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어떻게 디지털로 시네마를 제련하였나
2009-09-0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마이클 만의 <퍼블릭 에너미>가 ‘체현방식으로서의 영화’인 이유

아주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이클 만의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나서 그 예상조차 넘어서는 어떤 육중한 돌진에 놀랐다. 미국의 대공황기 시절의 걸출한 갱스터를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가 어떻게 일반의 기대심리를 깨고 독창적인 장을 열었는지에 관해서는 기사 형식으로 투박하게나마 소개했다(715호 ‘대도적이 죽여준다-마이클 만의 디지털-갱스터영화 <퍼블릭 에너미>의 성취, 그리고 그의 형제들’). 특히 나는“지금 그곳에 입회해 있는 카메라”라는 표현을 썼는데, 지나고 나니 그 말의 생소함에 관하여 혹은 입회의 배경과 과정에 관하여 다소나마 폭넓은 차원의 해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왜 존 딜린저를 선택했나

먼저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자. 갱스터 무비의 태생을 새삼 지적하는 건 물론 불필요하다. 하지만 갱스터 무비가 사회적 반영으로 출현하였으며 대공황기의 영화적 영웅을 낳았다고 할 때, 마이클 만은 왜 지금에 와서 실존 인물들 중에서도 존 딜린저를 선택한 것인가. 존 딜린저는 이슈 메이커이며 대도적이기는 했지만 권력자는 아니었다. 당대의 권력형 갱스터는 따로 있었다. 이를테면 권력은 존 딜린저 따위가 아니라 알 카포네나 메이어 랜스키의 것이었으리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누구보다 범죄소설의 열성적인 독자였던 에르네스트 만델은 기업형 범죄조직이 형성될 때 1931년 시카고에서 향후 담합을 위한 유명 갱단들의 회합이 있었으며 한편 메이어 랜스키 같은 거물은 하버드대의 경제학자 윌리엄 타우시의 <이윤획득>이라는 책을 탐독했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자본의 흐름에 유능했고 발빠르게 움직였던 것 같다. 그에 비한다면 우리가 영화에서 본 존 딜린저는 경제학 도서를 읽기에는 무지한 단독형 갱스터이며 할 수 있었더라도 그 대규모 회합은 그를 끼워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언론의 스타였지만 떠돌이였고 몽상가였으며 범죄세계에서조차 시대착오적인 단독자의 길을 걸었다. 이 점에서 그를 로빈 후드라기보다는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 어떤 돈키호테의 참패의 기록이다.

이 점에서 <퍼블릭 에너미>에는 주목해서 보면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왜 존 딜린저는 다른 여인이 아닌 빌리 프리쳇과 지속적인 연인이고자 했을까. 마이클 만은 사랑의 이야기에 능한 것 같지 않다. 나는 이 영화에서 그가 사랑의 감정을 그리는 데 재주가 없거나 관심이 없거나 없는데 있는 척하고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걸고 싶다. 중요해 보이는 건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이다. 빌리 프리쳇에게 인디언의 피가 흐르지 않고 홀에서 코트를 받아주는 하급 직원이 아닌 상류층의 여성이었을 때도 그들의 애정은 지속적이었을까. 혹은 존 딜린저의 조력자들 중 탈옥을 돕는 것이 흑인 죄수이고, 결국 나중에는 불법 이민이 꼬투리잡혀 배신을 강요당하기는 하지만 영화 초반 루마니아 출신의 유흥업자가 그의 은신처를 제공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일 것인가.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권력이 없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흘러가듯 지나치는 장면이 중요하다. 거대 범죄조직이자 마권 사기업자의 하수인은 조소하듯이 존 딜린저에게 말한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은행을 털어 버는 돈을 우리는 하루에 전화선으로 몽땅 벌어들인다고. 그때 존 딜린저의 난감한 표정은 패배를 직감한다. 영화에서 존 딜린저는 하층민적 인물이자 범죄의 세계 안에서조차 자본의 외곽에 속한 자로 비춰진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이지만 마이클 만의 데뷔작 <도둑>에는 인상 깊은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존 딜린저처럼 단돈 몇 달러를 훔친 다음 감옥에서 진짜 금고털이가 된 주인공(제임스 칸)은 단독으로 일하다가 뒤에 그를 끌어들인 조직의 보스 밑에서 일하게 되지만 결국 돈을 일부분만 받고 다음 일을 강요당한다. 그의 패거리는 일을 했으니 돈을 달라는 그를 향해 “노조에나 들지 그래”라며 조롱을 던진다. 그에 화답이나 하듯이 영화의 첫 장면과 클라이맥스의 장면은 금고를 터는 주인공의 모습을 마치 숙련된 용접 기능공의 작업인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서 보여준다.

갱스터는 육체노동자라는 감독의 착각

갱스터 무비에 관한 대개의 통념어린 착각은 갱스터는 곧 무정부주의자라는 착각이다. 마이클 만은 그 착각 대신에 다른 착각을 한다. 그는 때때로 갱스터가 전적으로 육체노동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놀라게 되는 것은 마이클 만이 이 점을 착각하고 집착할 때, 주인공의 범죄가 힘든 육체노동자의 그런 작업처럼 보이는 순간이 정말로 찾아오는 경우다. <도둑>의 경우가 그러하다. 하지만 영화가 거듭될수록 마이클 만 영화의 놀라움은 노동의 숭고를 그려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육중한 실존의 육체를 지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온다. <퍼블릭 에너미>가 그러하다.

이 육중함에 대해 말하려면 다른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다시 물어야 한다. 마이클 만에게는 궁극적으로 다른 동기와 욕망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이 중요하다. 나는 마이클 만의 완강한 사회적 의식이나 의도적인 기입에 의해 그런 착각이 생겨났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지금 이 시대 어떤 액션영화의 장인보다 자신이 다루는 장르의 실존을 고민하고 동시에 시네마의 실존을 고려하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는 영화를 어떻게 웰메이드하게 만들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이 장르의 육체성으로 영화를 돌진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예컨대 필름 시대의 마이클 만은 사내의 노동하는 육체(<도둑>), 격투하는 육체(<히트>), 싸우는 육체(<알리>)를 전시했다. 그러나 디지털 이후 그는 주인공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가 그 인상을 체현하여 관객이 그걸 영화 자체를 통해 겪게 만드는 쪽으로 끌고 간다.

장르의 육체성이라는 이 문제는 갱스터 무비에서라면 예상외로 오래된 화두다. 잘 알려진 사실 중 사운드의 발명 이래 그것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장르가 뮤지컬 다음으로 갱스터 무비였다는 점은 육체와 장르의 관계로 얽힌 갱스터 무비의 태생을 일러준다. 뮤지컬이 사운드의 출현으로 아름답고 환상적인 목소리를 얻었다면 갱스터 무비는 사실감 넘치는 토미건(당시에 유행하던 기관총)의 격발음을 얻었다. 갱스터 무비는 출현부터 장르적 육체성을 과시하며 주목을 끌었는데 마이클 만은 그 문제를 디지털 이후에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점이 왜 마이클 만은 1930년대의 향수를 저버리고 지금과 같은 건조한 영화를 만들었을까 혹은 입회의 카메라를 대동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본격적인 실마리다. “관객에게 1930년대를 보여주지 않고 관객이 거기에 있게 하려고 했다”는 마이클 만의 말은 궁극에 무엇을 뜻하는 걸까. 말하자면 마이클 만의 장르의 육체성은 그가 얻으려는 시네마의 육체성과 직결될 것인데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퍼블릭 에너미>의 입회의 기술을 지닌 카메라는 마침내 어떤 배경 아래 있는가.

사진적 영화의 생존과 <퍼블릭 에너미>

허문영은 얼마 전 이 지면에 <업>에 관한 평을 쓰며 이 영화를 계기로 포토그래픽한 것과 작별하는 증후로서의 그래픽한 영화, 즉 디지털 시네마의 한 측면을 품격있게 읽어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사진적 영화의 생존과 <퍼블릭 에너미>의 그러한 측면을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래픽한 디지털영화의 도래만큼이나 포토그래픽한 즉 사진적인 디지털영화의 출현도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갈수록 늘어나는 일인 시스템의 디지털영화들, 다이어리 시네마 또는 랜드 스케이프 시네마의 출현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은 사진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사진적인 것을 극도로 강화하여 주의환기시킴으로써 관객을 입회시킨다. 바로 이 반대편에 <퍼블릭 에너미>의 입회의 기술이 있다. 방법은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바르트가 말한 것, 사진의 궁극적인 역할이 마침내 ‘그것이 거기 있었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면 마이클 만의 디지털영화의 경우는 사진의 그 궁극적 역할인 극단적인 활동감을 추종함으로써 관객을 영화 속 그 자리에 있게 하려 한다. 1930년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1930년대에 있는 것이라는 건 그런 측면이다.

이 점이 역시 이 지면에서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에 관해 쓴 정성일의 평과 그의 성찰적 개념인 ‘뉴스 안의 시네마’를 떠올리게 한다(“멋진 총격전 대신 여기서 전개되는 것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핸드헬드의 뉴스 라이브 중계에 가까운 촬영이다”). 가령,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퍼블릭 에너미>는 그 현전을 약속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이애미 바이스>가 뉴스 라이브 중계라고 할 때 <퍼블릭 에너미>는 <마이애미 바이스>보다 현격하게 그 점을 더 격렬하게 추종한다. <마이애미 바이스>에 비교해도 더 강력한 수위로 심도의 파괴, 앵글의 불안정감, 근접과 원경을 오가는 극단적인 거리감을 시도한다. 그럴 때 영화는 더 찢기고 더 분해되어 있으며 최대한 불안정하고 미완이 됨으로써만 그 자리에 지금 존재하는 역동성을 역으로 뿜어낸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트루디를 구하는 장면이나 호세 예로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과 <퍼블릭 에너미>에서 멜빈 퍼비스가 존 딜린저의 은거지에 칩입하여 베이비 페이스 넬슨은 죽고 존 딜린저가 도주하는 장면을 비교해보면 얼마나 강도가 비약됐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거세진 영화의 강도를 따라 더 나아가야 할 것이며 또 다른 가정을 덧붙여도 될 것이다. 레브 마노비치는 스크린의 유형을 말하면서 사진이 여기와 저기의 시간적 동시성을 담지하지 못하자 그 이미지적 시제를 일치시키기 위해 ‘레이더’가 출현했음을 지적한다. 동시대의 마이애미 해변이 아니라 1930년대의 시간으로 건너간 <퍼블릭 에너미>는 실상 레이더가 하려 했던 것, 이미지의 시제를 맞추는 것에 원칙적으로 더없이 집착한다. 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혼란(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멋스러운 향수를 일으키기는커녕 캠코더로 들고 찍은 화면을 유튜브로 보는 것처럼 이렇게 요란하고 부정확하다는 말인가)은 차라리 그 이미지의 시제를 맞춰놓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때 그 시간의 일을 지금 이곳에서 실시간으로 느끼도록 하면서 <퍼블릭 에너미>는 입회를 요구한다. 이때 카메라의 역할은 레이더에 찍힌 점(Dot)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진이 충족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시제를 그리고 시간의 동시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채우기 위해 등장한 레이더의 목적은 X와 Y는 지금 바로 이 순간 어디에 있는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마이클 만의 디지털-갱스터에서 우리의 시선은 그 레이더의 점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를 따라 주시하고, 바르트의 명제처럼 우리가 거기 있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존재증명받는다. ‘그가 그때 거기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그와 함께하지 않았던 우리도 함께 그 옆에 지금 움직이고 있다.’ <퍼블릭 에너미>를 볼 때 그런 느낌이 든다.

‘라이브 액션 시네마’를 생각한다

이것이 <퍼블릭 에너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더러는 필름과 디지털을 뛰어넘어 공유된다는 점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사진적 영화와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관련을 맺는 영화들 또는 실시간 중계의 영화들, 그걸 넘어 레이더의 점처럼 동시적이기를 희망하는 영화들의 욕망은 조금씩 소재와 표현을 다를지언정 도처에 있다. 미래의 어느 날 <클로버필드>와 <레이첼 결혼하다>와 <퍼블릭 에너미>는 같은 범주 안에서 말해질지 모른다. 그들의 소제목은 그들이 거기 있었음을 보여주는 체현방식으로서의 영화들, 이라는 제목이 될 것이다. 괴수로 인해 폭파되는 빌딩의 바로 그 자리에 있기(클로버 필드). 언니의 바쁜 결혼식 전야의 그날 그 집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처럼 있기(레이첼 결혼하다). 존 딜린저의 옆에 있기.

애니매이션을 시네마의 중심으로 놓는 이들은 우리가 흔히 실사영화라 칭하는 것을 라이브 액션 시네마라고 부른다. 어쩌면 마이클 만의 영화는 어떤 점에서 점점 더 그 명칭을 충족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마이클만이 그 라이브 액션에 대한 어느 만큼의 확신을 고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영화가 쉽게 이 문제를 내려놓고 지치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모든 건 <퍼블릭 에너미>의 마이클 만은 어떻게 디지털로 시네마를 제련하였는가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변화해 나가는 영화의 향방을 보고 있자니, 이 질문은 쉽게 거둬들일 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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