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불신한다, 고로 믿는다
2009-09-03
글 : 송경원
믿음에 대한 섬뜩하고 불편한 진실 <불신지옥>

<불신지옥>의 희진(남상미)은 시종일관 기침을 한다. 가족과 떨어진 채 도시에서 혼자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녀는 약국에서 병원을 가보길 권해도 이러다 떨어지겠지 하며 약으로만 버티는 악바리다. 영화는 피곤에 지친 그녀가 어느 날 동생에 관한 기이한 꿈을 꾸고 곧이어 동생이 실종되었다는 엄마(김보연)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초반에 제공된 희진에 관한 이러한 정보는 후반에 이르러 희진에게 씐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정교한 근거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인물에 관한 단순한 정보가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지닌 채 쉽게 납득하기 힘든 심령현상의 근거로까지 확장되는 것은 이 영화의 탄탄한 이야기 구성이 가진 미덕 중 하나다. 소진(심은경)의 신(神)이 피붙이인 희진에게 옮겨갔다는 무당의 선언은 영화 속에서 제공된 수많은 정보 중 희진이 기침을 하고 이상한 꿈을 꾼다는 사실을 골라 빙의의 증거로 소환한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증명을 위해 원인이 선택되는 것이다. 이것은 호러나 스릴러와 같은 장르영화가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연출적 특성에 기인한 까닭인 동시에 <불신지옥>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믿음의 속성과도 닮아 있다.

장르적 관습을 답습하지도 배반하지도 않는…

트뤼포와의 대담에서 히치콕이 말한 것같이 “서스펜스를 만드는 기술은 관객을 끌어들여 관객이 직접 영화에 참여하도록” 하는 데 있다. 긴장은 정보의 제한을 통해 발생하며, 더 많이 아는 관객은 알지 못하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보며 서스펜스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감독에 의해 선형적으로 제시되는 플롯이 아니라 관객의 심층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관객은 파편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를 조합해 나가야만 한다. <불신지옥>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정서적 무게감의 동력으로 삼는다. 쇼커(shocker)와 같이 외적인 충격을 통해 공포를 유발하기보다 동생의 실종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이 빙의, 접신과 같은 심령 소재가 지닌 시각적 충격에 녹아들어 진득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불신지옥>이 관습적인 호러영화와 결별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관객은 동생의 실종과 관련한 진실에 접근할 때마다 지금껏 봐왔던 장면들을 자연스레 복기하며 따라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희진의 가위눌림 장면이나 봉투로 얼굴을 가린 죽은 자들의 환영처럼 강렬한 이미지가 층층이 포개어지며 공포를 증폭시킨다. 알코올처럼 쉽게 휘발되지 않고 이야기에 끈적거리며 들러붙은 이 창의적인 이미지들은 논리적인 이야기의 뼈대 위에 호러영화의 본분을 잊지 않고 깊은 맛을 내는 살을 붙여나간다. 영화는 기존 호러 장르의 공식을 답습하진 않지만 장르의 기대를 배반하지도 않는다. <불신지옥>의 조밀한 이야기 구성은 모든 화면에 이야기적인 당위성의 부여를 전제로 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공포를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화면에서 히치콕식의 맥거핀을 발견할 순 없다. 감독은 관객이 반드시 의미를 연결해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미지를 이야기에 복속시키고 있으며, 관객이 이미 주어진 이미지를 공포의 근간이 되도록 재구성해낼 것을 유도한다. 믿는 자는 믿고 싶은 것만을 본다. <불신지옥>은 예상을 벗어나는 파격을 배제한 채 공포영화를 구성하는 방식과 해석하는 관객의 관습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만들어진 영화다. 장르영화는 장르영화의 공식에 대한 의심을 접어둘 때라야 비로소 몰입이 가능하다. <불신지옥>의 감독과 관객,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믿음의 족쇄 안에서 광신이 빚어내는 지옥을 함께 경험한다.

기복(祈福)의 욕망이 충돌하는 추악한 현장

영화의 마지막 순간, 희진이 옥상에서 엄마를 발견하곤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따져 물었을 때, 엄마는 꽃잎에 감싸인 소진의 시체를 안은 채 “믿는 자에게 능히 힘을 줄 것”이라고 항변한다.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보편적인 상식이다.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따져보아도 이는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는 종종 스스로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거꾸로 원인을 찾아내기도 한다. 영화 속 수경은 암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지만 수경의 방에 가득 찬 먼지 쌓인 책꾸러미들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수경은 종교보다는 지식에 의존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믿었던 지식(현대 의학)의 세계가 병을 고쳐줄 수 없게 되자 쉽게 기독교의 세계로 편입한다. 이후 수경이 다시 무속에 빠져 접신한 소진의 발자국 부적을 그토록 맹신하는 것 또한 그녀에게 믿음이란 결과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에 가능하다. 유리보다 쉽게 깨어지는 그녀의 믿음은 결과를 향하는 흔적일 뿐이다.

<불신지옥>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본질은 믿는다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위해 믿고자 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후적 요구에 있다. 이는 엄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소진의 쾌유라는 결과를 바랐기 때문이며,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았을 땐 당연히 믿음의 대상이었던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원하는 바에 이르는 과정을 변모시켜야만 한다. 때문에 엄마가 성경을 자신이 요구하는 결과에 맞춰 해석한 뒤 광신에 이르는 것은 사실 자연스럽다. 그녀는 ‘결과’라는 믿음의 영역에 속해 있고 결과(소진의 행복과 안녕)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다.

<불신지옥> 속의 믿음이란 감정에 관한 진실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형사 태환(류승룡)이다. 희진을 범인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오컬트적인 힘의 존재를 부정했던 태환은 자신이 가장 갈망하는 것(딸의 쾌유) 앞에서 스스로 세워왔던 모든 체계와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믿음 혹은 욕망의 세계로 돌입한다. 이처럼 <불신지옥>이 보여주는 종교, 무속이나 기독교 혹은 광신이라 불리는 것들은 단지 형태의 문제이며, 본질은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기복(祈福)이다. <불신지옥>에서의 믿음은 이 기복의 욕구를 배신할 수 없기에 존재를 위해 항상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대에 놓인다. 그것은 믿음의 시험대가 아닌 욕망이 충돌하는 추악한 현장이다. 이 과정에서 드디어 믿음이라 불리는 환상은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결과를 위해 원인을 조작 혹은 왜곡하기 시작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타인의 ‘가능성’이 무시되고 원하는 결과에 부합하는 원인만을 남긴 채 필요없는 가치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이같은 믿음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의심하며 나의 믿음(혹은 믿음이라고 믿고 있는 과정)이 언제 박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들의 믿음은 불신을 동반한다.

가장 무서운 그것, 바로 아파트

믿음으로 충만한 엄마의 현관문 바깥에 걸려 있는 십자가가 무색하게도 현관문 안쪽에는 철통같은 자물쇠가 3개나 채워져 있다. 엄마의 방 또한 믿음이 없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항상 잠겨 있다. 그녀 혹은 그들의 믿음은 자신들을 배신할 수 있는 것을 배척한 뒤에야 안심한다. 욕망에서 비롯된 믿음의 대가는 불신지옥 속의 삶이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그들이 사는 아파트라는 공간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서로를 모른 채 종횡으로 은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뒤에야 출입을 허락하는 그들의 믿음은 낡고 을씨년스러운 아파트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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