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을 보고 나서 과연 이 영화의 감독 조민호에게 이런 유형의 스토리가 적성에 맞는가를 생각했다. 조민호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다. 데뷔작인 <정글쥬스>나 두 번째 영화인 <강적> 모두 저평가된 불운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영화들의 매력은 모두 장르관습의 평평한 지점을 뚫고 나오는 기이한 에너지에서 나온다. <정글쥬스>의 초·중반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량리 빈민가 주변 아이들과 청년들의 방기된 삶의 꼬락서니가 주는 면면은 낯선 무서움과 웃음을 동시에 안겨준다. <강적>에서 전형화된 버디 무비의 꼴은 도시 후미진 구석에서 벌어지는 액션의 박력으로 가볍게 상쇄된다. 상금을 타기 위해 인터넷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참가하고자 호주까지 날아간 여덟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는 생존수난극을 다룬 <10억>은 조민호의 이전 영화들 가운데 가장 스테레오 타입에 갇혀 있다. 모든 게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고 반전도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시사회를 마치고 나온 대다수의 반응만큼 이 영화가 형편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낯 뜨거운 순간들도 있지만 나는 대체로 이 영화를 즐겼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도 그랬다. 등장인물들은 멍청하게 행동하지만, 이건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봤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등장인물들은 최악의 선택을 한다. 심하게 바보같이 구는데 이런 역할을 박해일, 신민아, 정유미, 이민기 등의 배우들이 하니까 더 어색하다. 좀더 야무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게임 참가자들을 지옥에 빠트리는 장 PD(박희순)와의 지략싸움에서도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장 PD가 대단한 머리를 쓰는 것 같지도 않다는 점은 더 이상하다.
<정글쥬스>와 <강적>에서의 호방함은 어디로
조민호 감독은 특히 인물의 감정을 다룰 때 무력하다. 전작들에서도 그는 등장인물들이 순화된 감정을 보여줄 때 안절부절못하는 듯이 군다. 사적으로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 그의 영화에서는 어색하다. 대신 야수와도 같은 인물의 면면을 보여줄 때 거침없이 호방하다. 나는 이게 그의 기질이라고 본다. <정글쥬스>나 <강적>에서도 내 마음이 반응한 것은 그의 영화의 야수적인 기질이었다. <정글쥬스>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아수라장의 광적인 액션장면이나 <강적>에서 도시가 좁다하고 뛰어다니는 주인공의 행각은 묘한 통쾌감을 주었다. <10억>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등장인물들이 금방 짐승 수준으로 행동하기 시작할 때 아마도 이것 때문에 조민호가 이 영화 연출을 수락하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였다.
유감이지만, 그게 잘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영화 중반까지 등장인물들간에 정서적 결합작용이 일어나는 과정 묘사는 젬병이다. 해병대 출신으로 몸을 잘 쓰는 박철희(이민기)와 공부 못하는 대학생 김지은(정유미) 사이에 사랑과 욕정 경계에 걸친 감정이 일어나는 장면의 묘사는 실소가 일어나는 수준이다. 이민기가 이 영화의 출연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눈빛을 보여줬고 정유미가 여타 영화에서 섬세한 매력을 보여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연출의 무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영화 초반에 일찌감치 죽는 등장인물들의 경우엔 연출적 배려가 더 박하다. 짧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죽어간다, 라는 것이 이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전도유망한 감독에게 이 정도의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10억>이 상당히 괜찮은 라인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성의 함정에 빠진 이유가 궁금하다. 장르영화라서 이 정도면 용인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서툰 개연성을 뭉개고 나가는 지점이 너무 많다. 대사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과연 그럴까, 라고 숙고한 흔적이 없으면 곤란하다. 짧은 일정으로 촉박한 예산을 감당해야 했던 영화로서는 그럴 만하다고 추측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고 더 재미있을 만한 부분도 있었다. 스타라고 인식되는 배우들이 결함 많은 인물을 연기해 걸리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등장인물 대다수가 실은 호감을 갖기 힘든 성격을 가졌다. 그게 영화의 맨 마지막에 밝혀진다. 제 앞가림 못하고 그러면서도 남들이 사는 관성에 따라가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좀 끔찍하다. 마치 한국 사람들 대다수가 술을 마시면 그렇게 하듯이 이 영화의 인물들도 조금씩 극한상황에 몰리면서 제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해일과 신민아 캐릭터가 아주 조금 영웅적 기질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들도 별볼일없는 성격인 것은 변함이 없다.
등장인물의 감정들을 더 원색적으로 드러냈으면
이런 캐릭터들의 특징으로 야생에서 벌어지는 감정들을 더 원색적으로 드러냈으면 <10억>은 아주 개성 있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시나리오에선 그런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봤다. 완성된 영화에서 그게 축소된 게 아쉽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후반부가 재미있었다. 스토리의 개연성 면에서 거의 파탄지경이 나는데도 그렇다. 파도가 센 바다가 곧잘 이어지는 바위투성이 해변에서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이 벌이는 클라이맥스 장면에 이르러서야 조민호 영화의 장점인 야수성이 슬쩍 보였다. 너무 늦게 다뤄진 장면이기는 하지만. 별볼일없는 인생들이 삶의 막장에서 감정을 마구 드러내며 이전투구하는 그 광경이 맘에 들었다. 시종일관 너무 일면적으로 악마적인 연기를 펼치는 장 PD 역의 박희순도 그 장면에선 괜찮았다. 이민기도, 박해일도, 신민아도 그 장면에선 캐릭터와 조응하는 것 같았다. 조민호가 어떤 생각으로 나머지 장면들에서 배우들과 소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순간이 <10억>에는 적다. 나머지는 다 장르 관성에 따라 억지로 끌려가는 것들이다.
사건의 배후를 설명해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민아가 역을 맡은 조유진이 인상적인 말을 한다. “사람은 다 똑같단 말이야. 겁에 질려 살아간단 말이야.” 우리 사회가 이렇게 악다구니로 가득 찬 것도, 욕망으로 넘쳐나는 것도, 가학적인 것도 다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을 조금 더 밀고 나가지 않은 것이 아쉽다. 일확천금 대박의 꿈에 매달린 인간들이 복수극의 희생양으로 당하고 마는 <10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소재의 외피가 주는 스릴러의 논리가 아니었다.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대로 그들의 감정의 정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조민호의 세 번째 영화는 장르영화의 논리에 궁색하게 대응하느라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다. <10억>은 상황을 더 간결하게 몰고 가고 등장인물들의 먹고 먹히는 과정을 전면에 부각시키며 감정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지만 조민호는 결국 실패했다고 본다. 그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이 조민호의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의 창작자적 감성은 장르적 관성에 매이기에는 훨씬 야수적이다. 상업적으로 통할 수 있는 경계에서 그가 그 감성을 접목할 새로운 소재를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