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유영식] “시나리오는 훨씬 야했는데…”
2009-07-10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오감도> 기획하고 그중 <33번째 남자> 연출한 유영식 감독

유영식 감독은 그동안 누군가의 더없는 ‘파트너’로서 소개돼왔다. 과거 <씨네21>을 들춰보니, ‘유영식 감독과 함께’라는 수식어 달린 기사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내 마음의 풍금>(1999) 프로듀서로 일을 시작했던 이력 때문인가. 지금까지 장편 연출작은 <아나키스트>(2000)가 전부다. <아카시아> <이공> <좋지 아니한가> 등에 참여하면서 그는 ‘감독’ 보다 ‘프로듀서’로 더 자주 불렸다. 제작비 규모는 저예산이나, 인력 규모는 블록버스터급인 <오감도> 또한 다르지 않다. 그는 <오감도> 중 한편인 <33번째 남자>의 연출자로 참여했지만, 그보다 먼저 <오감도>의 기획자다. ‘함께 만드니 더없이 즐겁다’는 그로부터 스케치부터 완성까지 3년이 걸린 <오감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시사회 때 무대에 오른 배우들만 무려 16명이다. 5명의 감독들은 마이크도 잡지 못했고, 아예 무대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그 많은 배우들이 쭉 늘어선 광경을 보고 우리도 놀랐다. 한자리에 모인 건 처음이니까. 이 예산에 배우들이 들어올까 걱정하던 감독들이었으니 더더욱 그랬을 거다.

-다섯 감독이 어떻게 모였나. 감독들 모두가 영화아카데미 출신인데, <이공>(영화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의 옴니버스 프로젝트)과 관련이 있나.
=의도한 건 아니고. <이공> 끝내고 다들 장편을 준비하던 차에 모 포털 사이트로부터 10명 정도의 감독이 참여하는 인터랙티브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관객과 온라인으로 소통해서 시나리오를 함께 만들고 오디션도 같이 진행하는 형태의 프로젝트였다. 몇달 정도 신나게 회의했는데 경기가 나빠지니까 ‘나 몰라라’ 하더라. 그 뒤로 비슷한 제안을 주고받은 포털 사이트가 다섯곳이나 된다. 그 와중에 감독이 여섯명으로 줄었지.

-또 한명이 누군가.
=이재용 감독. 이거 하고 가도 충분하다고 했는데, 신작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빠졌다. 그 뒤로 편집실에서 봤는데 ‘네 말이 맞았다’고 하더라. 촬영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됐으니까.

-외화 수입사였던 데이지엔터테인먼트에서 메인 투자를 맡았다.
=김원국 대표가 대학 후배다. 사무실이 좀 싼 홍대쪽으로 이사를 왔는데 근처에 데이지엔터테인먼트가 있었다. 그냥 술 마시러 놀러갔다. 요즘 외화 잘되냐고 물었더니 좀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농담처럼 벌었으면 한국영화 제작 좀 하라고 했다. 본인도 생각이 있다고 해서 얼마나 있냐고 했더니 여윳돈 다 끌어모으면 10억원쯤. 본인은 투자할 거면 메인을 하고 싶다고, 10억원으로는 어림없으니 다음에 돈 더 벌어서 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10억원으로 메인투자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웃음) 감독들 이름 듣고 솔깃해하는데 다 컨트롤할 수 있겠냐고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그 다음주에 감독들 다 불러서 미팅 자리를 만들었더니 바로 가자고 하더라. 세어보니까 데이지 전에 메인 부탁하러 찾아간 투자사가 17개나 되더라.

-‘에로스’라는 컨셉은 언제 정한 건가.
=포털 사이트와 제안을 주고받을 때부터 주제가 에로스, 돈, 도덕적 해이 등이었다. 극장 상영용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하나로 정해야 했고, 아무래도 관객이 가장 관심있을 법한 에로스를 택한 거다. 데이지쪽과 만나기 전에 감독들한테 던졌더니 다들 좋아했다. 허진호 감독은 ‘노’할 줄 알았다. 기대 않고 ‘에로멜로’를 해보는 게 어때, 했는데 자신한테도 이런 게 필요했다며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진지한 변혁 감독님도 숨겨놓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고. (민)규동이는 주제가 ‘에로스’라는 이유로 뒤늦게 합류했고. 오기환은 10대 스와핑 이야기로 장편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 내놓겠다고 덤비고. 오기환은 피칭할 때만 해도 가장 ‘화끈한’ 뭔가를 보여줄 것처럼 했는데 결과물은 너무 말끔해서. (웃음)

-기대만큼 안 야한데.
=시나리오는 훨씬 야했다. 허진호 감독 것은 정사장면이 훨씬 농밀하고, 변혁 감독 것도 후반부 정사장면이 훨씬 길다. 문제는 캐스팅이었다. 원래 김수로는 허진호 감독 단편에 출연 요청을 받았는데, 시나리오 보더니 와이프한테 혼난다면서 거절했다. 캐스팅이 난항을 겪으면서 시나리오 오래 붙들고 있기로 유명한 허진호 감독은 한달 동안 두번이나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신작 촬영 때문에 제일 먼저 찍고 중국에 가야 했으니까. 변혁 감독님의 경우, 장혁은 오케이를 했는데 여배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배우들 사이에서 <오감도>는 포르노다. 시나리오 받지도 보지도 마라, 그냥 벗기려 드는 영화다, 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원래 내가 마지막에 찍기로 했는데 1, 2번 타자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도 급해지더라. 일단 캐스팅부터 해야겠구나 싶었다.

-<33번째 남자>는 어땠나.
=수로는 야한 키스 정도는 할 수 있다면서 내쪽으로 왔고. (웃음) (김)민선이는 전작이 <미인도>였는데. 대개 (노출이 있는 영화를) 한편 찍으면 그 다음은 안 하는 게 원칙이다. 그걸 아는지라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아나키스트> 때 캐스팅을 했지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랑 겹쳐서 출연을 못한 적 있어서 그냥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자고 했는데, 먼저 시나리오를 재밌게 봤다면서 자청하더라. 배종옥 선배도 행운인 건 마찬가지였다. 만나자는 곳이 강남의 시끄럽기로 유명한 커피숍이어서 거절하시겠구나 싶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김희애씨 역할을 ‘배 선배가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이야기로 운을 띄웠는데 그냥 ‘깔깔깔깔’ 웃으시기에 아닌가보다 했다. ‘만나봬서 영광입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라고 말하고 일어설 뻔했다니까. 그랬더니 자신도 터닝 포인트를 찾고 싶었다면서 남자 잡아먹는 귀신을 하겠다고 했다.

-뱀파이어 아닌가.
=의상이나 분장 때문에 그런 건데. 실제로는 요괴다. 제주도 물귀신에서 힌트를 얻었다. 남자 잡아먹어서 힘을 얻고, 해녀를 물면 물귀신의 힘이 전해진다는. 대개 뱀파이어에선 여성이 에로스의 대상인데 구전설화 속 요괴는 그게 아니어서 흥미로웠다.

-<33번째 남자>는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다. 심각하다 싶으면 웃기고, 웃기려 하는구나 하면 겁주고.
=다들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난 뭘 하지, 아예 거꾸로 가자 싶었다. 이야기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엎치락뒤치락 요동치게 하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했던 거지.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한데 묶였기 때문에 다양한 변주가 가능했을 텐데.
=처음엔 <그녀의 벨리댄스>라고, 비행기에서 만난 문신한 여자와의 하룻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변혁 감독님 것과 똑같았다. 뭘로 바꾸지 했는데, <아카시아> 프로듀싱할 때 생각이 났다. 더운 여름에 밤샘 촬영하다가 심혜진씨랑 귀신영화를 찍는데 실제 배우가 귀신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진짜 귀신인데 감독한테 연기 못한다고 욕먹고. 현장에서 보면 감독들의 심각한 고집이 누군가의 눈에는 코믹하게 보일 때도 있다. 여기에 물귀신 이야기까지 합쳐지면서 호러와 코미디와 드라마가 한데 섞인 거지.

-6회 촬영이었으면 빠듯했을 텐데. 편당 예산은 어느 정도였나.
=1억2천만원 정도. 아카데미 때 학습해서인지 다들 고집 안 부리고 잘해냈다. 변혁, 오기환 감독은 조감독이나 촬영감독이 한번 더 가자고 하는데도 오케이라면서 제작자처럼 몰아붙였으니까. 배우가 안 벗어, 그럼 나 안 해, 모두 철수, 이런 식이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HFR, 라이브톤 같은 후반작업업체들도 고맙다. 의리 때문에 했는데 막상 맡고 보니 한편이 아니라 다섯개의 작품을 떠맡은 셈이 됐으니까. 비용은 1/5밖에 못 받고, 그것도 다섯달씩 붙잡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들 아니었으면 완성도 못했겠지.

-<33번째 남자>는 촬영현장이 주무대이다 보니 다른 작품들과 달리 출연자 수가 많다.
=많게는 60명도 나온다. 그런데 다 친척이고 스탭이다. 내 조카도 나왔고, 김동현 배급이사도 카메라맨으로 나왔다. 우정과 협박으로 찍은 거지. 한번은 36시간 찍은 적도 있었는데 엑스트라들이었으면 난리났을 거다. 식구들이니까 아무 말 못하고 세트에 갇혀 있었지만. 배종옥 선배가 아니었으면 현장 진행도 원활하지 않았을 거다. 배 선배의 경우 싫어하는 후배들이 없다. 첫 장면이 정사신이었는데, 새벽 6시부터 촬영했는데도 무리없이 원하는 걸 내주셨다. 스마트한 분이다. 배우들과 스탭들 없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오감도>의 기획자이기도 하니, 다른 현장에도 가봤을 텐데.
=허진호 감독은 장소가 한곳이라 스탭들이 먹고 자고 찍었다. 오순도순 가정집 분위기였다. 반면 변혁 감독님은 장소 이동이 워낙 많았다. 다른 영화의 촬영이 근처에서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쪽 스탭들은 우리 보고 학생영화 찍는 걸로 오해할 정도로 스탭 수도 작았다. 오기환 감독은 지방촬영에 주요 배우만 6명이고 제출한 회차만 10회차라 걱정이 많았는데 실제로는 가장 여유롭게 찍었다. 커피도 마시고 밥도 얻어먹고 왔으니까. (민)규동이는 너무 분량이 많아서 아예 말도 못 붙이고, 대신 배우들하고 수다 떨다 돌아왔다.

-조금 더 넉넉한 환경이었으면 어땠을까.
=<오감도>는 10억원이라는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아쉬움은 물론 남는다. 아까 안 야하다고 했는데 진한 관계를 찍으려면 먼저 친숙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는 잘 벗는 배우들을 쓰라고 하는데, 연기가 그보다 더 우선이었다. 김효진-엄정화의 동성애 연기나 김민선-배종옥의 키스신은 프로가 아니면 짧은 시간에 쉽게 해낼 수 없는 장면들이다.

-관객은 후반부에 갈등이 어떻게 풀릴지 하는 쪽으로 관심을 쏟게 마련이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새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들춰야 하는 식이라 조금 버겁더라.
=3편 이상 모으기는 힘든 것 같다. 영화의 시간이나 관객의 반응 구조를 간과한 셈이다. 멀티 플롯에 대한 고민도 부족했고. 극장 상영에 있어 단편이나 옴니버스는 안된다는 편견을 깨보고 싶었고, 영화 관람 뒤 ‘볼 건 하나밖에 없어’라는 관객의 불만을 ‘<오감도>는 다섯개는 있어’라는 식으로 충족 시켜주고 싶었는데 구성 면에서 치밀하진 못했다. 다른 옴니버스 프로젝트를 한다면 좀더 한계들을 많이 부여해서 한데 모아지는 형태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데뷔작 <아나키스트>를 제외하고 장편 연출작이 없다. 주위에서 감독이냐, 프로듀서냐 많이 놀릴 것 같은데.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스스로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넌 감독 하지 말라고 하지만. (웃음) 건축을 전공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전체를 보고, 그 안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다. 남들은 피곤한 스타일이라고들 하지. 연출을 하면서도 예산 진행을 신경 쓰니까. 프로듀서보다 연출자로 남고 싶지만, 좋은 기획자로서의 욕심은 있다. 내가 좋아한다고 내가 다 만들 수는 없으니까. 영화라는 것이 지독한 통속의 영역인데, 그 안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재미는 연출이든, 기획이든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지금은 프리랜서의 몸이다.
=다다필름, 프로젝트 그룹, 무사이 필름을 돌면서 허덕허덕했다. 프리랜서가 된 지금은 외려 편하다. 뭐 먹고사냐고들 걱정하지만.

-영화아카데미에선 무슨 강의하나.
=연출쪽 강의를 할 때는 프로듀서로서의 전체 진행이나 기획 강의를 했다. 지금은 프로듀서 과정에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번엔 거꾸로 시나리오와 연출에 대해서 가르친다.

-본인이 다니던 때와는 분위기가 다를 텐데.
=우리 때는 지방 흥행사들의 보따리로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라 기대도 없었다. 그냥 영화 하고 싶어서 부모 말 안 듣고 무작정 왔다면 지금 친구들은 훨씬 민감하다. 어떤 감독으로 자신을 포장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 고민들이 구체적이다. 트렌디한 거지.

-장편 준비는 어떻게 돼가나.
=뮤지컬영화로 1930년대 모던 구락부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시나리오가 거의 나왔다. 괴팍한 시한부 아버지 이야기도 하나 있고. 제작사, 투자사 거치다보면 좀 진이 빠지는 게 문제다. 숙고는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고갈되니까. 그래도 어쩌겠나. 먹고살려면 뛰어야지.

-근대의 풍경은 창작자들에게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반면 관객의 호응은 그만큼 높지 않다.
=시대의 재현에 너무 짓눌려서가 아닐까. 호기심과 특이성만으로는 접근해선 안될 것 같다. <아나키스트>를 찍을 때도 많이 느낀 것이지만 좀더 탄력적인 드라마가 필요하다. 1930년대를 무대로 하는 <Always>(가제)도 구상 단계지만 고전 뮤지컬이 아니라 요즘 현대의 노래를 입힌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형태다. 현대에 맞게 튜닝할 계획이다.

-아무리 줄여도 10억원 갖곤 안되겠는데.
=제작비 줄이는 노하우가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되겠지. 일단 <오감도>가 잘됐으면 좋겠다. 관객 80만명 넘으면 김동현 배급이사가 홍대 주차장 골목에서 클럽데이에 웃통 벗고 뛴다고 했는데. (웃음) 요즘은 뭐 하나 나오면 응원해주는 분위기니 외려 기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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