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은 족제비다. 빙하시대에 족제비가 살고 있었느냐. 흐음.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리는 스테고사우루스나 트리세라톱스 같은 공룡들 이름은 곧잘 외우지만 신생대와 빙하기 포유류 이름은 거의 모른다. 코엘로돈타라는 동물이 뭔지 들어보신 분? 물론 없을 거다. 어쨌거나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에는 족제비가 등장한다. 이름은 ‘벅’이다. 그는 빙하 아래서 멸종하지 않은 공룡들과 함께 살다가 갑자기 빙하 위에서 찾아온 <아이스 에이지>의 주인공들을 도와주는 일종의 히어로다. 영화가 끝나도 그는 빙하시대로 돌아가지 않고 무시무시한 공룡들과 남는 길을 선택한다. 그럴 법도 하다. 사실 영국 악센트를 근사하게 쓰는 족제비와 미국식 악센트를 쓰는 빙하시대 동물들의 고향이 완전히 다른 곳이란 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원래 할리우드영화 속에서 영국 악센트를 쓰는 인물들은 주로 덜떨어진 숙맥이거나 누가 뭐래도 제 갈 길을 가는 불한당들 아니던가.
사이먼 페그는 영국인이다. 무엇보다도 족제비 벅처럼 정신나간 영웅 역할을 수도 없이 연기한 경험이 있다. 영국 시절의 그를 전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시체들의 황당한 새벽>(2004)와 <뜨거운 녀석들>(2007)을 한번 생각해보라. “내 캐릭터는 이를테면 일종의 안티-족제비다. 족제비다운 성품이 하나도 없는 족제비거든. 영웅적이고, 타고난 모험가에, 충성스럽고, 대담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정신이 나간 놈이다. 재주꾼 다져(<올리버 트위스트>의 꼬마 소매치기)와 커츠 대령(<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론 브랜도의 캐릭터)에다가 인디아나 존스를 섞어놓은 듯한 캐릭터랄까.” 사이먼 페그는 “혼자 녹음실에 틀어박혀 목소리를 입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도전적인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문제는 캐릭터의 육체적인 움직임을 알맞게 목소리에 덧입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리와 몸을 막 움직이면서도 입은 마이크 주변에서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배우들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좀 이상하기도 하고, 엄청나게 피곤하기도 하고. 5시간 동안 녹음하고 나서는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지난해와 올해 사이먼 페그는 할리우드가 가장 총애하는 코미디 배우로 자리잡았다. 올해 무시무시한 흥행성적을 기록한 J. J. 에이브럼스의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사이먼 페그라는 배우를 처음으로 할리우드 거대 스튜디오들의 가시권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사이먼 페그로서는 <스타트렉…>이 꽤나 초초한 경험이었던 모양이다. “그 영화에 뛰어드는 건 정말로 신경증적인 일이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야기를 새롭게 재발명해야 하는 영화였으니까 말이다. 어떤 영화든 결과를 예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예전 출연작 중에서는 촬영 중에는 정말 잘될 거라 기대가 컸으나 결과물은 꽝이었던 경우도 있다. 그러나 100% J. J. 에이브럼스를 믿고 뛰어들었다. 개봉 뒤 비평가들 역시 에이브럼스의 비전에 동의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다.”
<스타트렉…>과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로 연속 홈런을 친 사이먼 페그 앞에는, 심지어 더 거대한 프로젝트가 하나 기다린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벨기에의 국보적인 만화를 원작으로 연출하는 <땡땡: 유니콘의 비밀>(Tintin: Secret of the Unicorn)이다. 물론 그가 땡땡을 연기하는 건 아니다. 땡땡은 제이미 벨이다. 사이먼 페그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에 함께 출연한 인생의 친구이자 공동 각본가 닉 프로스트와 함께 땅딸막한 쌍둥이 톰슨 형사를 연기할 예정이다. “스필버그를 2년 전에 처음 만났다. 같이 대본을 쓰자기에 세트를 방문했는데 그가 그러더라. 영화에도 출연하는 게 어떻겠냐고.”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는 스필버그와 대본 미팅을 한 뒤 복도로 나오자마자 감격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췄단다. “우리의 영원한 영웅이 직접 쓴 대본을 우리에게 읽어주다니!”
<땡땡: 유니콘의 비밀>을 보려면 2011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전에 사이먼 페그는 절친 닉 프로스트와 함께 대본을 쓴 코미디 <폴>(Paul)에 출연할 예정이다. 내용이 뭐냐고? 두 영국인 코믹북 기크(Geek)들이 코미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횡단한다는 내용이란다. 거 참. 한줄짜리 시놉시스만 보고도 미친 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