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으로 시작되는 궁금증이 많았다. 나도 어른이 되면 떡볶이나 새우깡 같은 애들 군것질을 안 할까. 나도 어른이 되면 뽕짝을 들을까. 나도 어른이 되면 ‘휴먼 터칭 스토리’에 감동받을까. 어른이 돼본 결과 여전히 새우깡 좋아하고 여전히 뽕짝 안 듣는다.
그래서 사람은 안 변한다에 한표인가 하면 아직도 그건 잘 모르겠다. 사실 이 칼럼도 ‘군계일학’ 아저씨들을 선별해가며 나머지 아저씨들을 ‘왜 저래’족으로 구별짓기하는 것이, 이미 사람은 늙을수록 뻔하게 변한다는 전제를 깐 것 아니겠나.
이렇게 혼란에 빠진 ‘다소 나이든 여전히 청춘’인 나에게 최근 희미한 빛을 던져주신 분 있으니 유희열이다. 유희열만큼이나 스타일 강한 그의 팬들이 처죽일지 모르겠으나 유희열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무렵 나 역시 이 사회의 산업역군이 되어 음악 들을 시간에 음주를 통한 인적 네트워킹 강화를 해야 했고 라디오 들을 시간에 음주를 통한 샐러리맨의 애환 공유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인간 유희열을 발견한 건 엉뚱하게도 그가 그렇게 출연을 후회했다는 <명랑 히어로>를 통해서였다. 그 느낌은 아저씨 참 멋지네도, 재밌네도 아닌 아저씨 참 쿨하네였다.
유희열을 아저씨라고 하는 건 다소 이른 감이 있지만 어쨌든 마흔줄이 코앞인 그를 보면 어떤 안도감이 든다. 그건 그와 내가 동년배이기 때문일 거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편해지고 나이가 들어서 서슴없이 ‘앞담화’성 농담을 하고, 나이가 들어서 적당한 기름칠이 쳐진 게 아니라 원래 그랬던 것 같다. 느낌이 아니라 자료를 찾아보니 10년 전에도 상태 그대로였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왔다. 킬킬거리며 그를 사랑하는 소녀들의 열광질을 보다보니 어쩌면 우리 세대는 앞 세대보다 훨씬 멋진 아줌마, 아저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유희열로 대표할 만한 그 세대의 성깔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가 아니라 “취향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눈 똥그랗게 뜨고 우기기 때문이다.
좋은 취향이 있는 게 아니라 취향은 변하지 않는 게 맞다. 나이들었다고 뽕짝 찾아듣는 것도 우습지만 나이들었다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100선’ 같은 걸 찾아듣는 것도 뭐, 지루하다. 따지고 보면 촌스럽고 뻔뻔한 뉘앙스의 ‘아저씨’, ‘아줌마’ 아이덴티티는 몰개성과 ‘뭐 어때’라는 집단 호기가 만나 탄생시킨 한 떨기 꽃망울 아니겠는가.
유희열이 더 나이 든다면 그 역시 아저씨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겠지만 (지금도 뭐) 그 지점에서 ‘아저씨’라는 단어는 앞에 적은 어떤 뉘앙스가 탈색된 그저 특정 연령대를 지칭하는 의미로 작용할 것 같다. 진짜 필요한 아저씨는 멋진 아저씨가 아니라 그렇게 ‘아저씨’라는 단어 자체가 별다른 의미를 확장시키지 않는 그런 아저씨들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