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상상 속 이병헌은 타고난 연인이다. 오래 기대 울 만한 넓은 어깨의 소유자는 산골 소녀에게 꽃을 선물받는 젊은 교사(<내 마음의 풍금>)이자 생사를 초월한 인연을 믿는 로맨티스트(<번지점프를 하다>), 시골 도서관 사서를 마음에 둔 서울 대학생(<그해 여름>), 심지어 세 자매를 매혹한 궁극의 연애 기술자(<누구나 비밀은 있다>)로, 이상형의 조건이 까다로운 여성들을 자신의 빛을 향해 끌어당겼다. 은근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구애하는 이 남자를, 어느 누가 쉽게 뿌리칠 수 있었으랴.
변화는 극적이어서 그는 단숨에 군신의 남자로 탈바꿈했다. <그해 여름>(2006)이 일종의 터닝포인트였다. 한때 남과 북의 경계에서조차 우정을 발견했던 군인(<공동경비구역 JSA>)이었던 그가 휴식의 터널을 지나 인정사정없이 단도를 내리꽂는 ‘나쁜 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하 <놈놈놈>)으로 돌아왔다. 그것마저 성에 차지 않았는지 눈에 드리운 그늘을 지우지도 않은 채 방랑 검객의 신세를 자청해 세계를 떠돌기 시작했다. 보스의 여자를 곁눈질한 남자가 형벌의 길로 들어섰듯(<달콤한 인생>), 국제적인 프로젝트에 의탁해 필리핀으로, 홍콩과 LA로, 그리고 프라하로.
<나는 비와 함께 간다>보다 늦게 촬영됐으나 앞서 공개된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에서 이병헌이 구한 피의 이름은 스톰 쉐도우다. 이 백색의 악당 닌자는 꽤 단호한 편에 속하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했다. “이 영화를 잘 선택한 걸까.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웬만하면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내가 이 나이에 칼싸움을 해야 할까. 만화가 원작인 이런 영화에 출연해야 할까. 그런데 언제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장고를 때리게 됐지 싶더라. 뭐가 두려워서 자꾸만 주저하지. 그래, 조금 늦었을 때가 오히려 빠르다고,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서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 선택했다. 내 인지도를 쌓는 데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자기라면 한다고 하기도 했고. (웃음)”
공은 울렸고, 싸움은 시작됐다. <놈놈놈>의 엔딩 재촬영으로 피범벅인 몸을 씻지도 못한 채 미국으로 날아간 그는 고된 트레이닝을 적수로 맞았다. 스톰 쉐도우의 흰 가죽 장갑은 무술, 특히 검술 달인의 것이어야 했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한달여뿐이었다. “<지.아이.조> 팬들은 스톰 쉐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가 얼마나 칼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지 잘 아니까. 스턴트팀들의 일과를 한달 이상 따라했다. 거의 무술인으로 살았지.”
그렇다면 스톰 쉐도우가 닌자라는 사실은 어땠을까. 그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캐스팅된 한국 배우라는 핫이슈에 지겹도록 따라붙을 걱정스러운 디테일은 아니었을까. “첫 미팅 때 캐릭터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 그랬더니, 일본 닌자라고 하더라. 내가 일본 사람으로 나와야 하냐니까 그건 네 선택이라고.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사람으로 해달라고 했다.” 눈동자의 색깔이 다른 영화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작업은 고단하되 그 열매만큼은 달았다. 7월29일 한국에서 열린 <지.아이.조> 기자간담회에서 이병헌은 시에나 밀러며 감독 스티븐 소머즈와 몇번이고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프라하 로케이션 촬영 중 배우들과 부쩍 가까워졌고, 그래서 농담삼아 “내가 무게 잡는다는 소문이 났다던데, 범인이 누구냐”고 묻자 “너같이 멋있고 착한 애가 어딨냐”고 반문하더라는 이야기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닌자의 검을 칼집에 꽂은 이병헌은 고국을 지키려 총을 꺼내든 상태다. 10월14일 첫 방영될 <아이리스>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대형 첩보드라마로 벌써부터 뉴스를 쏟아낸다. “드라마가 끝나면 진짜 쉬고 싶다.” 그을린 얼굴로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어쩌랴. 이병헌의 전투는 올해 말까지 계속될 테고, 우리는 그 치열한 결과를 브라운관에서 목격해야 한다. 마지막 싸움이 막을 내리는 순간, 그 역시 문득 생각하지 않을까. 아직 갈 길이 멀었고, 주먹엔 힘이 남았다고. 그러니 내 모험을 여기서 끝낼 순 없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