 억압될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어둠의 틈이 별안간 내뱉는 돌처럼 예기치 못한 어느 순간 튀어나온다.
<마더>가 <밀양> <박쥐>와 다른 이유
그런데 <마더>가 다른 두 영화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망각을 시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외상적 사건이 ‘이후’의 서사에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물론 <박쥐>에서도 생략된 외상적 사건으로서의 근친상간이 은밀하게 변주되지만, 그것은 사적이며 신화적인 층위의 반복이다. <마더>에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반복된다. 나는 여기에 <마더>의 가장 무섭고도 중요한 전언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외상적 사건 이후에 살아내기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반복되는 한 살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밀양>과 <박쥐>가 외상적 사건 이후에 필사적으로 자신을 수습하려는 몸부림이라면 그래서 비극적 정념과 꺼질 듯 반짝이는 구원의 빛이라도 남겨두려는 안간힘이라면, <마더>는 그 수습이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자연주의적인 냉기의 시선으로 드러내며 모든 빛을 차단하는 영화다.
그런데 봉준호는 사태를 좀 복잡하게 만들었다. 엄마와 도준의 근친상간을 의미하는 말들이 넘쳐흐를 때 그 외상적 사건에 근친상간이 가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맥거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엄마와 아들의 서로에 대한 욕망의 시선이 텍스트 안으로 스며들지 않은 채, 그 욕망에 관한 말들만이 표면 위를 떠다닐 때, 우리는 그 말들을 텍스트의 심층으로 해석하려는 유혹에 빠지면 안된다.
그 풍문과 연관된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진태가 상의를 벗은 채 뒤돌아 앉아 있는 장면에서 엄마가 그를 잠시 도준으로 오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그러나 오히려 엄마와 진태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것에 가깝다. 진태는 잘 다듬어진 상체를 내밀며 놀랍게도 친구의 엄마에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고 쏘아붙인 뒤, “위자료 조로 500만 해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말들은 창녀와 기둥 서방의 말처럼 들린다. 아마도 엄마는 한때 진태와 성교했고, 그 대가로 용돈을 주었을 것이다. 의외의 지점에서 돌발적으로 발설된다 해도, 엄마가 성욕을 갖고 있으며 가난한 그가 성욕 때문에 아들의 친구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현실 인식에 균열을 일으킬 만큼 중대한 사건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준이 벽에 소변을 보는 장면으로 이것은 좀더 미묘하다. 엄마는 아들의 성기를 유심히 내려다본 뒤 방뇨가 끝나자 그것을 흙으로 덮고 벽에 남긴 소변 자국은 판자로 가린 뒤 자리를 뜬다. 엄마는 뭔가를 감추지만 감춘 것은 성욕이 아니다. 이 장면이 낯익다면 그것은 이 모자의 행위를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새끼의 배설을 없애고 냄새를 지우는 건 어미의 새끼 보호 행동 가운데 하나다. 외상적 사건 이후 아들은 저능아가 되었고, 엄마는 반저능아 상태로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들에게 동물적 생존 본능 외에 뭐가 더 남아 있을 것인가.
그들이 바로 창녀이고 바보이기 때문에…
언급을 미뤄온 반복되는 외상적 사건에 대해 말할 차례인 것 같다. 나는 다른 평자들이 이 영화의 정념과 불안과 광기를 말하면서 그것이 억압되거나 분출되어 사건화하는 사회적 장소를 말하지 않거나 너무 적게 말해온 것이 의아스럽다. 그것이 너무 뻔하게 드러나 있어서 말하는 것이 멋쩍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사회적 장소보다 개별적 증상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선 말해졌으나 비평에선 많이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함으로써 이 글을 맺고 싶다.
<마더>는 서사의 패턴에서 <플란다스의 개>와 유사하다. 죄는 계속 떠넘겨지고, 떠넘김의 와중에 갖가지 소동이 벌어진 뒤, 범인은 결국 드러나지 않고 떠넘겨진 죄는 무고한 희생자를 찾은 뒤 이야기는 종결된다. <마더>의 떠넘김은 훨씬 내력이 깊다. 엄마가 아들에게 농약을 먹였을 때 시작된다. 아들은 죄가 없지만 ‘가난이라는 죄’를 지은 엄마가 자신뿐만 아니라 무고한 아들까지 징벌하려 한다. 이것이 최초의 떠넘김이다. 물론 이것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다. 엄마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행위를 비난할 낯짝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마더>는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엄마의 원죄에서 비롯된 외상적 사건 이후에 게임1의 사건이 시작된다. 그 사건은 외상적 사건의 변주다. 도준은 아정을 살해했다. 그들을 그 어두운 골목길에 불러모은 건 쌀을 받고 몸을 팔아야 했던 아정의 죄다. 찢어지게 가난한 할머니의 손녀라면, 그가 엄마에게 징벌당했던 것처럼 그녀도 징벌당할 수 있다. 살인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한석의 말대로 인정 투쟁이지만, 동시에 상호 오인이다. 아정은 “나랑 함 할래? 너 남자가 싫어?”라는 도준의 말을 “창녀 주제에…”로 들었다. 도준은 “야이, 바보 새끼야”라는 아정의 말을 자신의 지적 수준을 묘사하는 말로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인한 이유는 그들이 바로 창녀이고 바보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인은 다시 자기 오인 위에서 작동한다.
무서운 일은 외상적 사건 이후에 이제 보이지 않는 손의 지령 없이도 ‘나’는 외상적 사건을 잊기 위해 혹은 자기 오인의 지속을 위해 끊임없이 죄를 떠넘기며 또 다른 외상적 사건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범인을 쫓던 엄마쪽도 마찬가지다. 그 골목길의 폐가에 있던 고물상 노인은 도준의 살인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살해당했지만, 그를 그 자리에 오게 만든 건 쌀로 여자를 살 수밖에 없는 그의 죄다. 이 대목이 매우 끔찍한 것은, 이 노인이 우연히 비를 맞고 있는 엄마와 길에서 조우하는 이전 장면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비에 젖은 엄마가 고물 우산을 말없이 집어들고 2천원을 들이밀 때, 노인 역시 말 없이 1천원 한장만을 뽑고 가던 길을 간다. 시네마스코프의 넉넉한 화면에 비로소 안정되게 두 사람이 좌우에 담긴 이 투 쇼트의 은밀한 정감과 유대를 나는 이 삭막한 영화의 유일한 위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상 없어도 좋았을 이 장면이야말로 모든 위안을 깡그리 삭제하려는 봉준호의 냉혹한 선택이라는 것은 노인 살해 이후에 알게 된다.
봉준호 전작보다 더 근본적인 정치영화
표적/범인 찾기는 포기되고, 찾기의 주체는 오히려 범인을 은폐하고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며 스스로 또 다른 범인이 되어버린다. 연대는커녕 같은 원죄를 나누어 가진 사람끼리, 그 원죄가 촉발한 외상적 사건의 증상을 떠넘기기 위한 살육전이 <마더>의 ‘이후’의 사건들이다. 그 사건들은 정확히 시체가 꼭대기에 걸려있어도 모두 침묵하는 하층민의 사회적 장소 안에서 회전한다. 이것이 도준의 대사 “다들 내가 죽였다 그러고, 그러다 보니 죄가 몇 바퀴 돌아서 나한테 오고…”가 정확히 뜻하는 바다. 놀랍게도 저능아 도준만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지옥 같은 전가(轉嫁)의 살육전의 구조를 심드렁한 말투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이 곳은 한국사회 전체나 공동체 일반의 환유가 아니며, 현남이나 강두 같은 실패한 소영웅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외상적 사건만이 끝없이 자기복제되는 그들만의 폐쇄 공간이다. 가난이라는 원죄 이후로 가난의 집단 내부에서만 외상적 사건이 영겁 회귀하는, 법과 제도는 오로지 그것의 외부로의 범람만을 차단하는 그래서 모든 죄가 그들 안에서만 회전하는 아수라의 폐쇄 공간.
마침내 필연적으로 최종적 희생자로 선택된 최하층민 종팔이, “엄마 없어?”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의 얼굴로 돌아온 엄마의 질문에, “울지 마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슬퍼할 자격을 묻는 냉엄한 질문으로 꽂힌다. <마더>의 엄마는 그 질문에 눈을 감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현남은 우리를 바라보며 거울 빛을 반사한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만은 우리를 놀란 눈으로 응시한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두는 우리의 눈을 대신해 괴물이 침묵하는 한강을 응시한다. <마더>의 첫 장면에서 흐트러진 막춤을 추던 엄마는 전작들의 마지막 장면을 잇는 듯 괴이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선 눈을 감고 모든 응시를 중단한다. 그리고 효도 관광버스 안에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동진이 봉준호와의 인터뷰에서 적절하게 묘사한대로 이 장면은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때마침 지고 있는 석양의 강렬하게 붉은 빛 때문에 더 이상 인물들은 따로 구분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보’인다. 엄마의 몸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우리의 응시를 교란하더니, 그의 형상이 실루엣으로 변해가며 버스 안의 다른 이들과 뭉쳐져 한 덩어리의 어둠이 되는 것이다. 봉준호는 평범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타자의 이름인 ‘엄마’를 등장시킨 뒤, 그를 우리가 바라볼 수 없는 따라서 이해도 연민도 불가능한 어둠 저편으로 몰고 가버린다. 그 어둠의 형상은 전가의 살육전이 영원히 그 내부에서만 교환될 그들의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이제 해가 지면 우리의 시선 앞에서 실루엣으로도 남지 않고 어둠과 완전한 일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엄마의 지워진 얼굴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국내적 국제적 억압 구조라는 이면의 질서가 스릴러의 게임에 접속된 이야기라면, <마더>는 돈과 계급의 이동 불가능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하층민의 사회적 장소 안에 (자기)오인된 살인 게임의 자동장치를 영구히 내면화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군부 독재에의 기억이 실린 <살인의 추억>이나 주한 미군의 추악한 비행(非行)으로 시작되는 <괴물>보다 규탄도 분노도 안타까움도 슬픔도 없는 오직 불안과 히스테리만이 범람하는 <마더>가 더 근본적인 정치 영화라고 생각한다.
봉준호는 대중적 스릴러의 서사를 믿을 수 없는 층위까지 밀고 간다. 대중영화가 현실의 고통을 재현할 때, 그것을 유희하는지 아니면 앓고 있는지의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봉준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우리가 연루된 어떤 실패를 자연화함으로써 그 실패의 통증에 일종의 운명적 비극의 정조 혹은 체념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은 아닐까? <괴물>은 저 미욱한 주인공에게 작지만 위대한 윤리적 선택을 배당함으로써 어떤 위안을 베푸는 건 아닐까? 그 질문 앞에서 봉준호는 <마더>의 서사를 앓음 쪽으로 힘껏 밀고 간다. 스릴러의 구조를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윤리적 선택은 물론 어떤 위안도 불능화하는 지점까지 밀고 간다. 이것은 대중영화로선 위험한 선택이지만 그 스스로 명명한 농촌 스릴러 혹은 제3세계 스릴러의 당당한 심화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