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이야기하기의 은밀한 유혹
2009-07-23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당신이 손영성의 매력적인 데뷔작 <약탈자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손영성의 불길하고 건조하고 매력적인 데뷔작 <약탈자들>은 막상 말하기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영화다. 개별 시퀀스는 대개 엄격한 자연주의적 묘사로 채워지는데, 시퀀스들의 배열은 거의 난센스에 가깝기 때문이다. 회상장면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회상이 꼬리를 물고 중첩되면서 우리는 어떤 시점부터 그것이 언제의 회상인지 또 누구의 회상인지, 혹은 허구인지 실제 사건인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가, 어느새 종점에 도착해버린다. 여러 면에서 함께 거론될 만한 백승빈의 멋진 데뷔작 <장례식의 멤버들>도 경쾌하지만, 이 영화에 비하면 차라리 고전적으로 보인다. 물론 <약탈자들>의 형식적 도발은 전적인 혁신이라기보다는 감독 스스로 밝힌 대로 앞선 영화들과의 교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과도 배타적 혈연을 맺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혼란스러운 여정 끝에는 “모두 개뻥이야”

손영성이 인터뷰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루이스 브뉘엘의 <자유의 환영>은 종종 개별신 내부에서 핍진성이 폭파된다(예컨대 상류층 인사들이 테이블 주변에 마련된 변기에 앉아 고담준론을 나누는 장면). 반면 자의적이지만 시간적, 공간적, 연속성이 지켜지는 배열은 <약탈자들>에 비해 오히려 가지런해 보인다. 손영성이 조감독으로 함께 작업했으며, <약탈자들>을 보고 즉각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홍상수의 영화는, 비관습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개별신 내부에서 그리고 그들의 배열에서 다른 층위의 핍진성을 제기한다. 홍상수는 관습적 형식을 비틀 때에도 그것이 실재감을 넘어서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요컨대 <약탈자들>은 개별신에서 홍상수의 차가운 극사실적 묘사로부터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구성과 배열에선 브뉘엘의 자의성의 형식을 더 과격하게 밀고 나간(혹은 초기 브뉘엘의 노골적 초현실주의에 가까우며, 감독 스스로는 타란티노와의 교감으로 설명하는) 아방가르드의 자세를 취한다.

브뉘엘과 홍상수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사물의 구체성 혹은 질료성에 대한 감각이다. 의미화되지 않고 오히려 침묵함으로써 의미화 작용을 압도하는 구체적 사물들 혹은 사물화되는 몸짓과 표정과 사건들. 사물은 우연적이다. 우연한 사물들이 반짝일 때 인과론적 필연성은 추방되고 그 자리에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사물의 구체성을 추상적 의미로 길들이지 않는 두 감독의 서사는 우연성 위에 세워진 미스터리로 나아간다. 이 미스터리를, 장르의 미스터리와는 다른 의미에서, 존재의 미스터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손영성에게도 예민한 유물론적 감각이 있는 것 같다. <약탈자들>은 장르로서의 미스터리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르로 포섭될 수 없는 사물과 사물화된 표지들이 범람하는 존재의 미스터리에 이끌린다.

그러나 <약탈자들>에 한정한다면 손영성은 사물들에서 어떤 반짝임의 순간으로 나아가지 않고 돌아온다. 돌아온 곳은 앞당겨 말하면 관습적 서사의 폐허, 역사와 이야기가 모두 실패한 지점이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그 지점은 그의 유물론적 감각이 출발점으로 삼았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그 지점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굳이 그 혼란스러운 여정이 필요했을까? 달리 말하면 그 여정이 “모두 개뻥이야”(주인공의 대사)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가 될 때, 더 분방하고 더 과격해 보이는 <약탈자들>의 형식은 결국 단순한 형식 유희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논리적으로 답해질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은 아니지만, <약탈자들>의 미로를 다시 걸어가는 데 하나의 길잡이는 되어 줄 것이다.

범죄이야기인 동시에 이야기꾼의 영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병태가 죽었다. 장례식장에 세 친구 성익, 정훈, 상동이 모이고 조금 뒤에 그들 모두 알고 있는 여인 은영이 도착한다. 그들은 지금 경찰서에 있는 선배 상태가 병태 살해 용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상태에 관한 회상을 시작한다. 최근 모종의 이유로 학교를 그만둔 역사학자이며 ‘금정굴’에 관한 논문을 쓰는 상태는 그들의 회상에서 ‘호색한 혹은 성추행자’, ‘표절가’, ‘친일파 자손’, ‘살인무예 전승자’로 언급된다. 이 언급들이 상태라는 실재는 결국 알 수 없는 대상이라는 식의 결말로 이어진다면 이 영화는 최선의 경우라도 <라쇼몽>의 재치있는 번안에서 그쳤을 것이다. 물론 손영성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상태를 설명하는 말들은 ‘상태가 병태를 살해했다’는 추정된 사실을 결과의 자리에 놓고, 그 원인의 자리에 불려 나온 기억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금 모두 어떤 범죄 미스터리의 이야기를 쓰는 중이다. <약탈자들>이라는 영화의 이야기도 외견상 그 해명을 향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약탈자들>은 범죄 이야기이면서 이야기꾼의 영화이다. 내 생각에 손영성의 관심은 사건이 아니며 심지어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야기꾼 혹은 이야기 하기의 행위와 욕망이다.

여기엔 몇 종류의 이야기꾼이 등장한다. 첫 번째 부류의 이야기꾼은 장례식의 멤버들이다. 그들은 가장 형편없는 이야기꾼이다. 상태에 관한 그들의 언급은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모두 일종의 풍문으로 제시된다. 게다가 ‘표절가’, ‘친일파 자손’, ‘살인무예 전승자’는 다른 이의 회상장면 안에서 상태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이다(이중에서 ‘표절가’는 정훈의 회상장면 안에서의 상태의 회상이라는 이중 회상에서 상태가 듣는 말로 지나가듯 흘러나온다). 이 멤버들은 상태의 그 고백들에 대해선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하다.

그들이 사건으로 확인하는 것은 상태가 ‘여자를 밝힌다’는 사실밖에는 없다. 게다가 사건으로 묘사되는 것만으로는 상태의 여자에 대한 태도가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다. 상태의 여자 밝힘만을 규탄하는 이유는 그들의 질투심 때문일 것이다. 정훈을 제외한 성익, 상동, 병태는 은영을 은근히 좋아했으나 은영은 상태의 여자였다. 부상당한 채 발견되는 금정굴 여인의 몸을 상태가 마사지하는 모습을 성익은 질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고, 상태가 학장 조카 민정과 관계를 맺는 사실을 아는 정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애초엔 은영을 맡은 배우 염지윤에게 은영, 민정, 금정굴 여인의 1인3역을 맡기려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여자를 밝힌다는 것이 살인의 원인이 될 수는 없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는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본론을 말하지 못하고…

그들의 유일한 공헌은 회상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그 회상을 통해 두 번째 부류의 이야기꾼 상태와 병태가 등장한다. 그들은 지금 이곳의 장례식장에 부재한 인물이며, 추정된 가해자와 피해자이다. 그들 사이에 살인을 촉발할 만한 어떤 대립이 과연 있었을까. 손영성은 우리가 그들의 관계를 잘 알겠다고 말할 수 있도록 묘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역사를 말하려는 상태와 이야기를 말하려는 병태는 이야기의 윤리를 놓고 싸우고 있는 중이다.

상태는 상동의 회상장면에서 상동에게 의미심장한 일장 연설을 한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금정굴이라는 현재 밑에 과거가 있고, 과거라는 지층마다 시점이 다르다. 일제시대, 6·25,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던 시대, 군부독재 시대, 그리고 지금의 자본주의. 이렇게 시점이 다 다르다. 이 역사 속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아무도 모른다. 이건 누구를 객체로 놓고 주체로 놓느냐, 그 시점마다 다 다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점이 다를 뿐만 아니라 미세하게 변하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점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윤리가 필요한 일이다.”

금정굴에 관한 논문을 쓰는 상태는 역사가이다. 그는 허구의 이야기를 거부하고 진실의 역사를 주장한다. 상태의 맞은편에 시나리오를 쓰는 병태가 있다. 병태는 상태가 증오하는 이야기꾼이다. 상태는 위의 연설 끝에 덧붙인다. “그런데 병태 같은 애가 이 지층의 무게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얘는 끝없이 나불대기만 하면 되는 줄 안다.” 지층의 무게로 장난을 친다는 병태가 들려주는 금정굴에 얽힌 복수극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친일파에게 광산을 빼앗기고 살해당한다. 그리고 6·25가 터진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복수를 하려다가 친일파 원수에게 좌익으로 몰려서 금정굴에서 죽게 된다. 이제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무술을 익혀 천하의 고수가 된다. 그런데 이번엔 원수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절망한 주인공은 자살을 시도하는데 무술의 고수여서 죽지 못한다.”

이쯤 되면 혼란스러운 다중 회상의 와중에 뭔가 그럴듯한 대립항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역사와 이야기, 진실과 허구, 윤리와 유희, 실재와 환상 등등. 하지만 이 대립은 거의 실없는 것이다. 상태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데다 시점(時點)과 시점(視點)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사학자의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더구나 정훈의 회상에서 상태는 “역사란 게 다 개뻥이야”라고 말했고, 증조부가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역사 공부를 더 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늘어놓는 한심한 인간이다. 그는 성익의 카페에서 “분명히 아는 노래인데, 제목도 가사도 멜로디도 생각이 안 난다”고 말하는데, 그가 쓰려 하는 ‘금정굴의 진실’도 그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익의 말대로 “그건 아는 게 아닌” 것이다.

허접하기로는 병태도 못지않다. 그가 재미있다고 늘어놓는 이야기는 아무런 매력도 없는 억지춘향이다. 적어도 <약탈자들>이라는 영화 안에서 역사도 이야기도 어떤 성취에 이를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니 이 영화를 관습적인 역사와 관습적인 이야기에 대한 조롱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조롱이 조롱으로 성립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충분히 강력해야 한다. 이 어쭙잖은 역사가와 이야기꾼은 그저 역사 말하기, 이야기 말하기의 충동만 있을 뿐이며, 강한 대상이 될 가능성이 전무한 족속들이다. 그들은 결국 본론을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한심한 말, 역사/이야기의 어쭙잖은 서론만 계속 듣고 있어야 할까.

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이야기

여기서 세 번째 부류의 이야기꾼이 등장한다. 바로 연쇄살인범 택시기사와 살인무예 뫄한머루의 전승자이다. 이중 회상 혹은 3중 회상의 와중에 비로소 등장하는, 그 실존 여부가 의심스러운 그러나 장르적으로 흥미로운 존재들. 여기서 우리는 다소 까다로운 문제와 만난다. 먼저, 회상된 사건을 실제 사건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 회상은 편집되고 각색되며 상상이 추가된다. 홍상수의 <오! 수정>을 잘 알고 있을 손영성도 회상의 자의성을 은밀히 드러낸다. 예컨대 은영의 회상에서, 성익의 카페에 앉아 있던 은영이 화장실에 간 사이 성익은 은영의 외투에 코를 대고 여인의 냄새에 탐닉한다. 이 행위는 물론 은영이 볼 수 없었으므로 은영의 상상이다.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의 회상 안에서 발생하는 이중, 삼중의 회상들이다. 회상장면의 등장인물이 그 안에서 회상하는 것, 혹은 2중 회상 안에서 다시 회상하는 것. 물론 이중 회상이나 회상 주체가 없는 비인칭 회상이 그 자체로 새로운 방식은 아니며, 사건을 보충 설명하기 위해 대중영화에서도 드물지 않게 사용된다. 그런데 <약탈자들>의 다중 회상은 사건을 보충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사건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회상이 거듭될수록 회상장면은 회상 주체로부터 이탈하고 시점(時點)도 모호해지며 사건의 진상은 그 사이에서 증발해버린다. 회상된 이야기들은 점점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약탈자들>의 중첩된 회상에서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그러나 믿기 힘든 개별적 사건이라기보다 이야기의 이러한 운동 방향인 것 같다. 꼬리를 물고 자기 증식하는 것처럼 번져가며 시점(視點)도 시점(時點)도 불투명해지는 황당한 이야기들.

무예가와 택시 기사는 중첩된 회상의 꼬리에 등장한다. 택시 기사는 영화의 첫 장면인 성익의 회상에 등장하는 금정굴 여인의 이중 회상에서 그녀를 살해하려 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며칠 전에 본 <혹성탈출>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읽은 이야기를 이야기하려는 사람이며, 그 이야기를 상대가 듣지 않을 때 무참한 살인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무예가는 상동의 회상(며칠 전) 속의 병태의 회상(군대 시절) 속의 상태의 회상(어린 시절) 속이라는 3중 회상으로 등장한다. 목매 달고도 죽지 않는 무예 고수인 그는 어린 상태와 은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15살 때 부모가 살해당한 뒤 원수를 갚기 위해 무예를 익혀 천하의 고수가 되었고…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번뇌에 빠졌다가… 마침내 원수의 꼬리를 밟았는데….”

이쯤 되면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병태의 금정굴 시나리오와 이 무예가의 체험담은 매우 비슷하다. 문제는 이것이 지금 상태가 군대 고참인 병태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상태가 혐오한 병태의 시나리오는 실은 상태 개인의 역사/이야기이다. 앞선 장면에서 병태가 자신의 시나리오를 말하다가 상태에게 “이거, 군대 있을 때 내가 형한테 이야기한 것 같은데”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 반대이다. 하지만 중첩된 회상의 미로에서 이미 허구와 실제, 환상과 현실의 구분도 무너진 시점에 기원을 따지는 것은 이미 무의미할 것이다. 상태의 역사(진실)과 병태의 이야기(허구)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들은 형제 혹은 동일한 존재가 된다. 진실의 열쇠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 어린 시절의 자리에 버티고 있는 부실하고 불완전한 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이야기. 기원의 자리에 있는 누추한 허구.

야심차고 괴이한 데뷔작이로다

마지막 한방이 있다. 무예가가 회상을 시작한다. 이것은 4중 회상이다. 원수의 자리에 등장하는 것은 첫 장면의 택시 기사이다. 폐건물 옥상이라는 장르적 공간에서 장르적 음악과 함께 무예가와 택시 기사가 마주선 순간, “그놈이다”라는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바로 현재 시점의 택시 기사가 등장한다. 전 장면은 4중 회상된 무예가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택시 기사의 회상이다. 택시에는 택시 기사의 이야기는 무관심한 채 통화만 계속하는 여인이 타고 있다. 택시 기사가 다시 회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 비장한 숙명적 대결의 공간을 뒤흔드는 건 바로 그 여인의 휴대전화 진동이다. 무예가와 택시 기사는 모두 “지금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라고 말하지만 그 대목은 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도 실패하며, 무예가와 택시기사는 상태와 병태의 변종이거나 그들의 이야기하기의 욕망이다. 해소되지 않은 그 욕망은, 회상이 끝난 뒤 갑자기 등장하는 인서트 컷에서 여전히 밧줄에 목매달고 흔들리는 무예가처럼, 혹은 독극물을 먹고서도 죽지 않은, 아마도 한쪽 눈을 잃고도 아마도 다시 살아날 택시 기사처럼, 이 이상한 이야기꾼들의 어설픈 회상의 주변에서 어떤 불만족의 잉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장례식의 멤버들과 함께 앉아 있는 귀신 병태가 너무나도 싱거운 자기 죽음의 진상을 말해주지만, 이미 이건 믿거나 말거나이다.

<약탈자들>은 진실의 상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이라는 심연 주변에서 공회전하며, 또 타인의 체험을 약탈하면서 더욱 허구화하는 이야기(꾼)들의 허망한 왕복과 순환의 몸짓에 관한 영화다. 아마도 이것이 이 영화의 영문제목 ‘The Pit and the Pendulum’이 뜻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 몸짓은 진실을 향해 열린 것일까. 아니면 이 영화의 최종적 이야기꾼인 감독이 이미 포기된 진실 앞에서 벌이는 자조적 유희일까. 나는 일단 후자에 가깝다고 느낀다. 다만 손영성은 이 야심차고 괴이한 데뷔작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이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 완전한 폐허라는 사실을 다짐하듯 되새기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그가 앞으로 만들어갈 필모그래피의 서론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그의 본론이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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