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다. 그리고 설경구다.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를 보고 두 이름이 묘하게 어울린다 생각했다. 극한의 자연재앙과 터질 듯이 뜨거운 남자의 만남은 보기 좋은 대결 같았다. 이솝우화 중 태양과 구름의 싸움도 생각났다. 멋진 힘 겨루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설경구는 항상 지글거리는 감정을 품은 남자였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은 세상을 버티는 것 자체가 힘든 인물이었고 <그놈 목소리>의 아버지는 딸을 잃은 슬픔을 누구나 원통해할 공공의 아픔으로 돌린 남자였다. 초기작인 <박하사탕>, 1천만 관객의 타이틀을 준 <실미도>, 몸을 20kg나 불렸던 <역도산>에서도 그렇다. 그는 항상 핏대를 세우는 남자였다. 눈에는 말 못한 울분과 분노가 넘쳤고 몸은 금방이라도 튕겨나갈 것 같았다. 설경구는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배우다.
하지만 <해운대>에서 그는 나서지 않는다. 생각과 달리 싸우지도 않는다. <해운대>는 크게 세 인물군의 이야기이고 설경구는 여기서 하지원과 함께 한축을 맡는다. “(박)중훈이 형이나 (엄)정화쪽은 든든하고. (이)민기나 (강)예원이 찍는 거 보면 재밌고. 서로 믿는 거예요. 잘 부탁한다. (웃음)”
그가 맡은 최만식이란 남자도 이전과는 다르다. 가볍지 않은 사연을 품었지만 ‘어리버리’하고, 편안하게 늘어져 있다. 기분 좋게 힘을 놓은 모양이 <사랑을 놓치다>와 <싸움>에 가까워 보인다. 부산 사투리와 “윤제균식 코미디”, 그리고 설경구의 넉살로 완성됐을 만식은 허허실실 그대로다. “자연스러운 거 좋잖아요. <가족의 탄생> 보면 굉장히 많이 궁리해서 찍었겠지만 풀어진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좋아요. 생활 같은 느낌.” 실현은 안됐지만 그에겐 김태용 감독과 손을 잡을 계획도 있었다.
설경구는 목표를 잃었다. 본인의 말이다. 실패를 뜻하진 않았다. 그는 무언가 하나를 정하고 찾으러 다니며 집착하는 마음을 버렸다. “죽 끓듯 하는 변죽”을 따라 “될 대로 되라”는 낙관을 타고 마음을 편안하게 놓는다. 강철중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얽매인 게 아닌가라는 바깥의 시선과 달리 그는 “하나의 역할과 함께 늙어가는 것도 괜찮을 거”라 말한다. “감독이 바뀌면 안 할 수 있어요. 그건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한배를 탔는데. 망해서 집어치우긴 싫고요. 떠밀려서, 영화가 안돼서 그만두는 건 자존심이 좀 그렇잖아요. 같이 세월 사는 느낌으로 60이 되면 어떨까. 그런 상상은 해봐요.” 집착은 버리되 자존심은 지킨다. 이전과 달라진 영화계 사정에 “더 신중해지긴 했”지만 작품이 없다고 드라마를 하고 싶진 않다. “설령 내가 하고 싶어 한다 해도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게 싫어요. 자존심인 거 같아요. 그저 지금 이렇게 일을 한다는 게 감사하죠. 왜 이렇게 됐는지. (웃음)” 세월은 지났고, 배우 설경구의 온도는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렇다고 관객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버리지 않았다. <오아시스> 때부터 계속해온 줄넘기와 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배우의 본능적인 기질. 설경구의 싸움은 이제 승패를 넘어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