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데릭 엘리는 이 칼럼에서 한국 영화감독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이야기 방식의 특징을 지적했다. 인용하면 “한국 젊은 감독들은 할리우드영화를 흉내낸다고 비난받지만 이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현대 한국영화는 독특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 시작부터 영화 절반까지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중반부터 끝까지 드라마를 점진적으로 심화해간다. 이것은 할리우드식 삼막 구조와는 완전히 다르다.”
데릭 엘리의 이런 지적은 현대 한국영화가 성공한 비결을 정확히 짚어낸다. 영화 초반에 캐릭터를 강조함으로써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이야기가 심화되면서 관객은 더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이 이런 장점을 분명히 의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략은 효과적이다.
현대 한국영화에서 캐릭터는 플롯에 우선한다. 그러나 몇몇 영화들에서는 영화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캐릭터보다 우선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배경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 한편, 많은 한국 감독들이 특이한 배경(1920년대의 한국, 외국이나 미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을 선호하는 듯하다. 10년이나 15년 전에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이런 영화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저예산영화조차 정말 그럴듯해 보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본 <이웃집 좀비>는 그런 면에서 놀라웠다. 저예산영화로 영화 대부분이 제작진의 아파트에서 촬영되었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서울의 묵시론적 이미지는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영화감독들이 캐릭터를 완전히 발전시키는 것보다 인상적이고 잘 만들어진 배경에 더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스크린상의 특이한 물건과 풍경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지만 한편으로 캐릭터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평범한 순간과 디테일이 부족해진다. 그렇다고 감독들이 캐릭터에 관한 관객의 무관심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많은 영화들에서 멜로드라마적인 상황이 캐릭터의 발전을 대신해버리곤 한다. 아무리 극적인 상황일지라도 이래서는 주인공들에 감정이입하기가 힘들다. <이웃집 좀비>는 바로 그런 예다. 재미있는 영화지만, 캐릭터를 더 잘 발전시켰으면 훨씬 더 강력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배경에 공들인 대다수의 영화가 영화감독과 스탭들의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은 고예산영화라는 점이다. 이런 영화가 실패하면 무척이나 마음이 쓰릴 것이다. 그렇지만 실패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영화들에서 창조적인 배경을 벗겨내고 평범한 상황에 놓고 생각해보라. 감정적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미래나 시대극에 관심있는 감독들이라면 배경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특정한 배경을 발전시키는 편이 맞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가장 간단하고 보편적이지만 효과적인 이야기라면 아일랜드영화 <원스>를 떠올려보라. 이 영화는 1920년대 한국이건 2100년의 중국이건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해도 가능한 이야기다. 사회적 관습이나 음악, 의상, 헤어스타일은 달라져야겠지만 말이다. 어떤 배경에 놓이건 감정적으로 캐릭터가 그만큼 발전되어 있다면 같은 수준의 성공을 거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