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미를 사랑니로 기억했다. 스크린 속 그녀는 항상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상황에 둔한 듯 방황했다. 사방에 벽을 두른 듯 혼자였고 동시에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불안한 정서가 관객의 마음도 움직였다. 그녀는 좀처럼 잡아 세울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래서 <10억>과 <차우>는 의외였다. 서바이벌 게임과 멧돼지 사냥 설정은 정유미에게 모험극처럼 보였다. 누구보다 바쁜 2008년과 2009년을 보내면서 그녀는 어떤 기억을 들춰낸 걸까. 그리고 어떤 기억을 쓰려 하는 걸까. 그저 대중적인 행보라 말하기엔 아쉬운 구석이 많다. 이젠 그녀를 무어라 부르게 될까.
-2008년과 2009년 매우 바빴을 것 같아요. 일단 작품 순서를 좀 정리해보고 싶은데요.
=지난해 초에 <그녀들의 방>을 찍었고요. 그리고 <오이시맨> 3회차 찍고. 다음에 <차우>.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찍고, <첩첩산중> 찍고. 정성일 선생님 거(<까페 느와르>). 다음에 <10억>.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나요.
=아무래도 2007년에 드라마 하나 하고 본의 아니게 휴식의 시간을 가졌잖아요. 자신감이 이만큼 찼다가 떨어졌던 때라. 하지만 그때는 그랬어야 하는 시간 같고. 드라마 마치고 원래는 정성일 선생님 거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작이 늦어져서. 그러다 작은 기회들이 있었고.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니까. 근데 또 이것저것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웃음) <씨네21> 인터뷰 기다렸어요. 예전에 김도훈 기자님이 청춘스타 계보학이라고 기사 쓰신 거. 내게 있을 줄 몰랐는데 그 기사 보고 나도 모르는 내가 있구나, 나를 이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랬어요. 나를 청춘으로 표현했는데 정작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진 않고. 그렇다면 뭘까. (웃음) 그때 그거 읽고, 맞아. 생각했어요. (웃음)
-그렇게 침체됐던 자신을 추스르면서 생각했던 게 있어요?
=스스로 에너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여야지가 아니라. 왜 어떤 식으로든 연기를 하려면 경험을 해야 하는데 저는 현장에서 경험하는 게 다잖아요. 근데 그게 없잖아요. 계속 집에 가만히 있고 혼자 생각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뭐가 되지 않는다 생각했고. 또 그런 시기는 충분히 지냈다고 생각했고. 그럼 이제는 뭔가 부딪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느끼고 싶었어요. 힘들 때도 있고 서운할 때도 있고 재밌을 때도 있지만, 그런 감정의 조그만 것들. 그런 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2007년에 했던 드라마 <케세라세라>는 무척 하기 싫어했었다고 들었어요.
=처음에는요. 당시는 영화도 제대로 못했는데. 나는 못해, 안 해, 안 할 거야, 그랬어요. 근데 주위에서 만나보고 고민해도 되지 않겠냐고. 그래서 감독님 만났는데 너무 좋았어요. 또 그 자리에서 김선아 언니가 전화를 한 거예요. 친분은 없는데. 언니가 전화에서 감독님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내 이름은 김삼순> 하면서 좋은 거 많이 느꼈다고 그러는데. 내가 뭔데? 참. (웃음) 신기한 거예요. 그래서 알겠습니다 하고 끊고 고민은 했는데. 너무 계속 벽을 세워놓고 안 하는 것보다 뭐든 경험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주변에서 김윤철 감독님이 드라마계의 김태용이다. (웃음) 느낌이 다르지 않았어요. 상황 자체가 신기했어요. 고맙고 재밌는 상황.
-<차우>는 어떻게 선택한 건가요.
=요즘 인터뷰하다 보면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왜 선택했냐고 질문해요. 충분히 그런 이야기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전 전혀 어색할 거 없다고 생각했고.
-<차우>와 <10억>이 지금까지의 영화와는 좀 다른 느낌이에요. 같은 극영화지만 픽션에 더 가까우니까요.
=일단 많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어쨌든 대중적인 인지도가 필요한 거 같고. 그걸 통해 얻고 싶은 게 있어요. 솔직히 이전에 제가 찍었던 영화는 나만 좋고 우리만 좋다고 봤잖아요. (웃음) 너무 아까운 거예요. 다 좋아해줬으면 좋겠고. 재밌는 영화 진짜 많잖아. 그런 것도 내가 좀더 알려지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싶었고. 일단 수련은 캐릭터로 치면 제일 능동적이고 앞뒤 막힌 거 없고 시원시원해요. 예전엔 캐릭터나 이야기에 끌려서 선택을 하진 않았거든요.
-수련 캐릭터를 보고 이전까지의 역할에 답답함을 느낀 건가 싶기도 했어요.
=<그녀들의 방>을 하고 나니까 그 기분이란 게 참. 시나리오 좋았고 영화 자체론 너무 재밌게 찍었지만 이게 (전환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오이시맨>을 했던 거고. 풀어야 할 느낌으로. 또 3회차 찍고 나니까 에너지를 많이 얻었어요. 용기도 생기고 자신감도 붙고. 그래서 <차우>가 가능했던 거 같아요. <그녀들의 방>은 캐릭터가 힘든 거라. 몰입을 했다기보다 좀 웃긴 표현인데. (웃음) 예전에는 갖고 있던 걸 안고 갔다면 이제는 좀 떨쳐버리고, 던져버리고 싶은 거예요.
-홍상수 감독 영화는 어떻게 출연한 거예요?
=사람 인연이 참 신기해요. <사랑니> 하면서 알게 된 언니가 홍상수 감독님이 영화 준비하는데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진짜요? 신기하다. 벌써? 이랬어요. 그래서 찾아뵙고 고민 좀 하겠습니다, 그랬는데 그냥 하자고. (웃음) 고민 많이 했어요. 대본도 없지, 뭔지도 모르지, 감독님 영화 난 잘 알지도 못하지. 근데 고사 날 제목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고 배역은 후배의 처야. 모든 걱정이 사라졌어요. 진짜 재밌을 것 같고. 제목이 너무 좋았어요. 찍을 때는 대본도 당일 나와서 외우기 힘들었는데 하고 나서는 너무 좋았고. 이걸 한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전까지의 영화는 카메라가 정유미란 배우를 따라가는 느낌이 컸어요. 근데 <차우>나 <10억>은 세워진 카메라에 정유기가 들어와야 하는 느낌의 작품이에요. 순간 몰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고요. 촬영 순서도 뒤죽박죽이었을 테고요.
=장난 아니었어요. 사실 말이 안되는데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고 해야만 하고. 도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전에 다른 거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당황했을 거예요. <사랑니> <가족의 탄생> 찍고 갑자기 이 작품 했으면요. 근데 드라마도 했고, <그녀들의 방>도 저예산이라 순서대로 찍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자신도 조금 열려 있었으니까.
-쉽게 적응이 됐어요.
=당연히 안됐죠.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고 다르게 가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보시는 분들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똑같이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랑니> 때 한 인터뷰를 보면 카메라에 본인이 어떻게 찍힐지 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어요. 그걸 점점 알게 된 과정이 있었을 텐데요.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해요.
=아직까지도 모르고 싶어요. <가족의 탄생> <사랑니> 때 그런 이야기 들어서 의식을 했나 봐요. 맞춘다고 틱 했는데 촬영감독님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너는 너가 할 것만 신경 써. 그건 우리가 할 일이야. 그러는데 진짜 완전 고마운 거예요. 와, 마음대로 해도 되는구나. <차우>나 <10억>을 찍은 것도 그런 걸 배우려고 한 것 같긴 해요. 항상 혼자만 했는데 같이 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 근데 일을 하다보면 받아들여지는 게 있잖아요. 아직 알긴 싫어요. 그러면 큰일나, 미쳤어? 이러기 전에는. (웃음) 그냥 모르고 싶어요.
-벌써 연기한 지 5년째예요.
=나이도 들었고. 그냥 잘 모르겠어요.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요즘 보면 나 안 같아. 쟤가 누구지? <사랑니>는 보면 힘이 생겨요. 아, 연기할 때 어려움이 생기거나 고민하고 이럴 때 <사랑니>랑 <가족의 탄생> 보고 나가요. 그때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때 기운이 있다면 뭐든 겁날 게 없을 거 같아요.
-영화, 연기밖에 없다는 식의 말을 종종 하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그런 말 잘 못했는데요. 보여드린 것도 솔직히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이런 말 해본 적 없는데요. 진짜. 대학 다닐 때부터 이거밖에 생각 안한 거 같아요. 영화가 중간에 중단돼도 계속 내 옆에 있는 거잖아요. 촬영을 할 때도. 어떤 식이든 지금은 그게 있다는 걸 마음껏 즐기고 싶어요. 그러니까 있어주는 게 너무 고맙고. 그러니까 정말 열심히 잘하고 싶어요. 지금은 그렇고. 참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