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액세서리]
[그 액세서리] 죽은 왕녀를 위한 브로치
2009-08-26
글 : 강지영 (GQ KOREA 패션디렉터)

한마디로 말하면 HBO의 새 영화 <그레이 가든스>는 쇠락한 상류층 모녀가 어떻게 너구리, 고양이 75마리와 동거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풀 스토리다.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슬픈 영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의 고모인 이디트 부비에 빌과 그녀의 딸 리틀 이디의 실화는 75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고, 최근 제시카 랭과 드루 배리모어의 깊은 우물 같은 연기로 다시 영화화됐다.

롱아일랜드의 부촌 이스트 햄튼의 ‘그레이 가든’이 위생관리법 위반 혐의로 적발되고 마침내 이디 모녀가 강제퇴거 명령을 받았을 때 집 안의 꼴은 기이하고도 괴이했다. 지붕에서 떨어진 벽돌과 깨진 유리창, 통조림 음식 찌꺼기와 동물의 배설물, 식물의 덩굴과 줄기가 첩첩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저택. 더 수상쩍은 것은 쓰레기 하치장 같은 집 안에서 모피코트와 호피 올인원, 연어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두 여자였다. 그녀들은 한때 미국 최고의 로열 패밀리였고 분탕한 연애를 즐겼으며 ‘소프트 슈 댄스’와 더불어 샴페인에 빠져 지낸 사교계의 꽃이었다. 엄마인 빅 이디는 백합처럼 우아했고 딸인 리틀 이디는 제비꽃처럼 명랑했다.

영화는 모녀의 화양연화 1935년과 몰락의 최고조 1975년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영광과 쇠락의 징후는 리틀 이디의 모자에서부터 확연히 구분된다. 어딜 가든 스스로를 ‘시인이자 요부, 엔터테이너’라고 소개하는 이디는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등장할 때마다 쓰고 나오는 모자가 헬렌 카민스키 모자점을 계절별로 털어도 저 정도는 안되겠지 싶을 정도다. 아직 수중에 돈이 좀 있을 때, 그녀는 프로필과 클로시, 브르통과 카플린을 화려하고 가끔은 고상하게 연출한다. 그러나 그레이 가든에서 이디의 머리에는 모자 대신 각종 천이 씌워져 있다. 꽃무늬와 줄무늬, 이런 무늬 저런 무늬, 검정과 보라와 흰색, 실크와 면과 모직, 심지어 타월까지도. 이디는 커튼 쪼가리 같은 이 천들을 무조건 머리에 쓰고 목뒤를 한번 묶어서 고정한다. 모자의 한 종류인 ‘헤드타이’라고 하기에는 천들이 너무 크거나 싸구려다. 알 수 없는 천을 뒤집어쓴 그녀는 얼핏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처럼 보이지만 과거 어느 시절 ‘모자의 여왕’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다만 그 모든 천들에 번쩍이는 금 브로치를 꽂는 것으로 한때의 영광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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